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어, 너를 보낼 수 없을 만큼. 하지만 그 만큼이 내 몫이 아니기에
나는 자살 시도자이면서, 동시에 사별자이기도 하다.
지난 5년 동안 여러 명의 친구들이 자살로 떠났다. 남겨지는 사람의 자리에 서본 적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여러 번 삶을 포기하려 할 수 있었는지는 나 스스로에게도 아이러니다. 하지만 상실 앞에서 마음이 아픈 것을 애써 밀어내면, 그들의 죽음은 나도 죽어도 된다는 합리화를 세워 주는 발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 생각 앞에서는 슬픔보다 안도감이 먼저 왔다.
한 명씩 떠나갈 때마다 나 역시 세상과 작별할 때 걸어가게 될 길에 계단을 하나씩 쌓아 내려주는 듯 했다. 이제 너도 편하게 오라고...
처음으로 상실을 경험한 건, 2021년 5월, 코로나 백신이 막 출시된지 얼마 안되어 사회가 일상을 조금씩 되찾아가며 바깥에서의 모임도 조심스레 허락되던 시기였다. 다소 보수적인 나의 부모님은 1년 반 동안 친구들과의 1대 1 만남도 일절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쪽 부모님이 허락해도 칼같이 안된다며 그냥 Zoom으로 수다 떨면 되는 걸 왜 굳이 만나서 위험을 감수하냐고... 어이가 없는 건, 친구 한명 만나는 건 허락 안 하면서 집에서 놀기만 (제대로 논 적도 없다) 할거면 일을 하라며, 하루에 수십명의 낯선이들을 마주해야 하는 알바 자리를 알아보라며 압박을 하셨다. 답답하고 외롭고 숨이 막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바로 죽어야겠단 생각보단 빨리 대학 졸업하면 독립해야겠단 욕심이 더 앞섰다. 많이 외로웠던 찰나에 백신 출시 소식은 너무 반가웠다. 백신을 맞고 학기가 끝나갈 무렵 바로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날 계획을 세웠다. 나만큼 술 좋아하는 친구 P에게 제일 먼저 카톡을 해봤다. "기말고사 곧 끝나지? 나 5월 17일이 마지막 시험이야. 다 끝나고 술 마시자!"
바로 답장이 왔다. "난 12일에 끝나. 술이라면 난 언제든 콜이지! 안 그래도 성적 때문에 미치겠어... 망한 것 같아. ㅋ"
"나도 망했어... 오픈 북이라 교수님들이 시험 더 어렵게 만들어. 망한 사람들끼리 술이나 마시자. ㅋㅋㅋ"
그렇게 술 약속을 잡은 뒤, A부터 C까지 아주 골고루 분포된 진수성찬 성적으로 학기를 마무리 했다.
"나 시험 끝났어! 잘 보진 않았는데 재수강 해야되는 건 없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ㅋ 언제 만날래?", 친구에게 바로 톡을 보냈다.
사흘이 지나도 답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멀리서 대학을 다니는 또다른 고등학교 친구 Y가 톡을 보내왔다. "너 괜찮아...?"
너무 뜬금없는 내 상태 확인 문자에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게, "뭐가?" 라고 답했다.
친구가 죽었다. 사흘이 지나도록 정작 그와 가장 친했던 나에게는 아무도 비보를 전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엄마도 나보다 먼저 전해들었으면서 숨겼다. "니 친구들 중 한명이 알려주지 않을까 해서 그냥 말 안했어." 저건 또 무슨 핑계지 싶으면서도 자기 마음 불편해지는 일은 남에게 전가하고 보는게 참 엄마답다 싶어 배신감도 안 들었다. 나와 카톡으로 술 약속을 잡던 그 당시에도 학업 스트레스와 진로에 대한 불안감으로 상담을 받던 중이었단 이야기는 나중에 그의 동생으로 부터 전해들었다. 죽을 용기를 내는게 사는데엔 더 큰 용기가 필요해서 라는 걸 너무 잘 알기에 통곡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국 장례식은 한국의 입관과 비슷한 Viewing이라는 절차가 있다. 입관과 달리 관을 닫지 않는다. 고인이 누운 관을 열어둔 채 유가족 뿐 아니라 조문객 모두가 그 앞에 꽃을 놓아두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고인을 사랑하는 모두가 이별을 수용하고 작별하기 위해 마련된 시간인 듯 하다. 한명씩 인사를 한 뒤 예배와 추모식이 진행되며 당일 날 관이 화장터로 옮겨져 발인식을 바로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한껏 차려입은 친구가 눈을 감은 채로 누워있었다.
