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자괴감을 표현하는 클리셰가 있다. "내가 동사무소에서 인감이나 떼려고 그 힘든 시험을 본 줄 알아?? 어??" 그것은 가끔은 공무원을 조롱하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동사무소에서 인감이나 떼는 주제에 말이야, 어??" 이 업무는 아마도 공무원의 모든 업무를 통틀어 가장 우스운 업무인가 보다. 대개 9급 첫 발령자나 읍면동 사무소 업무가 처음인 공무원이 맡게 되는 걸 보면 말이다. 바로 그 '동사무소 인감'이 나의 첫 담당 업무였다.
한국에서 인감은 매우 중요한 존재다. 서명의 효력을 인정하는 다른 나라에는 없고 일본, 대만, 우리나라에만 있는 제도로, 이른바 '국가에 보관한 개인신분증명용 도장'이다. 자동차나 부동산 등 재산을 매매할 때나 대출을 받을 때 인감이 없으면 거래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 법원의 업무에도 자신의 신원을 증빙하는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그러나 그 '인감'이라는 단어는 공무원과 연계되면 '아주 쓸모가 없으나 쓸모 있는 척하는'의 의미를 갖게 된다.
동사무소에서 하는 인감업무는 대개 발급이다. 발급은 전국 어디서나 가능하다. 가장 간단한 케이스는 아래와 같다. 레벨 0. (1도 아깝다.)
"인감 떼러 왔는데요."
"신분증 주시고요. 매도용인가요, 일반용인가요?"
"무슨 차이죠?"
"자동차나 부동산을 파시려면 매수인 인적사항을 인감에 기재해야 하거든요."
"일반용으로 해주세요."
"지문 확인 먼저 하겠습니다. 여기 엄지손가락 올려주세요."
본인 확인 후 시스템에 주민번호를 넣고 클릭하면 인적사항과 도장의 압인 모양(인영)이 자동 출력된다. 600원짜리 증지 찍고 교부하면 끝. 이러니 그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공무원들이 '나는 누구이며 여긴 어디인가'를 마음속으로 부르짖기에 딱 알맞지 않은가. 이 서류는 왜 인터넷 발급이 안 돼서 이렇게 사람을 잡는가! 정녕 나는 인간 서류 자판기에 지나지 않는 이 단순한 업무를 위해 행정법 판례를 외우고, 사용하지도 않는 우리말 고유어를 외웠던가. 수많은 한자를 암기했던 게 고작 인감의 이름을 판별하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아직 좌절하기엔 이르다. 인감업무 레벨 1. 드디어 이 업무에도 난도(難度)라는 게 생긴다.
"인감도장을 잃어버렸는데요.", 또는 "개명해서 인감을 다시 만들어야 해요.", 또는 "인감 처음 등록하려고요."
"주소지가 저희 관할 맞으세요?"
"네, 이 옆 아파트 살아요."
"신분증이랑 새로 만드신 인감도장 주세요."
인감증명서에 찍혀 나오는 도장 압인은 시스템에 미리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산 이전에 종이로 된 대장이 있었고, 그 대장은 여전히 읍면동마다 창고에 보관돼있다. 거기에 새로운 도장을 찍어서 전산에 스캔해 넣는 것이다. 인감을 등록한 적이 있다면 그 대장은 내가 전입신고를 할 때마다 나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도장을 잃어버린 상태로는 인감증명서를 발급해도 소용이 없고, 꼭 주민등록지에 가서 변경해야 한다. 인감 담당자는 이사한 사람의 인감대장을 이송하고, 변경사항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인감을 등록하는 계기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취득하는 때이다. 외국인도 한국에서 재산을 취득하려면 인감도장을 파야 한다. 매매 혹은 상속. 그렇다, 상속. 나도 그랬다. 간혹 대장을 정리하다 보면 아주 어린 아이들의 인감대장을 보게 된다. 미성년자이니 보호자가 만들었겠지만. 부모님이 그 아이의 이름으로 집을 사준 것이기를 바라며 금수저라고 시새우고 싶지만, 언젠가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와서 인감대장을 만들던 한 어머니의 머리에는 하얀 리본 핀이 꽂혀있었다.
인감을 정리하는 일은 성격에 맞았다. 남녀로 나뉘어 주민번호순으로 가지런히 꽂혀있어야 할 인감이 자꾸만 제자리를 떠나 어딘가에 숨어있는 걸 알게 된 후, 인감 철을 하나씩 꺼내 순서를 맞추다가 급기야는 소위 '대사' 라는 걸 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다 체크한다는 뜻이다. 인감은 겉보기엔 너무 간단해서 무시당하는 일이면서도, 민원인과 다툼이 많은 업무라서 담당자들이 반기지 않고 홀대하기 쉬운 업무다. 어느 전임자가 대장 창고를 홀대하거나 분탕질해놓으면 후임은 된통 골탕을 먹는다. "왜 찾는 대장마다 자리에 없는 거지?"
우리 동사무소의 인감은 만 장쯤 되었다. 처음엔 그저 순서를 맞추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하나씩 전산조회를 하며 이사 간 사람의 대장을 추려 뒤늦게 이송시키거나, 사망자의 것을 별도 보관철에 옮겨놓거나, 대장이 두 개 있는 사람은 하나로 묶어놓는 등의 정리를 하게 되었다. 업무의 레벨이 높진 않지만 일종의 깡(그렇다! 이건 이럴 때 쓰는 단어다.)이 필요한 일이었다. 밤에 초과근무를 하면서 거의 4, 5개월이 걸려서야 겨우 마지막 인감을 덮을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어질러질 운명적 destiny지만 그때만큼은 너무나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인감별곡 2탄(쓸 수 있다면...)에서
이제 인감업무의 최고 레벨을 소개한다. "증명서 발급 거부하기." 멍청하고 고리타분한 공무원 취급을 받기에 아주 알맞은 극강의 난이도다.
