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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오 Oct 12. 2021

이토록 아름다운 혐오를 위하여

02 네 사람

 한 인간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이 온전히 마침표로 끝날 확률은 극히 낮다. 끝없는 의문을 갖고 물음표로 남거나,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해 잠시 쉼표가 찍힐 때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어느 날엔 느낌표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다. 지금 그의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운 수신자 불명의 메일처럼 말이다. 그는 옆에 있던 '하이네켄' 로고가 프린팅 된 맥주를 비워내며 메일을 음미했다. 메일의 문장 한 줄, 글자 한 개를 탐닉할 때마다 방의 천장 모서리 끝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맥주캔을 구기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장을 보냈다. 어떤 미사여구도 첨가되지 않은, 그들이 원하는 한 줄의 문장이 전송되자 곧바로 새로운 메일이 열렸다. 그 안에는 큼지막한 QR코드가 있었다.  

 

 '자유로 0번 길 00-00(2층), PM 3:00'

 

 그가 스캔한 코드 안에는 주소와 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날짜조차 적히지 않은 화면은 아무리 새로고침해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앞머리를 양 손으로 쓸어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머리카락이 한 올씩 만져질 때마다 메일의 신빙성을 의심했다. '내가 누군가의 놀림감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어떤 것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조용한 방에서 서성이다 한숨을 내쉬며 결론을 내렸다. 내일 그곳으로 가서 확인하는 것으로. 설령 이것이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즐겨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핸드폰 화면 상단의 시간을 봤다. 새벽 1시 40분, 오후 3시까지 시간은 지저분할 만큼 많이 남아 있었다. 그는 책상 옆에 있던 500ml 생수를 전부 비워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래된 회색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눌리는 소리가 새벽의 빈틈을 채우고 있었다.


 주소에 써진 건물은 짙은 회색의 낡은 시멘트로 칠해져 있었다. 1층 통유리 사이로 오래전에 폐업한 듯한 가게의 잔재들이 보였다. 통유리마다 붙여진 임대라 써진 플래카드는 이미 빛이 바래 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옆의 유리문을 열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녹이 슬고 있는 남색 철문이 열려있었고, 모서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체크무늬 시트지가 붙은 유리문은 닫혀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유리문을 밀었다. 문 상단 오른쪽에 있던 황색 종이 익숙한 소리를 내었다.


 "누구세요?" 안경을 쓴 남자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남자의 머리는 전체적으로 검었지만, 중간중간 흰머리가 있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남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 안녕하세요. 메일 받고 왔습니다." 그는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가 어깨에 메고 있던 검은 가방 역시 앞으로 쏠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남자는 문 앞에 서있는 그의 앞에 다가왔다. 키가 작아 양복바지 밑단이 구겨져 있었고, 남색 줄무늬가 들어간 흰색 카라 티셔츠는 사이즈가 맞지 않은 듯 타이트했다. 남자는 전체적으로 매우 평범한 중년의 모습이었다.


 "이름이?" 남자가 물었다.

 "한석구입니다."

 "아, 석구 씨! 반가워요. 저는 박 선생입니다."

 

 남자는 눈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입가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석구는 고개를 반쯤 숙이며 박 선생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박 선생의 손은 주름진 것을 제외하면 매우 부드러웠다. 눈을 가리고 만졌다면, 중년 여성의 손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저기 의자에 앉아서 얘기를 좀 하죠." 박 선생은 반대쪽 손으로 나무 테이블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박 선생은 가죽으로 된 철제 의자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네, 메일 내용이 흥미로워서 잠에 들 수가 없더군요." 석구 역시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어딘가 어긋난 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요? 왜 저를 부르신 거죠? 날짜는 어째서 안 써져 있던 거죠?" 석구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했다.

 "허허, 적극적이시네. 좋아요. 바로 설명을 해드리죠. 이곳은 '후원비'를 받아 운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운동을 기획할 때도 있고, 하러 갈 때도 있는데 요즘은 직접 하러 가는 경우가 많아요. '운동'이나 '운동가'가 뭔지는 메일에서 충분히 설명받았을 테니 넘어갈게요. 석구 씨가 아셔야 하는 건, 본래 지원한 곳보다 이곳이 훨씬 더 직접적인 단체라는 거 정도예요. 당신을 그분이 왜 이곳으로 불렀는지, 날짜는 왜 기입하지 않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

 "그... 분?"

 "석구 씨한테 메일 보낸 면접관이요. 제가 아니거든요. 저도 후원을 통해 활동비를 받으며 일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렇군요..." 석구는 말 끝을 흐렸다.

 

 그때, 종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피부에 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였다. 아무렇게나 묶은 듯 잔머리가 삐져나온 머리와 달리 깔끔한 검은색 양복 상하의가 대비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아 오셨어요? 인사해요. 이쪽은 오늘 새로 온 석구 씨." 박 선생은 특유의 미소로 여자에게 그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한석구입니다." 석구는 박 선생처럼 앉은 채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네, 윤 양이라고 부르세요." 그녀는 무심하게 인사를 받고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박 선생의 자리 왼 편의 녹색 파티션으로 가려진 자리였다.


 "윤 양, 석구 씨에게 카드 좀 주세요." 박 선생이 윤 양이 들어간 파티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여기 가져가세요." 녹색 파티션 위로 가녀린 팔이 올라왔다. 석구는 마른 나뭇가지에서 잎을 떼어내듯 카드를 가져갔다. IC칩도 은행도 쓰여있지 않은 초록색 카드였다. "활동비가 들어있는 카드예요. 내일부터 운동하실 때는 그 카드를 쓰셔야 할 거예요." 그가 카드를 앞 뒤로 살펴보는 것을 관찰하던 박 선생이 말했다.


 "저는 아직 하겠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요."

 "허허. 이미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으면서. 솔직하지 못하시네."


 박 선생의 말이 옳았다. 석구는 이미 설명을 들으면서 자신의 연청바지 주머니 안 깊숙이 카드를 넣었다. 박 선생은 그에게 내일 나오라는 말을 하며 오늘은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낡은 유리문의 종을 울리며 밖으로 나간 석구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 듯 흥분이 가득했다. 이제는 이 상황이 누군가의 장난이어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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