마지막으로 술 한잔은 같이 마셔주지...
죽을만큼 삶이 힘들다고 한번이라도 표현했더라면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얘기가 참 많았을 텐데...
예배와 추도식 후에 유가족이 준비한, 지난 20년간의 친구의 삶이 담긴 영상이 상영됐다.
널 처음 만난 2013년 부터 너와 함께 봉사를 다녔던 시간과 고등학교 졸업식 까지... 예상했던 것 보다 나와 찍은 사진이 많았다. 찍힌지도 몰랐었던 사진들과 이런게 추억으로 남겨질지 몰랐었던 지난 시간들이 머릿속에 파노라마 처럼 스쳐가며 그때 처음 경험했다, 공황발작이라는 걸. 질식할 것 같아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 하고 중간에 잠시 나갔다.
너무 어린 나이도, 완전 어른도 아닌 애매한 시기에 갑자기 해외로 이민오게 됐다는 점도, 엄마가 세상 그 누구보다 어려운 사람이란 점에서도 우린 참 많이 닮아있었다. 더이상 그 대화를 너와 나눌 수 없게 됐는데, 나에게 절대 이길 수 없는 볼링으로 도전장 내밀며 내기하다 매번 삥 뜯기면서도 포기를 모르던 순간들도 끝인데 내가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할까...
널 지키지 못한 내가 잘 살긴 해도 되는걸까...
화장터 까지 운전해 가는 순간에도 핸들을 붙잡고 있던 손이 드릴을 단 것 마냥 너무 떨렸지만 안 갈 순 없었다. 널 위해서라기 보다 더 후회할 일을 만들어선 안되는 날 위해서.
너가 재가 되는 순간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거의 쓰러져가던 너의 부모님을 어떻게든 잡아보려 최대한 아무 표정 없이 너의 곁을 지키던 네 동생을 바라봤다. 내가 죽으면 내 동생이 딱 저 상태이지 않을까 싶어 칼에 베인 듯 마음이 쓰라렸다.
추모예배를 진행하던 목사는 너의 죽음을 그저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고라는 식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내겐 그 말이 여행가가 지도 밖으로 좀 벗어난 곳에 도착했다고 해서 길을 잃었다 라고 부르는 것 같아 거슬렸다. 그들이 이해를 못한다고 너의 죽음이 그저 돌발행동이라 축소되는게 싫다. 너의 마지막이 그들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너의 삶이 실패로 끝난 건 아니란 말을 꼭 해주고 싶었는데... 이미 더이상 나의 마음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너의 팔 옆에 꽃을 놓아두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게 제일 아팠다.
하루도 더 기다리지 못하고 그날 떠나야만 했던 너만의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한다. 살아 숨쉬며 고통을 느끼는 시간을 중단하는 것이 너에게 허락된 마지막 존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날 우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만큼 너가 채우고 가지 못한 시간이 다들 안타까워서겠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넌 정말 잘 살았다. 모두 널 보내기 힘들 만큼...
그래도 너 만은 정말 Rest In Peace 였으면 한다.
너와 마지막 인사 후 알바를 하러 카페로 향했다.
예의상 "How are you doing?" 이란 손님들의 질문에 예의상 "I'm good, how are you?" 라고 받아쳐야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얼음과 함께 힘차게 셰이킹해야 하는 음료의 주문이 계속될수록, 숨이찼다.
내가 뭐하는 짓인지, 제정신인지 싶어서...
이 와중에 돈이 궁해 일을 하러 왔다는게, 그 일이 웃으며 할 수 밖에 없는 서비스직이라는게 견딜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너가 떠난 후에 바로 폐인이 되거나 죽을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기 시작한 건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은 미래의 잠재적 선택지로 남아있었을 뿐.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내가 사랑할 만한 삶을 살아보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순간 부터는 너의 몫까지 살아내는 일 보다 너에게로 향하는 쪽이 더 쉬워 보였다.
너와 마시려고 내 책장에 모셔두던 그 진로이즈백 소주는 그 후로 2년동안 열리지 못했다.
내가 죽기로 결심했던, 2023년, 그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