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의 박물관에서 즐기는 역사와 문화 탐방
수도권으로 이사 오면서 내가 받는 가장 큰 혜택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다른 나라들의 국립박물관을 둘러보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보다 뛰어난 박물관을 보지를 못 했다. (물론 소장품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아닌 관람객을 위한 편의성 측면에서. 그렇다고 한국의 유물이 절대 다른 나라 유물보다 못하다는 건 아니다.) 대만의 고궁박물관과 중국의 상하이박물관이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인 중국의 엄청난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건물 자체만 보면 국립중앙박물관에 비교할 바 못 되고 관람객에 대한 배려 또한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외국인들도 서울에서 전쟁박물관과 더불어 가장 먼저 찾는 박물관 중 하나지만, 아이러니하게 상설전은 관람료가 무료이다!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로 관람료 무료 정책을 고수하고 있지만, 외국 박물관을 보면서 돈을 쓰는 데 우리나라 최고의 박물관을 보면서 한 푼도 쓰지 않는 건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적은 돈이지만 관람료를 책정하여 문화재 유지보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하고, 우리나라 문화재의 소중함을 입장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 어린이들이 문화재를 보는 태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은 한 번 둘러보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든다. 그만큼 규모가 엄청나기에 대학생 때 하루 전부를 투자해서 상설전 전체를 다 보았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엔 상설전 외에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특별전이 있기에 관심 있는 전시가 개최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서 다시 찾곤 한다. 2017년 여름에 열린 특별전은 <아라비아의 길 -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와 문화>, <프랑스 근현대 복식, 단추로 풀다>, 테마전 <고성 옥천사 괘불>, <선인들의 마음, 보물이 되다>이다. 아쉽게 <선인들의 마음, 보물이 되다>는 7월 9일에 전시가 종료되었지만, 나머지 특별전들은 8월 중순까지 볼 수 있으니 꼭 한 번 방문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프랑스의 아름다운 문화를 체험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관람 시간: 10:00~18:00 월, 화, 목, 금, 10:00~21:00 수, 토, 10:00~19:00 일
입장료: 성인 6,000원, 중고생 5,000원, 초등학생 4,000원
패키지 (아라비아 전시 + 프랑스 전시): 성인 11,000원, 중고생 10,000원, 초등학생 9,000원
사우디아라비아는 전 세계 잘 사는 나라 중에서 가장 폐쇄적인 환경을 유지하는 국가일 것이다.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해 있으나, 이슬람교인을 제외한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기 때문에 4대 종교의 발상지에 들러보고 싶은 사람들도 원칙적으로 방문이 불가능하다. 또한 사우디는 여성의 인권 무덤으로도 불리는데, 사우디 여성들은 히잡이나 차도르를 통해 얼굴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들을 가려야 하며 (성범죄의 대부분을 남자가 일으킨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정말 어이없는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운전은 금지되어 있고, 2016년에야 난생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음주도 철저히 금하고 있기 때문에 사우디에 일하러 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정말 재미없는 나라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사우디가 이런 독특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아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특별전으로 열리는 <아라비아의 길>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내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 멋진 전시로,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을 통해 사우디 아라비아에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모습과 이슬람교가 국교가 된 이후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었다. 전시는 1부 <아라비아의 선사시대>, 2부 <오아시스에 핀 문명>, 3부 <사막 위의 고대 도시>, 4부 <메카와 메디나로 가는 길>, 5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탄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고대문화는 우리나라의 것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 많았고, 그 수준 또한 뛰어났다.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사람 모양의 석상들은 기원전 4000년~3000년경에 제작된 것들로, 당시 허리띠에 칼을 차고 화살을 들고 다녔던 아라비아인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아라비아의 여성상을 보면 당시 풍만했던 모습의 여성들을 선호했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다.
세계 4대 문명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아라비아 반도에도 뛰어난 기술과 문화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아래 항아리들은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문양과 채색으로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도시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울라지역에 형성되었던 고대 도시 국가인 '데단'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고대 울라의 유적에서는 이슬람교가 시작되기 전의 고대 신들을 섬기던 라흐얀 사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원에서 나온 남성상과 머리 등을 통해 신을 표현하는데 자유로웠던 당시의 분위기를 유추할 수 있다.
