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방에 있는 짐들을 정리하다 내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걸 한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던 물건들을 발견했다. 얼마되지 않던 용돈으로 참 성실히 모으던 내 가수들의 앨범이 발매순으로 쌓여있었다. '요즘 애들'에게 RIIZE, NewJeans, Aespa 등이 있다면 (요즘 솔직히 누가 제일 핫한지 몰라 대충 적음; 저도 라떼라... 이해바랍니다) 라떼는 소원 들어주는 아홉명의 Genie 소녀시대와 무대에서 빛을 뿜고 팬들에게 빛을 받던 SHINee, 그리고 음악으로 우주를 터뜨리던 BIGBANG이 가요계를 장악했었다. 소녀시대와 SHINee 그 당시 내 취향을 저격했던, 내가 참 많이 사랑했던, 아니, 이직도 사랑하는 가수들인데... 지난 몇년동안 이사하느라 짐 쌀 때를 제외하고는 앨범들에 손도 안 댔다는 걸 세삼 느꼈다. 한때는 손의 기름이 묻어 더러워질까봐 조심스럽게 넘겨볼 만큼 애지중지하던 앨범들이 이젠 먼지속에 묻혀있었다. 있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건 어느 순간부터 수집을 멈췄다는 것... 가장 최근에 구매했던 앨범이 뭔가 보니 SHINee는 종현이 떠나기 전 다섯명으로서의 마지막 앨범이었던, <1 of 1> 이라는 곡이 담긴 2016년도의 앨범이었고 소녀시대의 경우, 최애 멤버 태연의 <INVU> 라는 타이틀 곡이 담긴 2022년에 발매된 앨범이었다.
2022년, 내가 죽기로 결심하기 바로 1년 전, 내 기억에 아직 살아있을만 했던 마지막 해다. 그때 까지만 해도 난 아직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INVU]는 내가 아직 음악을 즐기고 그녀의 앨범 발매 소식을 기다리고 내일을 생각하던 마지막 시기의 기록인 듯 했다. 난 2023년부터 지금까지 이미 몇번 죽은 뒤 계속 깨어나기만 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2023년 12월, 크리스마스 거의 직전이었을거다. 고등학교 친구이자 다른 주에서 인턴쉽을 하고 있던 Y가 연말에 자기 보러 놀러와달라며 전화를 했다 (나 해고 당하기 이틀 전에 자살로 떠난 그 친구다). 이 친구의 얼굴을 보기전에 네번이나 죽으려 했다는게 미안하기도 해서 망설임 없이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내가 비행기 티켓 값을 감당하니 친구는 식비를 모두 자신이 내겠다며 벌써부터 목소리에서 신나하는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하다 갑자기 친구가 말했다.
Y: 너도 알다시피 난 유애나라 (UAENA: 아이유 팬덤) 인정하기 싫지만 이번에 나온 태연 신곡 <To. X> 진짜 개좋더라! 솔직히 그거 나온 뒤로 아이유 노래보다 더 많이 들음. 완전 내 취향저격이야!
나: 아... 태연 앨범 새로 나왔구나... 나 어떻게 몰랐지? 이따가 들어봐야겠다.
Y: 헐...? 야, 미친거 아니야? 니 생일날 나왔잖아!!! 너 요즘 진짜 바쁘구나... 너가 태연 앨범 소식을 다 놓치고... 도데체 일을 얼마나 하는거냐... 작작해라 뒤지기 싫으면.
나: 그러게... 알려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너가 내 '태연 신곡 알람'이 돼줘.
이 친구가 말을 다소 터프하게 하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나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태연의 신곡 여부에 대해 몇주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이렇게 까지 충격 받을만큼 난 한때 정말 열정적인 SONE (소원: 소녀시대 팬덤) 이었다. 1989년생을 만나면 나의 첫 반응은 늘, "태연과 동갑이시네요? ㅎㅎ" 였고 2007년생을 만나면, "소녀시대 데뷔년도에 태어났구나~"일 만큼 삶이 전반적으로 덕질로 이뤄졌던 때가 있었으니까. 내 폰이나 노트북 비밀번호, 그리고 자전거 자물쇠 번호까지 그녀의 생일로 통일했으며 영어 대소문자와 숫자를 모두 사용해야 하는 회사 이메일 비밀번호를 설정할 때는 그녀의 곡들 중 하나의 제목과 발매일로 조합했을 만큼 (예: Rain_20160203).
