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 봄, 난 죽기로 했다.

마음에만 두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by Fifth Life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하나만 꼽기는 어렵다. 특정한 날이나 사건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돌이켜보면 정말 고달팠다고 느껴졌던 모든 순간들이 그 당시의 나는 늘 “이보다 더 힘든 시간이 나에게 있었나?”라는 질문을 던졌던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힘든 순간마다 이미 힘든 시간을 늘 살아오지 않았냐며 스스로를 밀어붙이며 버티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때마다
이건 최악이 아닐 거라고,
아직 더 밑이 있을 거라고,

"너무 힘들어하지 말자... 어차피 내일도 힘들어" 라는 학습된 체념으로 하루를 넘겼다.
그러나 한 지옥을 잠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곧 다른 지옥의 입구에 서 있었다.
도망쳤다고 믿었던 그곳 역시
겉모습만 달랐을 뿐
결국은 같은 구조의 또 다른 지옥이었다.

지옥 넘어 지옥이었던 수많은 날들 중 하나만 이야기해보자면, 생의 마지막 밤일 거라 믿고 눈을 감았지만, 당황스럽게 눈을 뜨게 된 그 다음 날 아침이다.

그날 이후로도 난 여전히 잠들기 전 밤보다도 자고 일어나 맞이하는 아침이 유독 더 싫다. 비타민 D를 공급하고 삶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는다고 알려진 아침햇살이 나에게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될 수 없다는 끔찍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신호에 가깝다. 그 빛은 따뜻하기보다 도망칠 수 없게 붙잡는 족쇄 같아서 속이 탈 만큼 뜨겁다. 그래서 나는 해가 가장 쨍쨍한 시간대를 비켜가는 현재의 근무 스케줄이 의외로 편하다. 새벽 4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이 일상이 하루 중 가장 잔인한 빛을 피해 만든 나만의 사각지대 같다.

햇볕이 늦게 지는 여름과 봄보다 겨울을 선호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23년 4월 14일 밤,

22살, 난 대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서명한 적 없는 이 삶과의 노예계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그동안의 대학생활동안 A라는 성적은 돋보기 들고 찾아봐야 보일 정도였고, 중간고사를 본 이후 전공과목에서 D 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조차 하기 어려웠다. 전공과목이 C 밑으로 하나라도 떨어지면 무조건 재수강이었다. 대학생활을 한 학기나 더 견디는 건 정말 상상만으로도 숨통을 조여왔다. 한 학기 학비만 세 달 치 월세인 데다 한번 더 수강한다고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전혀 안 생길 만큼 어려운 수업이었다. 성적이 안 좋으니 당연히 인턴쉽이나 취업도 다 서류에서 떨어졌다. 차라리 노느라 공부를 안 했으면 덜 억울했을까 싶었다. 월세를 내며 대학을 다녔기에 주 40시간은 반드시 채워서 알바를 해야 했다. 일하느라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하긴 어렵지만 내 기준에서는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믿었다.

퇴근하면 보통 밤이라 도서관 가긴 힘들었기에 방에서 최대한 공부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눕는 순간 나태함의 유혹에 빠질 같아 침대 매트리스와 프레임을 통째로 버렸다. 공부하다 지쳐 책상 위에 엎드려 쓰러지지 않는 한, 편하게 누워 자는 잠은 사치였다. 이렇게 까지 했지만 시험은 늘 냉정했다. 공부의 성취를 묻는 시험이라기보다는 출제자인 교수님 본인만이 정답을 확신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 해야 하나...

강의 PPT를 몇 번을 읽어도 닿지 않는 영역이었으며 강의 진도를 모두 따라가도 도달할 수 없는 난이도였다.

배운 것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너희는 아직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교수님의 선언인 듯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과연 누구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애초에 능력에 맞지 않는 전공을 택한 나의 잘못이지 않을까...

엎드려 자던 쪽잠도 사치였던 게 아닐까...

나의 최선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낙관주이적이라 이 말을 자주 쓴다.

"It's okay, you did your best!"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늘,

"But what if my best is not enough?"였다.

그리고 그 의문은 "Maybe I'm not enough"로 결국 이어졌다.

왜 이렇게 염세적이냐는 이야기를 수 없이 들었으나 그게 내가 살아온 세계의 기준이다. 결과가 최고가 아니라면 함부로 최선이란 단어를 갖다 붙이는 건 허용되지 않는 한국인들의 사회. 스스로에게 혹독하지 않은 인간이 무슨 목표를 이루겠냐는 말을, 엄마에게서 벗어난 뒤에도 고스란히 스스로에게 반복하며 자학하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 어느 지역에서도 최저시급 알바로 자립을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기에 부모님 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20여 년간 도망 나올 날만 기다리며 하루씩 버텨가던 그곳에 내 발로 다시 들어가는 건 견디기 힘든 걸 넘어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독립하면 꽃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10대를 넘겼지만 그 희망은 꽃밭 같은 환상에 불과했다.

그래서 난, 아주 천천히 끊어져가던, 22년 동안 희망고문으로 놓지 못한 생명줄을 그만 놓기로 했다.

붙들고 있던 손에 물집이 다 터졌고 뼈가 으스러졌기에 놓아야 했다고 하는게 맞겠다.

