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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Jan 10. 2023

자아 부기 빼기

연말에는 약속이 많아진다. 가까스로 지켜 온 한 줌의 사람들을 12월 한 달에 모두 만나는 듯하다. 1년에 한 번 만나는 친구들도, 10년 넘게 못 만났던 인연도 어색하게 만나 인사를 나눈다. 셋째 주 주말엔 본가 식구들과, 마지막 주 주말엔 시댁 식구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대화는 피할 수 없다. 가벼운 안부부터 요즘 하는 일, 반려동물과 아이들의 소식을 전한다. 사람들이 내게 자주 하는 말도 정해져 있다.  

 

남편이 자리 잡았으니 편하겠네


올해 동거인이 취업을 하면서 새롭게 듣게 된 말이다. 처음에는 나도 덩달아 뿌듯했지만, 왠지 모르게 뒷맛이 씁쓸해지는 말. 남편이 취업을 했는데 내가 왜 편하지? 그가 무엇을 하든 나는 똑같이 일이 절실하고, 각자의 생활비는 각자가 부담하는데… 이 모든 걸 설명하기가 벅차다. 하나하나 설명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질 것 같다. 그래서 농담을 섞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훨씬 더 잘될 거예요." 

3초 정적. 다음엔 웃음이 터진다. "당연하지. 네가 더 잘 돼야지. 더 잘될 거야." 

그럼그럼. 나는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꾸준히 일했고, 내년엔 더 잘할 것이다.   


지금도 일…하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눈치를 보며 물어 오는 말. 이 말은 가장 순한맛이다. 마라맛으로는 "회사 안 다니면 먹고 노는 거 아냐?"라는 이모의 말이 있다. "딸, 엄마가 어디 가서 너를 뭐라고 말해야 돼?"라는 엄마의 질문부터 "일락이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거야? 목표는 뭐고?"라는 호기심 가득한 아버님의 질문까지. 포장은 다르지만 결국 뿌리는 같다. 회사도 안 다니고 월급도 안 받는 너는 도대체 무슨 수로 먹고 사니?(앞으론 어떻게 먹고 살래?) 

"글도 쓰고, 인터뷰도 하고, 편집도 하고, 기획도 하고, 교정교열도 하고"라고 대답하기 시작하면 나조차 어지럽다. 같이 일하는 회사의 이름을 더듬거리며 열거하면 열거할수록 내가 비루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요즘엔 그냥 이렇게 대답한다. 

"돈 되는 일은 다 해요." 

그제서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돈 되는 건 뭐든 해야지." 

가장 사실에 근접한 답변이라 아주 만족하고 있다.  


회사는 언제 다시 갈 거야? 아이는?

결이 굉장히 다른 질문이지만, 놀랍게도 두 질문은 마치 한 문장처럼 이어져 나온다. 30대 중반의 여자에게 커리어와 출산은 절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원래 제일 난감한 질문이었는데,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에게도 출산 계획이라는 게 생겼으니까(결혼하고 제일 좋은 점이 뭐냐는 내 말에, 결혼 언제 하냐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라던 친구가 생각난다). 

"일단 나이가 있으니까 임신부터 준비해보고, 그 다음은 차차 생각하려고요." 

일단 회사부터 가서 육아휴직을 하는 게 어떠냐는 사람들에겐 나의 다낭성난소증후군 연대기를 구구절절 들려준다. 나는 정말 가끔만 생리를 하며, 고3때는 1년을 통째로 생리를 건너 뛰기도 했다고.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배란초음파를 보고 있다고. 

1센치 넘게 자라지 않는 나의 난포들 이야기에 이르면, 따스한 위로가 이어진다. 

"내년엔 꼭 아기천사가 찾아올 거야." 

이렇게 회사 질문을 어물쩍 넘겼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계속해서 내가 뱉은 말들이 반복재생된다. 내가 나의 청자가 되어 내 말을 곱씹고, 지적한다. 도저히 못 견디겠는 부분에 이르면 아프도록 아랫 입술을 꼭 깨문다. 집에 와서도 내 말은 메아리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이 때부터는 머릿속으로 그 장소로 돌아가 다른 말을 한다. 대부분은 이런 서두로 시작되는 말이다. 

"제가 사실은…"

해명이자 자기 변명을 늘어놓고 있으면 잠도 안 온다. 평소에는 내 방만큼만 커져 있던 자아가 애드벌룬처럼 불어나 밤하늘에 나부낀다. 


잔뜩 팽팽해진 자아를 부여잡고 맞이한 새해. 새해에는 약속이 거의 없다. 세수도 안 하고 조용히 거실 바닥에 누워 부기를 뺀다. 바람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으면 스르륵. 말들이 빠져나간다. 빠져나간 사이로 새로운 숨을 쉰다. 시원ㅡ하게 날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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