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단 하루 제주도에서 보낸 특별한 밤
제주도로 향하는 길
2017년 3월 초, 제주도로 향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제주들불축제. 무려 3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제주의 불타는 밤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2년 전엔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가지 못 했고, 1년 전엔 주말 내내 비가 온다는 기상예보를 보고 비행기를 취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2016년 제주들불축제가 비바람에 의해 불도 제대로 붙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 년을 더 기다린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새별오름이 불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항공권을 예매하고 기상예보를 수시로 확인한 후 김포공항에 도착한 순간, 아직 보지도 않은 새별오름의 장관이 눈 앞에 펼쳐진 듯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
낮에 비행기를 타는 걸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아침 일찍 혹은 저녁에 여행지에 도착해 여행지의 분위기를 최대한 만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들불축제 개막식이 오후 6시 정도에 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후 3시 정도에 비행기에 탔다. 그동안의 내 편견을 날려준 건 김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본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서울과 인접한 지역이면서도 논밭을 품고 있는 김포, 아파트로 뒤덮인 수도권의 대도시, 금강을 따라 펼쳐진 충청도의 아기자기한 마을들, 전라도 앞바다를 수놓은 아름다운 섬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한국의 경치를 짧은 시간에 감상하려면 김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제격인 듯 보였다.
제주도에 할 것도 많은데 축제를?
사실 제주도는 축제 하나만 보기엔 너무도 아까운 곳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국내여행 1순위로 꼽는 곳이 제주도이며, 한국에서 유일하게 세계자연유산 (한라산, 성산일출봉, 만장굴)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제주이다. 다양한 볼거리뿐 아니라 제주도 곳곳에 있는 수많은 맛집들은 맛집 투어를 선호하는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들불축제만 오매불망 기다린 이유는 그동안 1년에 꼭 일주일은 제주도에 체류하면서 제주도의 다양한 곳을 들리고 제주의 토종음식들을 충분히 맛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급격히 변해가는 제주도의 모습을 보기가 두렵기도 했고.
일단 스쿠터부터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자동차 대신 스쿠터를 빌리기로 했다. 제주도에서 스쿠터를 운전하는 건 유쾌한 경험이다. 공기가 맑아 매연을 마실 염려도 없고, 길이 잘 닦여 있어 속도감을 느끼기에도 좋다. 무엇보다 좋은 건 맘에 드는 풍경을 만났을 때 잠시 멈춰 서서 쉬어가기 좋다는 점! 이 모든 사항은 4월부터 10월까지 유효하다는 걸 기억하자. 3월 초는 스쿠터를 타고 운전하기엔 너무도 추웠다. 기온은 봐줄 만했지만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오들오들 떨면서 스쿠터를 탔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는지 스쿠터 빌리러 오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고, 바이크웨이의 주인아주머니도 내가 안쓰러웠는지 방한 마스크를 하나 주셨다.
제주들불축제
제주들불축제는 눈요기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축제가 아니다. 제주가 관광지로 유명세를 얻기 전, 제주도민들은 수많은 오름이나 중산간 지역에서 소나 말을 방목하면서 살아왔다. 해묵은 풀들을 없애고, 해충을 구제하기 위해 마을별로 돌아가면서 불을 놓은 것이 제주들불축제의 유래다. 정월대보름에 대한민국 곳곳에서 달집 태우기 행사가 열리지만, 어떤 행사도 제주들불축제만큼의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진 못 한다. 제주도를 자기 집처럼 들락날락한 사람들도 들불축제를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봄을 맞이하며 새별오름이 불타는 모습을 감상한다면 그동안 상상하지도 못 했던 제주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달집 태우기
정월대보름 (음력 1월 15일)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달집 태우기나 쥐불놀이 같은 행사가 열린다. 음력 새해의 첫 보름날로 농경사회가 중심이었던 한국에선 한 해 농사의 풍요와 안정을 기원하는 중요한 하루였다. 이러한 전통 대문인지 달집 태우기는 정월대보름 대한민국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행사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볼 수 있다.) 제주들불축제도 한국의 전통을 따라 정월대보름에 오름에 불을 놓았지만, 기상악화로 인해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 경우가 많아 2013년부터 3월 첫째 주 주말로 시기를 고정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금요일에 새별오름에 방문하면 각종 귀빈과 수많은 외국인들이 횃불을 들고 성화에 불을 올리고 달집을 태우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새별오름이 불타는 것만큼의 장관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소원을 적은 부적들이 달집과 함께 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소중한 전통과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 토요일
새별오름이 불타는 모습을 보기위해 대낮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으며, 수많은 행사들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 중 하나가 몽골 사람들이 펼치는 마상무예공연이다. 기마민족의 후예답게 몽골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말타는 연습을 한다고 하는데 과연 말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달리고 있는 말 위에서 3층으로 인간 탑쌓기를 보여주는 등 온갖 묘기를 펼치는 그들을 보며 사람들은 탄성을 내뱉는다.
