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그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이런 말을 했다. "국가는 그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얼마 전, 임은정 지검장이 백해룡 경정의 수사를 비판했다. "지탄받던 검찰 특수수사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진술을 다듬고, 혐의에 맞춰 서류를 꾸미고, 불리한 자료는 빼는 방식이 검찰이든 경찰이든 같다는 이야기였다.
임은정이 누구인가. 보수 정권 시절, 검찰 내부의 치부를 들춰낸 사람이다. 좌파 진영에서 "정의로운 검사"로 불렸다. 진영의 논리대로라면 이 사람은 '우리 편'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우리 편'이 지금, 좌파가 영웅으로 세운 경찰관의 수사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바뀐 것은 임은정이 아니다. 바뀐 것은 칼날이 향하는 방향뿐이다. 칼날이 상대를 향하면 정의이고, 우리 편을 향하면 배신이 되는 세계. 원칙이 진영보다 앞서는 순간, 그 사람은 양쪽 모두에게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한 가지 더 지켜볼 것이 있다.
임은정 같은 사람이 양쪽에서 고립되면, 정권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된다. "봐라, 임은정 같은 사람조차 검찰에서 저렇게 나온다. 검찰이라는 조직 자체가 문제다." 이 논리 위에서 검찰 해체는 탄력을 받는다.
실제로 올해 10월이면 78년 역사의 검찰청이 간판을 내린다. 검찰은 기소만 담당하는 조직으로 쪼그라들고, 수사권은 경찰과 새로 만들어지는 기관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하나만 물어보자. 경찰이 검찰보다 정의로운가?
경찰은 행정부 직속이다. 인사권이 정권에 있다. 검찰이 그나마 정권과 대립할 수 있었던 것은, 기소권이라는 독립적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기를 해체하고 수사권을 정권의 품 안에 두면, 견제는 사라지고 순종만 남는다.
수사권 조정 이후, 보이스피싱이나 전세 사기 같은 민생 사건의 처리 기간은 길어졌다. 감사원도 이를 지적한 바 있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견제 장치가 사라질 때, 그 빈자리의 비용을 치르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제, 법왜곡죄라는 것이 등장했다.
판사나 검사가 법을 고의로 왜곡하면 처벌하겠다는 법이다. 취지만 보면 나쁘지 않다. 권력을 남용하는 사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찬성할수 없다.
독일에도 같은 법이 있다. 형법 339조, 법왜곡죄. 그러나 독일에서 이 법이 실제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적용 요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단순한 오판이 아니라, "법과 정의에 정면으로 위반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입증되어야만 죄가 성립된다. 판사가 소신 있는 판결 대신 처벌의 공포 때문에 펜을 굴리게 되면, 그것은 법치가 아니라 통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떤가. 최대 징역 10년. 게다가 "고의적 왜곡"의 기준조차 모호하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고소할 수 있는 구조가 열린다. 그리고 더 기묘한 풍경은 여기서 시작된다. 현재 최고권력자의 재판은 헌법상 불소추 특권이라는 거대한 성벽 뒤에 멈춰 서 있다. 심판의 시계는 멈췄는데, 그 심판자를 처벌하겠다는 법안은 빛의 속도로 통과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장의 유죄 판결을 막는 것이 '방패'라면, 법왜곡죄는 언젠가 다시 열릴 재판에서 판사의 펜대를 꺾어버리겠다는 '창'이다. 재판이 멈춰 있는 동안 사법부의 기를 꺾어놓아야, 성벽이 사라진 뒤의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법의 목적지는 정의가 아니라, 권력자의 '영구적 면책'이다.
대법원이 이례적으로 반발했다. "사법부 독립을 약화시키고, 권력이 사법부를 장악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이 있다"고 공식 의견을 냈다. 사법부의 최고 기관이 입법부를 향해 이 정도의 경고를 보내는 일은 흔치 않다.
정리해 보자.
검찰의 수사권을 빼앗았다. 검찰청을 해체한다. 그리고 이제 판검사를 법으로 처벌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각각의 명분이 있다. 검찰 개혁, 수사권 조정, 사법부 견제. 그러나 이 세 가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놓고 보면, 보이는 것은 명분이 아니라 방향이다.
사법부의 독립적 권한이 하나씩 제거되고 있다. 그 빈자리를 정권의 직접 영향력 아래 있는 기관이 채우고 있다.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고립되고, 고립된 사람은 해체의 명분으로 활용된다.
이것을 개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것을 연성독재의 전주곡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버드의 스티븐 레비츠키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이렇게 썼다. 현대의 독재는 탱크로 오지 않는다. 법과 절차를 통해 온다. 선거로 뽑힌 지도자가, 민주적 절차를 밟아, 견제 장치를 하나씩 제거한다. 그리고 연성독재 권력은 그 과정을 '개혁'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글에서 어떤 정당이 옳고 어떤 정당이 그르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한 가지만 묻고 싶다. 검찰이 정치적이라서 문제였다면, 경찰이 정치적이지 않을 거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판검사가 법을 왜곡해서 문제였다면, 그 왜곡을 판단하는 권한이 정치권력에 돌아갔을 때 더 공정해질 거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견제 장치란, 내 편이 권력을 잡았을 때도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편이니까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다음 정권이 같은 도구를 우리에게 겨눌 때 막을 방법이 없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국가는 그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이 문장이 당연하게 들리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수준의 정부를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어울리는 정부는, 결국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이 연성독재의 서막이다.
이 칼날이 당신이 지지하지 않는 이의 손에 쥐어졌을 때도 당신은 이 법에 찬성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