까르얏 알파우라는 고대 도시국가도 형성되었는데, 이 도시에서 나온 유물들은 메소포타미아보단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듯했다. 기원전 3세기~3세기 사이에 존재했던 도시 국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솜씨로 만든 조각들을 볼 수 있었으며, 조각상 외에 보석이나 금속 공예품을 통해서도 그들의 높은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게라 왕국도 아라비아 반도의 뛰어난 지리적 위치 덕분에 형성한 도시 문명 중 하나이다. 게라 왕국의 중심지인 타라에서 발견된 황금 가면과 황금 장갑은 6살 정도의 여자 아이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고대 도시를 다스리던 재력가의 아이였음을 유물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목걸이나 팔찌 같은 유물들을 보면 금뿐 아니라 진주, 터키석, 루비 등으로 장식된 것을 볼 때 교역의 중심지로 게라 주민들이 누렸던 풍요로운 삶도 알 수 있다.
이슬람교가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성립시킨 도시인 메카와 무함마드의 피난처가 되었던 메디나는 이슬람교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이곳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순례길은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홍해 해안에 위치한 도시에 도달하기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의 많은 도시들은 가만히 앉아서 온갖 돈을 끌어모을 수 있는 중간 정착지가 되었다. 유입된 돈을 바탕으로 뛰어난 공예품들이 다량 생산되었으며, 메카와 메디나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기반시설들이 대거 지어질 수 있었다.
사우드 제1왕국은 1744년 종교 지도자 샤이크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와합과 그의 협력자였던 이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와 디리야의 왕의 정치적 연대로 성립되었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는 가장 강대했던 오스만 제국(현 터키)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우드 제1왕국은 이들의 압력으로 1818년 수도 디리야가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그 운명을 다한다. 불과 2년 뒤 사우드 제2왕국이 세워지지만 형제간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1891년에 망하고 만다.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은 아브드 알아지즈 왕이 1902년 현 수도인 리야드를 장악하면서 기초를 다진 나라로, 그는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30년 동안 국가 통합을 위한 계획을 계속 추진하였다. 1932년에 오늘날의 사우디 아라비아가 공식적으로 건국되었고, 아지즈 국왕은 1938년에 발견된 석유를 이용해 국가의 발전과 현대화에 힘썼다. 5부 전시에서는 건국의 영웅인 아지즈 국왕의 유품을 일부 볼 수 있었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이 성립되는 시기 동안 만들어졌던 목걸이와 펜던트, 의례용 단검도 볼 수 있는데, 이들 유물들을 통해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이슬람 국가들의 예술, 생활 등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특히 단검은 우리가 중동 국가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다마스쿠스 검으로 십자가 전쟁 당시 유럽인들이 특유의 단단함과 가벼움에 놀란 물건이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들으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이슬람교의 중심지', '폐쇄적인 국가'같은 것들일 텐데 이 나라가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연유는 잘 알지 못했다. 게다가 이슬람교가 성립되기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인 <아라비아의 길>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성립 과정, 그들의 찬란한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것은 사우디 아라비아로의 방문이 생각보다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관광 비자라는 개념이 없는 사우디 아라비아는 애초에 무슬림 또는 현지 파견 근무자, 유학생 외에는 외국인들을 받지 않는다. 관광비자 발급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약이 없는 일이기에 이번 전시를 통해 사우디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었던 건 정말 좋은 기회였다.
관람 시간: 10:00~18:00 월, 화, 목, 금, 10:00~21:00 수, 토, 10:00~19:00 일
입장료: 성인 9,000원, 중고생 8,000원, 초등학생 7,000원
패키지 (아라비아 전시 + 프랑스 전시): 성인 11,000원, 중고생 10,000원, 초등학생 9,000원
적어도 나에겐 특별전 <프랑스 근현대 복식, 단추로 풀다>보다 <아라비아의 길>이 훨씬 재밌고 가치 있는 전시가 될 것 같았다. <아라비아의 길>이 수천년 된 유물들을 보여줌으로써 아라비아반도에서 오래전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었다면, <프랑스 근현대 복식, 단추로 풀다>는 기껏해야 18세기의 단추들을 보여주는 전시였기 때문이다. 2개 전시 패키지권을 구입하긴 했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의 전시를 먼저 보고 다른 날에 프랑스 전시를 본 데는 이런 연유가 작용했다.
<프랑스 근현대 복식, 단추로 풀다> 특별전은 오후에 찾아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유럽 국가의 전시인 데다 패션, 디자인과 관련된 유물들이라 관람하는 여성분들의 수가 많았고, 자세하게 보는 쪽도 남성보단 여성 쪽이었다. 아쉽게도 내부 사진 촬영이 불가능해 유물들을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부족한 글로 전시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다.