가끔 인감 담당자가 받는 공문 중에는 '부정발급으로 인한 고발' 사례가 있다. 사망자의 인감을 몰래 발급하려다가 경찰서에 가신 분들의 반성문이 첨부돼있다. 사망자의 인감 발급은 시도한 것 만으로도 범죄행위다. 인감은 본인이 발급 신청하거나, 위임자가 반드시 법정 서식의 위임장을 '직접' 써주어야 발급이 가능하다. 인터넷으로나 무인발급기로 발급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다로운 서류다 보니 발급이 거절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치매 환자의 인감은 발급이 불가하다. 인감을 발급하겠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하는데 치매인 경우 '진의'가 인정되지 않는다. 환자의 재산을 처분해야 하는 가족은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법원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성년후견인 인정을 받으면 치매환자의 재산권을 대리 행사할 수 있다. 인감 발급도 물론 가능하다. 법원의 절차는 오래 걸린다. 그래서 치매나 정신질환으로 의사능력이 없는 사람의 재산을 처분하려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일반인들이 알기 어렵고, 알아도 혼자 할 수 없는 까다로운 부분이 많아서 법무사나 변호사를 통해서 진행해야 하는 값비싼 절차다.
신분증 때문에 거절되는 경우도 많다. 아는 동생은 야간민원 근무 때 나에게 전화를 해서 "민원인이 공무원증을 갖고 와서 인감을 떼 달라는데 안 된다고 말씀드려도 자꾸 책임자 바꾸라고 하셔요." 라며 책임자 행세를 부탁했다. 공무원증, 장애인등록증, 복지카드, 학생증은 공인 신분증이 아니다. 그걸 알 만한 분이 자기 관등성명을 대면서 "어디서 위아래도 모르고 거절하냐, 이런 일이나 하면서..."라며 온갖 악담과 저주를 퍼붓고 갔다는데 나도 그 사람, 두고 볼 거다. 경찰이시라며, 법 지키셔야 되는 분이 그러시는 거 아니다.
그 외에도 인감 발급을 거절해야 하는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교도소, 외국에 있어서 직접 발급이 불가한 경우는 교도소장, 영사의 확인서를 제시해야 발급이 가능한데, 그냥 소유자의 도장과 신분증만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많은 것은 위임장을 가져오지 않은 대리인의 발급 요청이다. "신랑이 지금 회사에 출근했어요."의 사유는 위임장이 있어도 안 된다. 직접 발급이 불가한 사유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절하면 "역시 공무원들이란... 인감이나 떼는 주제에...!"로 명백하게 읽히는 표정의 허섭스레기 취급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한 번은 어떤 민원인이 나에게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 인감을 가져갈 건데, 굳이 그렇게 빡빡하게 해야겠어요? 좀 쉽게 가죠."라고 우아하게 말했다. 불법적인 절차로라도 하겠다는 것이다. "저는 발급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발급하면 제가 불법행위예요."
공무원이 퇴짜를 놓는 데에는 법적으로 불가한 이유가 있어서다. 인감이 개인의 재산권 행사의 수단이기 때문에 사람에 의한 이중, 삼중의 신원 확인을 거치는 것이다. 신분증 사진이 너무 오래되면 그걸로는 식별이 불가능하다. 한 번은 지문 확인 결과가 계속 오류로 떴다. 지문이 확연히 달랐다. "선생님, 정말 본인이 맞으세요? 아니신 거 같은데요?" 하자 슬그머니 일어나서 앞에 놓인 신분증을 집어서 뒤돌아 갔다. 남의 신분증을 가지고 와서 인감을 발급하려 했던 것이다. 너무 화가 나서, 거기 서시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아마 인감이 없어지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바로 공무원일 것이다. 공무원의 업무 중 인감은 퇴출 대상 1호다. 일제강점기 때 경제적 간섭을 목적으로 도입한 제도라는 설이 있던데 기원부터 석연치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중앙집권적인 신분 인증 수단이다. 사고가 터지면 그 인감을 발급해준 공무원 역시 타격이 크다. 국가는 여러 대안을 만들어서 인감을 대체할 만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지만 정작 인감을 고집하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다. 아무리 대체 서류를 안내해도 인감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은 사실 매우 집요하다. 또 한편으로 도장을 생업으로 하는 이들의 저항도 있다고 들었다.
분노와 억울함의 대상, 같잖은 일로 취급받으면서도 사건사고가 가장 많은 일인 인감. 민원인들에게는 무시당하고, 정작 본인 스스로도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업무인 인감. 언젠가는 인감과 같은 집권적 증명서는 사라질 것이다. 그 업무를 하던 공무원들은 다른 일을 하게 되고 또 하나의 '라떼'가 추억으로 사라질 것이다. 전국의 인감대장들은 어떻게 될까. 인감대장의 보존기간은 '영구'다. 한번 만들어진 대장은 그 소유자가 사망한 후에도 남아있다. 그 인감대장에 쏟았던 엄청난 인력과 그들의 고된 정신적 노동을 생각한다. 그리고 수십 년간 주인을 따라다닌 그 쿰쿰한 인감들... 언젠가 역사의 뒷골목에서는, 인감을 만져본 이들만 아는 짠내나는 이야기들이 가끔 안줏거리로 올라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