토요일 오후 3시가 되기 전까진 눈 앞에 보이는 새별오름에 오를 수 있었다. 높이는 무려 519.3m나 되지만 행사장과 정상의 높이 차이는 119m에 불과하다. 생각보다 낮다고 정상을 쉽게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경사가 가파르고 계단이 없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30분을 채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헉헉거리며 휴식을 취한다. 새별오름 정상에 오르면 힘겨움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가 알던 제주도의 친근한 모습이 펼쳐진다. 논밭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오름들과 오름 너머로 보이는 바다, 들판 한가운데 세워진 제주사람들의 묘지. 새별오름에서 본 제주는 그동안 봐왔던 제주의 역사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 3시가 되면 새별오름 입산을 통제하며, 행사장에서 제주도의 문화를 보여주는 전통공연이 열린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온 제주도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공연이 끝나면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의 공연이 펼쳐진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자기 나라의 문화를 아낌없이 보여주는 공연은 새별오름에 일찍 방문해서 볼만할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면 들불축제가 잘 되길 바라는 제사가 열리고, 주제공연이 펼쳐지게 된다. 주제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제주에 거주하시는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작년엔 비가 너무 와서 이런 광경을 보지 못 했지만 올 해는 화려하게 불타는 모습을 볼 수 있겠다며 기뻐하셨다. 내가 작년에 일기예보를 보고 일정을 취소하고 올해 다시 도전해서 왔다고 하니,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껄껄 웃으신다. 주제공연이 끝나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행진하기 시작했다. 행사장 주변은 너무 가까워 오름 전체가 불타는 모습을 감상하기 힘드므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새별오름 맞은편 언덕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름 앞에 멈춰서서 불을 놓는 순간, 식별조차 어려웠던 새별오름이 대낮처럼 밝아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이 날만을 기다린 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아래쪽부터 붙은 불은 점점 위로 향하면서 새별오름 전체를 덮기 시작했다. '제주들불축제'라는 글이 보이는 것도 잠시, 새별오름 전체가 불로 타오르면서 연기를 내뿜는다. 거대한 오름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새해가 된 지 이미 두 달이 지났지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올해 소원을 다시 빌 수 있었다.
새별오름의 불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면, 행사장에서 엔딩 공연이 열리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즐기는 시간이 주어진다. 불타는 새별오름 앞에서 보낸 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전 세계 단 한 곳,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엄청난 광경. 1년 365일 중 하루도 아닌 15분 만에 화려하게 타올랐다 꺼지는 새별오름의 들불. 3년을 기다린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멋진 시간이었다.
불이 꺼진 뒤
축제의 마지막 날은 불에 그을려 검게 탄 새별오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별한 행사는 없으며 제주도민들이 자신들이 그동안 숨겨왔던 끼를 발휘하는 시간이다. 전날의 화려한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인지, 저녁에 다시 한번 달집 태우기가 열리며 들불축제의 막이 내린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 & 제주 현대미술관
새별오름이 제주시나 서귀포시에서 멀리 떨어진 애월읍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축제가 열리는 당일 아침은 제주 서부(애월읍, 한경면)를 탐방해 보기로 했다. 한경면의 저지문화예술인마을과 제주 현대미술관은 새별오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 현대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상주하고 있는 마을이라 파주 헤이리와 비슷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헤이리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휴전선과 가까운 헤이리에선 북한과 맞대고 있다는 긴장감 속에서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저지에서는 훨씬 평화로운 분위기 속의 예술가들의 한가로운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헤이리에 있는 미술관만큼 뛰어난 미술관을 찾기는 힘들지만, 마을 곳곳에 펼쳐진 이상한 작품들이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진정 미술을 사랑하는 애호가라면 제주 현대미술관이나 김창열 도립미술관에 방문할 만하다. 제주도까지 와서 미술관에 들리려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한가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방림원
저지문화예술마을 바로 앞엔 세계 곳곳의 야생화들을 볼 수 있는 방림원이 있다. 꽃이나 나무가 주제인 곳이 대부분 그렇듯이, 방림원도 늦은 가을부터 초봄까진 특별히 볼 것이 없다. 방림원을 거닐면서 방림원의 원장인 방한숙 여사님을 뵐 수 있었는데, 조금만 더 늦게 오면 다양하게 핀 꽃들을 볼 수 있을 거라며 아쉬워하셨다. 제주 곳곳엔 방림원과 비슷하게 꾸며진 곳들이 많다. 생각하는 정원, 여미지식물원 등 나무나 꽃들을 아름답게 보살피며 남은 여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곳들과 마찬가지로 방림원 또한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양가형제
한경면 청수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양가형제'를 찾다 보면, "아니 대체 어디에 식당이 있다는 거지..." 하고 당황하기 십상이다. '양가형제'라는 간판보다 '청수리 평화동 회관'이라는 간판이 훨씬 더 눈에 띄기 때문이다.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눴을 그곳은 수제버거를 만드는 곳으로 탈바꿈하여 다시 북적이고 있었다. 제주도의 대표적 성씨인 고, 부, 양 중 하나인 양씨 형제들이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수제버거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외딴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수제버거를 찾는 맛집이지만, 양에 비해 비싼 가격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수제버거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꼭 한 번 들러볼 만한 곳이기도 하다.
새별오름이 불타는 일 년 중 단 하루
무려 3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볼 수 있었던 제주도의 불타는 밤! 제주 여행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엄청난 광경을 봤다는 흥분에 휩싸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곳곳의 아름다운 곳을 소개해 줄 수 있지만, 그중 가장 추천해 주고 싶은 곳 중 하나가 3월 첫째 주 토요일의 제주 새별오름이다. 합법적으로(?) 불장난을 즐길 수 있는 단 하루 (그것도 스케일이 엄청 큰), 새별오름에서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은 어떨지...?
제주들불축제
일정: 2018.3.1(목)~2018.3.4(일)
홈페이지: http://www.buriburi.go.kr/
셔틀버스 제공 (홈페이지에서 확인)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전화번호: 064-773-1948
입장료: 무료
제주현대미술관
전화번호: 064-710-7801
홈페이지: jejumuseum.co.kr
입장료: ₩7,000
영업시간: 9am-6pm Mar-Oct, to 5pm Nov-Feb Thu-Tue
방림원
전화번호: 064-773-0090
홈페이지: banglimwon.com
입장료: ₩7,000
영업시간: 8.30am-5pm
양가형제
전화번호: 010-9338-7734
영업시간: 11am~7.30pm Fri-Wed
메뉴: 경버거 ₩11,000, 석버거 ₩8,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