어려움도 인생의 중요한 페이지
출근 전 헬스장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기를 했다. 매일 일정한 루틴이 있기에 처음에는 6.5 정도의 빠르기로 시작해서 점점 숫자를 높여간다. 8과 9로 올리다가 나의 가장 최대치인 10까지 올렸다. 보통은 어느 정도 그 빠르기로 달리다가 숫자를 서서히 낮추고 달리기를 마친다.
어느 날이었다. 거의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난 그 러닝머신의 최대 빠르기는 10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더 빠르게 달리고 싶지도 않았고 무리해서 숫자를 더 높이기도 싫어서 그냥 10을 최대치로 생각한 것이 그냥 내가 달릴 수 있는 MAX 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 난 왜 그랬을까? 그냥 숫자를 더 올렸다. 11로 그리고 12로 달렸다. 힘이 들었다. 그래도 달렸다. 숨이 턱에 차 오를 때 난 숫자를 10으로 다시 내렸다. 그때 난 편안함을 느꼈다. 바로 어제까지 나에게 최대치였던 그 10이 지금은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중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도 가끔 쓸모가 있다. 국어시간이었는지 한문시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나는 논어에 나오는 표현이다.
불혹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를 지나 어느덧 지천명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 이르니 가끔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볼 때가 있다.
대학교를 입학하고 5월의 어느 날 나의 첫사랑도 시작되었었다. 그 이듬해 9월 군대에 입대하기까지 전까지 젊은 청춘의 사랑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내가 군대에 있는 일 년 여의 시간 동안 그 친구는 열심히도 편지를 써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군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렇듯 제대를 앞두고 우리는 헤어졌다. 군생활의 마지막과 제대 후에 이별의 심한 열병을 앓았다.
그 힘들었던 사랑의 열병이 있었던 탓인지 그 이후에 결혼하기 전까지 누군가를 만나지는 못했다. 누군가와의 이별을 두려워해서 만나기를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이별의 극한상황을 경험했기에 이별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은행을 입행하고 3년여는 매년 12월 31일 제야의 종소리를 은행에서 들었다. 첫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해의 마지막과 그다음 해의 처음을 일을 하면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믿을 수가 없었다. 둘째 해는 머릿속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몸은 적응하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3년 차에는 몸도 마음도 적응을 하고 있었다.
그 이후 전산이 업그레이드되어서 더 이상 한해의 마지막 날을 그렇게 보내지는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야근은 계속되었다. 주중에는 10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고 주말에는 주중에 못한 대출서류등을 정리하기 위하여 출근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인간관계는 끊어지고 만나는 사람은 은행원으로 한정되어 갔다. 그렇게 그렇게 나의 청춘은 일에 묻혀갔다.
그때는 주말을 이용한 연수도 많아서 어느 해는 금요일 업무를 마치고 연수원으로 가서 토요일 오후 늦게 집으로 오는 연수로 채워졌던 기억도 있다. 그런 힘든 시간들이 있었기에 사실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극한 상황을 많이 겪여서 요즘의 업무강도는 견딜 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 해전 인생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경험하지 못한 극한의 상황이었다. 그 어려움 이후 일 년여를 정말 꾸역꾸역 견디며 지내왔다. 겉으로는 태연해야 했다. 가족들에게 난 괜찮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내가 가족들을 이끌어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극한상황 이후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 극한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시간은 어떻게 어떻게 흘러가고 그 극한도 잘 견디어 가고 있다. 이젠 그 극한 상황 이후의 웬만한 어려움은 평범함으로 간주해 버리는 여유도 가지게 되고 있다.
러닝머신의 12를 이미 달려보았기에 10의 빠르기에서도 여유를 가져본다.
인생의 한 페이지마다 그 극한의 상황은 다 다르다. 또 그 극한을 경험하고 나서 닥치는 어려움은 무난히 견디어 낼 수 있는 소위 멧집이 생긴다. 그러나, 그 멧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인생은 어려움의 연속이지만 또한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내는 상황들의 연속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