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시작된 2024년은 예상대로 느리고 무겁게 흘러갔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친구 E가 떠난지 약 5개월 후 또 다른 친구 하나가 떠났다. 마약 중독자였던 부모 밑에서 자라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는 것도 모자라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어느날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한날 한시에 생을 마감해버린 부모를 발견하여 하루아침에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했다. 알코홀 중독에 잠깐 빠졌던 적도 있지만 의지와 치료로 극복한 뒤로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면서 마약에 손을 댔고 재활과 재발의 악순환에 갇혀 살다 지쳐버린 끝에 죽음으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길 택했다. 1g도 채 안되는 물질이 60kg대의 인간을 꺾어버릴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고 느끼며 이젠 그 감옥에 갇혀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조용히 평안을 빌어주기로 했다. 어느 순간 부터 나에게 죽음이란 슬픔이 아닌, 평온함에 더 가까운 해석이 됐다. 이젠 슬퍼하기도 지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3년동안, "살다보면 웃는 날이 하루 정도는 있지 않겠냐"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던 나였지만 웃는 날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어느 순간 부터 죽기 전에 끝내놓을 일들을 하나씩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커피 선반에 놓인, 아직 뜯지 않은 원두들이 눈에 들어왔다. 원두가 바닥날 때 까지는 살아있기로 했다. 그 다음에는 방에 있던 책장에 시선이 갔다. 퇴근하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읽지 않았던 책이 읽은 것들보다 더 많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들도 일단 다 읽기로 했다.
그러다 며칠 뒤, 친한 언니에게서 문자가 하나 왔다.
잘 있어? 날씨도 이제 좋아지는데 한번 놀러와. 몸만 오면 숙박이랑 식비는 다 공짜야. ㅋ
2014년도에 만나 10년째 꾸준히 연락하며 지낸 덕에 한국과 미국이라는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어져 온 정말 몇 안되는 소중한 인연이다. 통하는 것도 많고 친언니 처럼 잔소리도 많이 해주고 조건없는 조언과 응원을 건네주던 고마운 사람이다. 어쩌면 내게는 진짜 엄마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23년,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언니는 남편이 박사과정을 밟게 되면서 그와 함께 6년동안 미국에 거주하게 될거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내가 사는 곳에서 비행기로 2시간 정도의 거리로, 1년에 두번 정도는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한 거리이기에 잠시 신나기도 했지만 죽을 것 같던 현실속에선 언니를 보러가겠다 했던 약속도 기억에서 흐려졌다. 언니가 미국에 온지 벌써 1년이 지났는데 아직 한번도 시간을 내지 않았음을 그 문자 한 통에 새삼 깨달았다. 죽을 뻔 했다 깨어나길 반복하느라, 혹은 놀러갈 기분이 아니어서 라는 핑계로 계획을 계속 미루다 어느새 1년이 지나버린 것이 너무 미안했다. 해야할 일 리스트에 한 줄 더 적었다. '언니 얼굴 보고오기'.
연락을 받자마자 매니저에게 휴가신청을 보냈고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나: 2주 후로 티켓 예매 했어요! 저녁에 도착 예정이래요. 언니 오랜만에 같이 술 마셔요. ㅋㅋㅋ
언니: 그래, 알았다. ㅋㅋ 집 주소는 그날 보내줄게.
언니의 집에 도착했을 땐 언니와 언니의 남편이 반갑게 맞아주었고 정성스레 준비된 저녁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는 갑자기 기억났다는 듯 냉장고에서 소주 한병과 잔 하나를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발 밥 먹으면서 술 마셔라~
언니는 안 마셔요?
응, 너 혼자 마셔. 천천히 마셔라, 다 못 마시겠으면 남기고 냉장고에 다시 넣어놔. ^^
웬일이세요? ㅋㅋㅋ
나 좀 살 찐것 같지 않아?
어디가 쪘다는 거예요? ㅋ 다이엍 하려구여?
아니... 술 못 마셔, 당분간. ^^ 톡으로 얘기할까 하다가 그냥 얼굴 보고 전해주고 싶어서 너 엄청 기다렸어. 남자애야.
그 순간의 기분을 지금도 100%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결혼 6년차인 언니였기에 딱히 당황스러울 만한 소식은 아니었음에도 심장이 콩콩거렸고 립밤을 바르지 않아 매우 건조했던 입술이 순식간에 갈라지며 피맛이 날 만큼 오랜만에 활짝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언니와 시간을 보내는게 어쩌면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보러간 그날, 언니의 뱃속에 나의 조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죄책감보단 설렘으로 조금 더 살아있을 이유를 만들어 준 셈이다.
언니로 부터 지난 10년간 받아온 조건 없는 사랑을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 사랑을 받을 사람이 태어날 때 까지 살아있기로 했다.
그렇게 바닥난 원두를 새로 채워가며 지낸지도 벌써 1년이 넘었고 그의 첫돌도 얼마전에 지났다.
내일도 출근해야지.
울 조카 용돈 주려면...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