폰 배경화면도 태연이었다. 지금은 조카로 바뀌었지만... ㅎ
늘 죽음을 염두에 두며 살아가는 나에게도 삶의 낙이라는게 한때 있었다. 지니라는게 실제로 존재해서 죽기 전에 나의 소원을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들어줄 수 있다고 한다면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을 것이다. 태연의 콘서트에서 LIVE로 노래를 감상하고 싶다고. 그게 내가 19년동안 한결같이 간직해온 소원이고 그만큼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가수다. 그러나 죽을 것 같은 현 앞에서는, 별을 쏟는 듯한 천상계 목소리도, 그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불리는 노래도, 돈 많이 벌어서 꼭 그 무대를 직관하고야 말겠다던 내 소원도 다 부질없었다. 아무것도 날 붙잡지 못했다.
죽어버린 마음이란 그런것이다. 하고싶었던 것들, 갖고싶었던 것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더이상 날 잡아줄 수 없는 상태. 나 자신에게 더이상 해주고 싶은게 없는 상태. 심폐소생술로 심장을 다시 뛰게 해도 폐가 기능을 잃어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교환하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한 것 처럼 말이다. 나는, 살아있는 구조만 유지된 채 이미 삶이 멈춰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말 힘들었던 지난 3년간 태연의 노래를 들은적이 거의 없다. 감정적으로 위태로웠던 날들엔 음악을 아예 듣지 않거나 가사가 없는 클래식 장르만 조금 들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정말 좋아하는 태연의 곡들이 힘든시간들의 배경음이 되거나 그 시간들을 상기시키는 트리거가 되게 할 수는 없어서였다. 기분이 괜찮은 날에만 최애가수의 노래를 듣다보니 새 앨범이 나와도 모를 수 밖에 없었다.
Y로부터 뒤늦게 앨범 소식을 들었던 그날도 <To. X> 를 듣지 않았었다.
2025년 9월,
최애가수들의 앨범을 추억삼아 하나씩 꺼내보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해고 당한지 얼마되지 않아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력서를 여기저기 보내며, 새 이메일이 올때마다 자동적으로 메일함을 열어보던 날, 8년 전에 만나 종종 연락하며 지냈지만, 서로 바빠지고 얼굴 볼 여유가 없어 약 4년간 연락이 끊겼던 언니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 다른 건 아니구 그냥 오늘 카페에 갔다가 우연히 태연의 <불티>를 듣게 됐는데 니 생각부터 났어. 그동안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연락도 못했네... 언니는 너 처음 만났을 때 사귀고 있던 사람과 2년 전에 결혼했어. 지금은 임신 중인데 얼마전까지 입덧으로 개고생하다 이젠 좀 살만해... ㅎㅎ
보고싶은데 한국 올 일 아직 없어?
그 메시지를 읽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언니 입장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 듯 보낸 안부였을 텐데 그 몇줄이 몇년동안 비어있던 어딘가를 조용히 건드렸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나보다 먼저 기억해주는 사람이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는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벅찼다. 좋은 관계라는 건 꼭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거리라는게 마음을 지워버리는 기준이 되진 않는다는 걸 그날에서야 다시 깨달았다. 마지막 연락이 기억 안 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먼저 연락을 해준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날, 그동안 대학 다니느라 그리고 일하느라 놀러갈 기회를 잡지 못했던 한국행을 결정했다. 가격은 보지 않았다.
얼마나 드는지, 이게 지금 현실적으로 맞는 선택인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게 마지막 한국행이 될 수도 있으니까.
통장이 텅장이 되고, 끝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되면 그때 가서 죽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린다고 여러명에게 연락을 돌리니 출산 직후라 힘든 몇몇을 제외하는 모두 내게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식비는 내 돈으로 거의 쓴 적이 없다. 다들 멀리서 왔다고 고생했다며 밥을 사줬다. 내가 왔다고 하면 언제든 만나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게 미안했다.
힐링 제대로 하고 4주뒤 귀국 후, 다시 여기저기 이력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전, 3월 9일, 태연의 37번째 생일 날, 신기하게도 저 언니의 아기가 태어나, 내게 조카가 하나 더 생겼다.
절대 잊을 수 없을 연락을 해온 언니의 아기가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짜에 맞춰 태어났다.
TMI: 소녀시대 응원봉은 고장나서 건전지를 넣어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