해당 전시는 프랑스의 장식예술박물관과 함께 개최한 특별전으로, 18~20세기의 단추를 중심으로 옷, 그림, 책, 입체작품 등 1,800여 건을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전시다. 프랑스 국립문화재 위원회가 중요문화자산으로 지정한 로익 알리오(Loic ALiio)의 방대한 단추 수집품을 토대로 한 전시로, 프롤로그, 1부 <18세기: 단추의 황금기>, 2부 <19세기: 시대의 규범이 된 단추>, 3부 <20세기: 예술과 단추>, 에필로그 <인생의 단추>로 구성되어 있다. 본 전시가 단지 다양한 단추를 보는 것으로 그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단추를 통해서 프랑스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으며,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단추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1부 <18세기: 단추의 황금기>는 제목 그대로 단추의 황금기인 18세기 수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귀족들은 엄청나 사치를 부려 복식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단추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덕분에 많은 수의 단추 장인들이 양성되었으며, 이때 만들어진 단추들은 수공업자들의 정성과 땀이 하나씩 들어갔을 정도로 아름다운 문양을 띠고 있다.
2부 <19세기: 시대의 규범이 된 단추>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사치가 줄어듬으로 단추의 모습이 단순해졌음을 알 수 있는 전시다. 19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단추의 가격을 하락시켰으며, 규격화된 단추가 양성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획일화된 단추들에서 특별한 모습을 찾을 순 없지만, 몇몇 상류층은 높은 품질의 단추를 요구했고 2부 전시에서도 아름다운 문양의 단추를 찾을 수 있다.
3부 <20세기: 예술과 단추>에서는 공산품으로서의 단추가 아닌 예술로 발전한 단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프랑스 곳곳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예술가들이 단추를 하나의 예술로 보기 시작했고, 그들의 예술혼이 단추에 담겨 표현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에필로그 <인생의 단추>에서 수집가인 로익 알리오의 인터뷰 내용을 볼 수 있으며, 한 가지 일에 집념하는 그의 노력으로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이 단추를 통해 프랑스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관람 시간: 10:00~18:00 월, 화, 목, 금, 10:00~21:00 수, 토, 10:00~19:00 일
입장료: 무료
괘불은 법당 밖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 때 걸어 놓는 탱화다.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괘불을 내걸고 의식을 치르곤 하며, 현존하는 많은 괘불들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밖에 걸어놓는 그림이라, 높이는 15m, 너비는 10m에 이를 정도로 크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괘불을 보기는 쉽지 않다. 괘불의 크기가 엄청나 전시하기도 쉽지 않은데,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는 몇몇 대형 사찰을 제외하고는 전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을 때 때마침 고성 옥천사의 괘불이 전시되고 있어서 조선시대 불교정신이 담겨있는 거대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고성 옥천사 괘불은 옥천사가 소장하고 있는 다른 유물들과 함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재이다. 가로 702.0cm, 세로 943.5cm의 거대한 규모로 보고 있는 사람을 압도하나, 곳곳에 자세하게 표현된 옷 주름과 문양 등은 탱화를 그린 조선시대 스님들의 정성을 알 수 있게 만든다. 만들어진지 200년이 넘었지만, 그림에서 표현된 중앙의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서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모습은 여전히 뛰어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부처님의 의상을 표현하기 위해 화려하게 채색하고 연꽃 문양을 더한 것이 눈에 띈다.
201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모든 특별전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특별전이 <선인들의 마음, 보물이 되다>이다. 2014년과 2016년 사이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을 한 공간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기 때문이다. 특별전에서 전시된 문화재를 다시 보고 싶다면 상설전에서 유물들이 교체되는 기간을 노리거나, 다른 특별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해당 전시가 공지되자마자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재들을 보러 갈 시간을 잡기 위해 애를 썼으며, 새롭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눈 앞에 펼쳐질 때의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앙, 간절히 바라다>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 담긴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상대로 농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염원을 담았으며,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엔 국가 차원에서 사찰을 짓거나 불상을 만드는 등 신앙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앙을 주제로 한 유물들이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인 이유는 당시 선조들의 모든 정성이 함축되어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신에게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이쁨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며, 이런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기술과 상업도 덩달하 발전했을 것이다.
보물 제 1823호 농경문 청동기 - 철기 시대 유물은 상대적으로 상태가 안 좋을 수밖에 없다. 2000년도 더 전의 유물인데 상태가 멀쩡한 게 비정상적이다. 농경문 청동기에선 밭을 가는 농부가 표현되어 당시 농사의 중요성과 그들의 염원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위 구멍을 통해 매달아둠으로써 언제든지 신들에게 그들의 소원을 빌 수 있었을 것이다.