죽음을 원한게 아니라 고통의 끝을 바란 것이다. 그 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죽음일지라도...


당시에 처방받았던 약을 술과 함께 복용하면 사망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검색 결과를 본 후 편하게 사라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 달 치 약을 한 번에 소주 한 병과 함께 비운 후 잠이 들었다. 위에 음식물이 없어야 약이 최대한 빨리 혈액에 흡수되어 삶에 제대로 지쳐버린 뇌의 전원을 꺼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하루 종일 물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았었다.

주량이 세지 않은데 빈속에 술을 들이킨 탓인지 몇 시간 후, 다음날 아침, 입에서 뭔가가 나오는 감각에 눈이 떠졌다. 그 순간 짐작했다.

실패했구나...

중추신경계를 제대로 눌러버린 약물의 부작용으로 인해 메스꺼움을 느끼지 못해 화장실에 달려가야 할 신호도 놓친 것이다. 의자에서 자고 있었으니 기도가 막히지 않을 수 있었다. 수명을 깎아먹던 수면 습관이 그 밤엔 아이러니하게도 날 살렸다. 그 사실이 기쁘진 않았다.

뒤늦게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방바닥에 그대로 엎어져 넘어졌다. 역시나 부작용으로 다리까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팔로 몸을 일으켜 어떻게든 서보려 했으나 방바닥에 발바닥이 닿기만 하면 두 다리가 한 발로 서있는 것 마냥 흔들려 중심을 잡기가 불가능했다. MBTI 테스트 결과가 J라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심란한 마음에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몇 시간 더 정신을 놓고 잠에 들었다.

그날 밤 내가 준비해 둔 상황은,

내 방을 정리할 누군가를 위해 최대한 손이 많이 안 가도록 쓸모없는 소품들과 냉장고의 음식들은 다 버리고 아직 쓸만한 물건들은 박스에 담아 포장해 놓는 일,

6월 말에 있을 절친의 생일 선물과 카드를 미리 준비해 놓는 일,

그리고 통장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의 수익자 명단에 나의 절친 두 명과 동생의 이름을 올려두는 것뿐이었다. 이 정도면 최선의 수습이라 믿었는데... 오산이었다.

전공이 생화학이기에 생물이 하루를 버티기 위해 매 순간 거쳐가는 온갖 화학반응들을 외우고 익혀야 하지만 정확히 어느 용량의 약이 그 반응들을 단체로 한 번에 셧다운 시켜 고통 없이 호흡을 멈추게 하는지는 계산해본 적이 없었음을 그제야 실감했다.

죽어있을 것을 예상하여 직장에는 아파서 출근 못 한다고 미리 매니저에게 보고도 하고 이미 짜여있던 나의 스케줄을 커버해 줄 직원도 구해뒀지만 같이 일하는 나의 절친이 날 걱정해 전화를 할 거란 생각까지는 못했다.

손가락마저도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워져 친구로부터 계속 울려대던 전화도 받을 수 없었다. 친구는 결국 내가 사는 곳까지 찾아왔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나의 상태와 책상에 굴러다니는 비어있는 약병, 그리고 그 병에 적힌 처방 날짜를 본 후 상황 파악을 한 뒤 내게 소리쳤다. "나랑 지금 같이 병원 가던지, 앰뷸런스에 실려가던지. 둘 중 하나만 정해". 그 친구에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단호하고 차가운 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너져가던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겨보려 애쓰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날 병원에 입원시켜놓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심지어 근무 도중에 창고에 가서 울다 매니저한테 들켰는데, 정확한 상황을 몰랐던 매니저는 내가 이미 죽었는 줄 오해했다고 한다. 많이 미안했지만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과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란 약속은 끝내 하지 못했다.


친구한테는 못 할 소리지만 난 그날 진심 죽길 바랐다. 그래서 생존했다는 현실 앞에서 고마워하기보단 원망했다. 죽는 게 계획이었기에 죽지 못하면 어떻게 다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계획은 애초에 세우지도 않았다. 삶에 더 이상 남은 미련이나 기대도 없었다. 낳아준 사람에게서 조차 진실된 사랑을 느끼지 못했기에 삶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질 이유 또한 없었으므로 죽음을 결정하는 게 생각보다 많은 고민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힘들었고 불안했고 친구들 덕분에 아쉽지 않을 만큼 행복하기도 했다. 약을 모두 삼키고 눈을 감기 전까지 친구들과 동생을 생각하고 걱정도 했지만 언젠간 그들에게도 찾아올 죽음이 나에겐 조금 빨리 오는 것뿐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날 적당히 애도하고, 묻어두고, 남은 생 잘 살아갈 거라고 내 방식대로 합리화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죄책감에 괴롭지 않을 수 있었기에...

친구들 보면서 어떻게든 살아볼 생각은 왜 못했느냐 물을 수 있겠지만,

난 이 정도의 추억이면 충분했다. 그들과의 인연은 내게 이미 과분했다.

사는 것에 지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이 먼저 닳아버렸다.

어쩌면 굳이 살고 싶지 않으면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스스로에게 허락했기에 역설적으로 예상보다 조금이나마 더 살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처음으로 트리거를 당기기 전 까진...


트리거를 당기긴 당겼는데 조준에 실패했나 보다.

그렇게 난 친구에게 손목 잡힌 채로 응급실로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