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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Nov 24. 2020

낯선 꿈, 낯선 사람

얼마 전에 꿈을 꾸었다.


어느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서 빽빽한 빌딩 숲이 저 멀리 지평선까지 이어진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편 하늘에서 빵빵한 물고기처럼 생긴 하얀 비행선이 나타났다. 어째 익숙하다 했더니 <마녀 배달부 키키>에 나오는 비행선처럼 생겼다. 건물 한 채만큼이나 컸다. 비행선의 배 부분이 이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어... 저거 추락할 거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지평선 께의 마천루 꼭대기쯤 높이에서 비행선이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떨어졌다. 엄청난 폭발이 연쇄적으로 건물들을 넘어뜨리며 내 쪽으로 밀려왔다. 이제 죽는 거구나. 심장이 쿵쾅거렸다. 붉은 화염이 펑펑 터지며 파도처럼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내가 있는 건물 바로 앞에서 폭발이 멈췄다. 주변이 모두 불타고 있었다. 나만 빼고.


그때 나는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꿈속에서 생각했다. '꿈인데... 저 강렬한 색깔 좀 봐, 붉은 화염이랑 잿빛 먼지구름... 그런데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반대의 꿈, 다른 곳은 멀쩡하고 내가 있는 곳만 무너지는 꿈은 수없이 꾸었지만, 내가 있는 곳만 남겨놓고 주변이 다 무너지는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너는 안전하다.'


'안전하다'라... 화가 났다. 내내 찬밥만 먹던 사람은 느닷없이 더운밥이 나왔을 때 기쁨이 아닌 두려움을 느낀다. 불운에 길든 사람은 처음 만나는 행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가 난다. 이거 뭐야, 뭐 하자는 거야.


갑자기 저한테 왜 이러세요? 왜 안 하던 짓 하시냐고요. 나참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이러면 제가 넙죽 믿을 거 같아요? 너무 낯설어서 좀 어이가 없는데, 그러신다고 제가 안전하고 평안해지진 않아요.


라고 쏘아붙였어야 되는데... 그저 말문이 막혀버렸다.




처음 상담에 갔을 때,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은 채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실컷 울다가 호흡이 좀 가라앉자 선생님이 자기 말을 따라 하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 나는 안전하다..."


꿈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괜찮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다. 겨우 말 두 마디가 뭐라고... 나는 끝내 따라 하지 못했다. 애원하듯 못하겠다고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나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선생님만 같은 말을 수십 번 하셨다.




상담을 마치고 집에 가기 전에 집 근처 풀빵 아저씨에게 들렀다. 풀빵을 굽다가, 보름 동안 사과밭에 가서 일을 하셨다며 조금 흠집이 난 사과들을 가져왔는데 먹을 테냐고 물으셨다. "트럭 앞에 문 열어 봐." 조수석에 비닐봉지에 담긴 사과가 있었다.


"우와, 아저씨!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 옆에 꽃사과라고... 쬐끄만 것들도 있어. 그것도 가져갈 테면 가져가. 맛있어."

"아녜요, 이것도 많아요."

"가져가. 나는 딸내미도 벌써 갖다 줬고 혼자 먹기엔 많어. 애들이랑 먹어."


내게 친절한 사람들이 낯설다. 어색하리만치 친절했던 꿈만큼이나. 낯선 사람들은 내게 친절하다. 내가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이들 말이다.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오래전, 시장에서 호떡을 팔던 이모는 내게 아무 이유 없이 호떡을 하나씩 더 넣어주고, 포장마차를 뒤돌아 나가는 나의 뒤통수에 대고 "사랑해~"를 외치곤 했다. 저 이모는 내가 나쁜 년이면 어쩌려고 저런대...


안전하지도, 괜찮지도 않다.

누군가 나에게 "그 꿈을 붙잡아요!"라고 말했지만 여전히 그것은 쇼윈도 안에 진열된, '타인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꿈도, 혹은 마음에도 없는 알이즈웰 주문도 아니다. 오직, 아무런 바람도 조건도 없이 내 손에 호떡 하나, 사과 하나를 쥐어주는 낯선 이들의 친절뿐이다. 나를 모르는 이들이 흔연히 베푸는 친절 만이 내 AT 필드를 무력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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