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번 꼭 감았다 뜨면 1년이 지나 있었으면…’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종종 있다.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할 만큼 막막한 상황이거나,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한 고생길을 앞두고 있을 때. 시간을 달리는 마차에 올라 타는 상상을 하며 눈을 꼭 감았지만, 눈 뜨고 난 후 나는 꼭 같은 마음으로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현실이라면 절대 올 일이 없는 마차가 어김없이 내 앞에 멈춰 서는 날이 있다. 사실, 그건 날이 아니라 한 순간이다. 12월 31일 23시 59분. 좀 더 쪼갠다면 더 짧은 찰나겠지만, 휴대폰으로만 시계를 보는 내게는 1분이 가장 짧은 순간이다. 롤러코스터 맨 꼭대기에 정지해 있는 기분. 가득 찬 채로 멈춰 있던 숫자는 어느 순간 흘러 넘쳐 0이 된다. 0시 00분. 쌓여 있던 모든 시간이 일제히 사라진다. 0과 0과 0. 완전히 새로운 무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 순간이 사실, 나는 좀 두렵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조급해진다. 이 순간을 어떻게 지나야 할까, 또다시 찾아오는 백지 같은 시간은 또 어떻게 맞이해야 하지? 조금은 부드럽게 넘길 만한 방법을 찾는다. 한 잔의 시간이 가득 차서 기울고, 완전히 투명하고 새로운 잔이 내 앞에 주어지지만 그걸 삼키는 나는 그렇게 새롭지 않은 까닭이다. 여전히 상흔이 가득한 채로.
웃음 없는 얼굴로 애써 감추지만, 사실 내 피부는 얇아서 아주 작은 일상의 부딪힘에도 쉽게 베인다. 몸은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일상의 상처를 기억한다. 세상과 맞닿기 두려워 한껏 움츠러든 채로 0이라는 숫자를 맞이하는 일. 그 일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시간을 달리는 마차 같은 건 없다고, 그냥 평소랑 똑같은 1분 1초 하루가 흘러가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너무 갑자기 경건해지거나 달라질 필요는 없다고. 1분 만에 한 살 더 먹어버릴 내게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분주하게 한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의 시간을 한 숟갈 푹 떠서 긁어 먹는다.
새해의 종소리를 들으러 보신각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연인과 부둥켜 안고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얼굴도 모르던 사람들과 환호를 나누던 날들. 환희에 가득 차서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고, 인파에 둘러싸여 늦은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눕던 날들. 그 모든 것이 언젠가부터는 벅차게 느껴졌다. 몇 해 전부터는 카운트다운을 셀 때쯤 스윽 화장실이나 부엌으로 들어가 자리를 피해버린다.
올해는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침 1월 2일 오전까지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있었고, 12월 초에 받은 일을 미루고 미루다 연말이 되어서야 손에 잡았다. 생각보다 일은 간단치 않았고, 코앞으로 다가온 마감일을 목구멍에 걸고 일을 했다. 1월 1일엔 아이와 본가에 가기로 했으니, 남은 날은 사실상 하루뿐. 고개를 푹 숙인 채 글 속으로 들어갔다. 잠든 아이 옆엔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간 남편이 있었다.
“그거 알아? 4분 지났어.”
“응?”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새해였다. 올해의 시간마차는 4분이나 빠르게 달려, 좀 더 먼 곳에 나를 내려주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 도착한 여행자마냥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둘러봤다. 시간만 새 것이었을뿐 주위의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았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거실 달력엔 트리 옆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있었다. 12월 29일, 30일, 31일. 사진 아래 꽉 찬 숫자들을 보니 배가 부른 기분이 들었다. 1월 1일. 앙상한 뼈대처럼 마른 숫자를 아직은 마주하고 싶지 않아, 올해의 달력은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갑자기 건너 온 시간이 익숙해지면 슬쩍 꺼내볼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도 조금씩 닳아지는 때가 오면 그리워하겠지. 냉큼 나를 싣고 달려 시간을 건너줄 마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