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난 그 병동의 모든 스텝들이 알아보는 단골이 되어 있었다. 간호사들 대부분은 날 싫어하진 않았다. 다들 나를 easy patient라며 편하게 대했다. 당시에 바리스타로 일하던 나에게 어떤 커피를 어떻게 커스터마이즈 해야 맛있냐고 추천받아가는 이들도 있었고 인생 이야기를 하며 수다 떨어주던 이들도 있었다. 퇴원할 때마다 그 간호사들은 웃으면서
Let's not see each other again here
여기서 또 보지는 말자~
라며 인사했지만 어김없이 난 두세 달 내에 또 병동의 문을 통과했고 그럼에도 늘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Oh, hi again! I'm glad to see you again since you are the easiest patient but I'm sad that you are back in here.
안녕, 또 보네! 네가 제일 편한 환자라 또 봐서 좋긴 하지만 여기서 다시 만나는 건 속상하네.
그들은 자세한 건 묻지 않았지만 내가 돌아온 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고 있었다.
2023년 11월
죽으려는 시도가 네 번까지 이어졌던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두 번째가 마지막일 거라 믿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깨어나 세 번째로 이어졌고 그 마저 실패하여 결국 네 번째 까지 갔던 것이다. 그마저 실패했을 땐 자존심도 명예도 더 이상 챙길 여유가 없었다. 비행기 화물칸에 짐을 실을 때 깨질 위험이 있는 물건이 든 캐리어에 Fragile 스티커를 붙이 듯, 의사들은 내게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고위험 환자"라는 라벨을 쉽게 붙였다. 그렇게 투명한 벽 안에 넣어둔 물건 마냥 늘 시야에 있어야 하는 1:1 감시 대상이 됐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거나 샤워를 할 때도 간호사 한 명이 늘 관측해야 했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침대 옆에서 의자에 앉아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시선에 섬뜩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의사들은 "너무 힘들어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실수였어요"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 했지만 나에게 실수란 죽지 못해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상황이었다.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한 내가 지킬 수 있는 체면은 더 이상 없었다. 퇴원 후에는 어김없이 기다렸다는 듯 병원비 청구 메일이 도착했고 거기에 적힌 숫자를 볼 때면 이게 살라는 건가 다시 죽으라는 건가 싶었다. 그 해의 내 유일한 목표는 2023년의 끝을 맞이하기 전에 삶을 끝내는 것뿐이었다. 정신과 폐쇄병동에 여러번 입원했다는 기록은 지금까지 독하게 버텨온 삶 위에 용납될 수 없을 만큼 수치심을 심어놓고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었다. 그 낙인을 딛고 살아가기엔 내게 남은 에너지 총량이 이미 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네 번째 퇴원을 위해 또다시 살고 싶은 척 연기해야 했다. 빨리 나가야... 죽을 수 있으니 말이다.
4월, 6월, 9월, 그리고 11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죽으려는 나의 발버둥은 멈추지 않았다. 계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죽고 싶다는 나의 마음이 바뀌진 않았다. 어김없이 매번 죽음이라는 문 앞까지 숨이 차도록 힘들게 뛰어가놓고 그 문에 맞지 않는 열쇠를 들고 오는 실수를 했다. 반복된 실수가 쌓일수록 학습이 됐다.
이 정도 용량으로는 안 죽는구나...
알코올 도수가 더 높은 술을 마셔야겠구나...
가루로 부수어서 먹어야 용해 속도가 빨라지고 독성이 더 강해지겠구나...
감정은 무뎌졌고 계산만 남았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이니 마음만 먹으면 훨씬 위험한 마약을 구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고 당시 살던 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기차역이 하나 있었기에 뛰어들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다소 소극적인 방법을 고집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실패해도 영구적 장애나 후유증이 남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찻길에 뛰어들었다가 하반신 마비로 살아남은 이들의 기사를 읽은 적이 몇 번 있기에 그게 내가 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아무리 더 지킬 체면이 없다 해도 자신의 언니가 불법적으로 마약을 하다 죽었다는 낙인을 내 동생에게 심어놓고 갈 순 없었다. 내가 만나본 마약 중독자들 중 많은 이들이 부모님이나 연인, 혹은 형제들이 마약을 하다 오남용 사고로 죽은 경우였다. 그들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아 결국 자신들도 마약에 손을 대고 중독이 됐다고 했다. 나야 죽으면 그만이겠지만 앞으로 살아갈 동생에게 그런 삶을 건네주고 갈 순 없었다. 지켜주지는 못해도 열심히 가꿔온 인생을 내 손으로 망가뜨리고 도망갈 순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이 너무 아팠기에 적어도 끝은 아프지 않게 죽고 싶었다. 그냥 스르르 잠에 들어 아무도 모르게 호흡이 조용히 멈추는 방식으로... 따뜻한 물에 녹아 사라지는 눈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소 비겁하고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짧은 시간 내에 이뤄지는 과정이라 믿었으나 잠과 죽음의 사이에는 내가 계산하지 못한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이미 숨을 포기했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붙들려하고 있었다. 당시 나의 베프는 골든타임 매번 칼 같이 지키며 날 병원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몸에 경련이 오고 심정지가 와도 바로 소생되어 또 생존을 하게 됐다.
네 번째 입원 때는 의사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한번 더 시도하다 또 들어올 경우 적어도 6개월간 입원해야 하는 장기 입원 시설로 나를 보내버린다고 말이다. 들은 바로는, 그곳은 환자들을 말 그대로 짐승 취급한다고 한다. 잠도 마음대로 못 자고 가족 방문도 허용되지 않고 공중전화 사용시간에도 제약이 있을 만큼 통제적인 환경이라고. 죽는 것보다 그곳에 들어가는 게 더 두려웠다. 그래서 생존을 택했다기 보단 존엄을 지키기 위해 겨우 숨만 붙이고 가까스로 버티기 시작했다. 그게 그 의사의 작전이었다면 성공적이라 볼 수도 있겠다.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23번째 생일을 결국 맞이하게 됐고 당연히 생일이 기쁘지 않았다. 생일날 죽으면 남은 이들이 기일과 생일을 따로 지키며 1년에 두 번씩이나 슬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했지만 지난 실패들을 떠올리며 위기를 또한번 넘겼다. 촛불을 부는 대신 생에 하루를 더 연장하는 숨을 불어넣었다. 치료되지 않는 공황장애는 하루에 한 겹씩 내 세포를 갉아먹고 있었다. 뒤이어 따라온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의미가 없었다. 그저 끝을 미루며 폐인처럼 살기 시작했다.
2024년 1월
또 다른 친구가 떠났다. 나처럼 그녀도 가정폭력으로 인한 PTSD를 안고 살고 있었다. 나와의 차이가 있다면 그녀의 가해자는 아버지였다. 키가 178cm로, 평균을 훨씬 넘어선 그녀가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여 근력을 키워도 신체적으로 제압이 불가능했기에 성인이 된 후에도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처럼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했지만 아직 그 집에 남겨진 동생의 상태를 가끔은 확인하기 위해 들려야 했고 그때마다 폭력은 반복됐다. 떠나기 전, 내게 마지막 문자 한 줄을 남겼다.
I don't think there is any other way to get away from him. I'm sorry.
그에게서 벗어날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미안해.
경찰에 신고를 했을 땐 이미 늦었었다.
날 네 번씩이나 잡아주는 사람은 있었지만 난 내 친구들을 한 번도 잡아주지 못했다.
나의 2024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내가 날 미워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