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싫다는 말로는 부족한가요?

by Fifth Life

2023년 4월

첫 자살시도 후, 당시의 베프의 손에 이끌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원이 됐던 병원에서의 경험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미국은 정신과 응급실과 일반 응급실이 분리되어 있다. 일반 응급실에 들어가서 상황 설명을 먼저 한 후 치료가 시작되고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환자가 현재 대화 준비가 심적으로 되어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의 병원 직원들이 찾아와 끝없는 설명을 요구한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끌려갔던 나는 일단 무슨 약을 얼마나 먹었고 술은 또 얼마나 마셨으며 언제, 몇시에 그랬고 왜 그랬는지를 혼미한 정신을 붙들어가며 응급실 데스크 직원, 응급실 간호사, 레지던트 의사, 응급실 간호사, 사회복지사, 그 다음 응급실 PA (Physician Assistant), 다음엔 또 전문의...

안 그래도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어 심란한 와중에 의료인들에게 난 그저 처리해야하는 피곤한 일거리들 중 하나였나 보다. 정말 재수없게 사건 당일 현장에 있어 끝없는 심문을 받는 죄없는 용의자가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여러명에게 내가 일관성 있는 답을 내놓는지 거짓말 탐지하려는 목적인 건지...

직원 한명이 나머지 직원들과 차트를 공유하면 되는 걸 굳이 나에게 1부터 100까지 똑같은 질문을 사람만 바꿔가며 했던 이유를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반 응급실에서 정맥주사로 수액을 몸속으로 흘러보내며 심박수와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온 걸 확인한 후에는 정신과 응급실로 옮겨져 거기서 일하는 간호사로 시작해 또 똑같은 질문들의 굴레에 갇혀야 했다. 내 삶이 버거워 끝을 내려했다는 이유로 심문받고 갇혀있어야 하는, 범죄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으니,

이럴거면 시도하지 말걸

이라는 후회가 아닌,

이럴거면 좀 더 죽을 확률이 높은 방법을 택할 걸...

하는 후회만 밀려왔다.

그렇게 이틀내로 난 강제입원의 대상이 됐고 그 안에서 또 간호사로 시작해 사회복지사와 의사들의 질문 지옥을 거쳐야 했다. 응급실과의 차이가 있다면, 응급실에선 그저 필요한 정보만 얻고 대충 노트에 끄적인 후 발길을 돌리는 패턴이었다면 폐쇄병동에선 시간을 길게 잡은 면담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인데 질문의 수준들은 대체로 똑같았다.

자살시도 후 들어온 환자에게 역시나 하나같이 물고 늘어지는 질문은 왜 죽으려 했는가다.

더이상 살아갈 가치를 못 느끼는 삶이여서
I don't think life is worth living.

라고 대답했다.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더 살고 싶지 않아서 죽으려 했다는게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저 힘들게 생존만 하는 삶을 그만두려 했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스스로의 삶의 주도권을 빼앗긴, 절망과 수치심만 자리잡은 나의 심정엔 하나같이 관심이 없었고, 난 그저 단 한번도 죽을 용기조차 내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죽고싶었던 이유를 설명해줘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즉, "나라도 죽고싶었겠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해줄 서사를 내놓을 때 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날 잡아둘 기세였다.

나의 담당 전문의로부터 면담 거의 마지막에 들은 한마디는 지금도 어이없는 한숨만 나온다. 기껏 별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던 어릴 적 삶 부터 시작해서 왜 행복해질 수 있을거란 희망을 잃게 됐는지 열심히 설명해줬건만, 그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That's it?" 이었다. "겨우 그거야?" 라는 뜻이다. 심지어 대학도 괜찮은 곳에 다니는 애가 왜 그렇게 밖에 못 사냐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하기야... 좋은 머리 갖고 태어나 자기 잘난 맛에 늘 관찰자의 시선으로만 정신질환을 공부한 사람에게서 무슨 대단한 공감과 위로를 바란걸까; 허탈했다.

살던 집이 불에 타 가족이 모두 몰살하고 보이스 피싱으로 전재산 탕진과 동시에 하루아침에 실직까지 당하는 불행 콤보 정도는 돼야 자살할 자격증이 발급되는 걸까.

고통 마저도 스펙이 요구되는 이 구조는 한국만의 것은 아닌가보다.

그럼 도데체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할 이유는 왜 아무도 안 얘기해주는 걸까?


내가 모든 의사를 혐오하는 건 아니다. 분명히 내게 보이지 않는 곳에는 본인이 독하게 힘든 시간을 견디며 살아왔기에 제 2의 자신을 구하자는 사명을 가지고 정신과 의사의 길을 걷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혹은 본인이 직접 자살충동을 경험해보진 않았어도 생물의 본질인 생존본능을 거스를 만큼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해주고 싶다는 소명으로 일하는 참 의사들도 분명 있다.

응급실에 실려가기 전, 2주에 한번 날 봐주시던 의사 선생님이 그랬다.

퇴원 후 다시 만난 그에게 당신이 처방해준 약으로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입원하는 바람에 지난 2주간 예약된 진료에 오지 못 했었다는 이야기를 내 입으로 직접 전해야 했다. 너무 죄송스러워, 당신의 치료가 잘못됐거나 부족하여 죽고싶었던 건 아니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선생님은 이런 상황에 타인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고맙다 하셨다.

그러고는,

자신이 control 가능한 영역은 최대한 효과적인 치료법을 제안하는 것이지

환자를 24시간 감시하며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것을 매번 예언할 수는 없다고,

그걸 수용하는 훈련을 레지던트 기간부터 쭉 해오고 있다며 날 안심시켰다.

현재로선 치료를 스스로 포기했지만 이 의사는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였단 점은 분명하다.


치료를 포기한 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먹지 않아본 약이 없어서다.

약의 이름이 바뀌고, 용량이 바뀌고,
아침 약이 밤으로 옮겨 가고,
이런저런 부작용을 거치며 초등학생 몸무게가 되어가는 동안 돈은 돈대로 쏟아 부으며 이미 너무 오래 치료받는 사람으로만 살아왔다.

그리고 나의 문제점은 너무 명확하다.

난 나 때문에 힘들다. 자립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 무게를 감당할 힘은 없고,

평범하고 평온하게 살기 위해 죽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고,

그 노력을 견딜 체력이 길러지지 않아서.

나이만 먹었지, 어른이 되지 못해서.

이건 애초에 약과 상담으로 고쳐질 일이 아니었다.
그냥 고장이 난 상태를 수용해야 했던게 아닐까.
의학적 기준으로 정상 범위에 도달할 거란 전제 없이도,
살아갈 방법을 배워야 하는게 아닐까.
치료란 결국 완벽의 상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버틸 수 있는 상태를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버티고 싶은 삶인지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당장 망가지지 않는 하루를 유지하는 일 부터 지켜야 하는 것 같다.

그런 하루란 뭘까.

인생을 바꿀 결심보단 오늘을 파괴하지 않고 내일을 미리 삭제하지 않는 선택을 해내는 게 아닐까.

깊은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도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지는 않는 하루.

날 미워해도 아직 죽이지는 않는 하루.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살아질 만한 해이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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