보물 제1907호 함통6년명 청동북 - 함통6년명 청동북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청동북이다. 절에서 사용되는 불교의식구 중 하나로, 통일신라시대 번성했던 불교의 흔적을 좇을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다.
보물 제1904호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 유명한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탑들은 불교사상에 따라 지어진 것들로, 내부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경북 김천 갈항사지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또한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로, 항아리 모양의 금속 외함과 수병 형태의 금동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물 제1873호 원주 학성동 철조약사여래좌상 - 원주는 고려 전기 불교미술의 중심지 중 하나로 다른 지역의 불상과 구별되는 지역적인 특징을 가진 불상이 다수 발견된 곳이다. 지금도 남한강을 따라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와 같은 폐사지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철의 산지인 충주와 강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철불들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철로 만들어졌음에도 불상에서 표현된 옷 주름은 당시 원주가 뛰어난 철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약그릇을 든 불상은 우리나라 철불 중 보기 드문 사례로, 이 또한 원주가 가진 지역적인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물 제1872호 전 회양 장연리 금동관음보살좌상 - 전 회양 장연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금강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고려 말 금동 제작기술이 집대성되어 만들어진 뛰어난 불상이다. 일반적인 불상과 달리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부처님이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을 비롯하여 각종 장식들이 세밀하게 묘사된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불상에서 표현된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를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갈 수 있었던 소중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다.
보물 제1890호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 - 불교 석탑 중에는 사리뿐 아니라 불상을 금동불감 (일종의 상자로 내부에 불상을 봉안해 보관한다) 내에 넣어 같이 봉안한 탑들이 있다. 전북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에서 출토된 금동불감과 내부에서 발견된 7개의 불상 또한 사리와 함께 당대의 불교적 염원이 들어간 문화재이다. 금동불감 안쪽면은 가운데 부처님을 중심으로 보살 2구, 제자 2구, 신장 2구가 조각된 부조이며, 같이 출토된 불상 또한 가운데 부처님을 중심으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양옆에 있는 구조였다.
보물 제1874호 순천 매곡동 석탑 청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 - 순천에서 출토된 청동불감은 당시 건축물을 표현했으며, 내부엔 신체 비율은 다소 맞지 않지만 귀여운 모습을 띤 불상들이 봉인되어 있었다. 유교 중심인 조선시대 만들어진 예술품이라 불교가 중심이 되었던 고려시대의 것들과 달리 장식이 다소 단조로운 게 눈에 띄었으나, 불교를 계승하려는 이들의 정성이 돋보인 또 다른 작품이었다.
보물 제1903호 고려 수월관음보살도 - 고려불화는 전 세계적으로 160여 점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 수월관음도(보타낙가산의 연못가 바위 위에 앉아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는 관음보살도의 모습을 기본 구성으로 하는 불화)는 46점이 있다.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4점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유교 중심이었던 조선시대 가치가 폄하되어 일본이나 중국으로 건너간 것들도 많을 것이고, 혼란했던 근대시대 외국으로 반출된 작품들도 많을 것이다. 외국에 많이 넘어갔다는 것은 외국인들도 수월관음도의 가치를 알아보고 탐을 냈다는 것이므로, 불화에서 표현된 관음보살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700년이 다 되어가는 그림임에도 관음보살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으며, 남아있는 다채로운 색들이 고려시대 화가들의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물 제1887호 노영 필 아미타여래구존도 및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 - 옻칠을 한 작은 나무판에 그려진 그림으로 앞면은 아미타여래구존도가, 뒷면은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가 그려져 있다. 난 뒷면의 그림을 더 주목해서 봤는데, 당시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올라가 담무갈보살을 보고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그린 노영이란 화가도 오른쪽 하단에서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보살들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림으로써 그들의 존재감을 극대화한 느낌이 들었다.
보물 제1847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4 - 보통 보물로 지정된 불경은 읽을 수도 없는 한자들로 쓰여 있어 실제 앞에서 만나더라도 그 유물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대개는 앞에 쓰인 해설과 연대를 보고 서적의 가치를 깨닫는 경우가 많은데,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34는 책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보물이었다. 고려시대 글을 모르는 많은 백성이 불경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하기 위해 그림을 통해 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묘사했으며, 당시 불교가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다.
<기록, 역사에 새기다>는 상대적으로 재미가 덜한 전시다. 기록이 역사로서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제 유물을 맞딱뜨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한자로 빽빽이 쓰인 책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까막눈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부의 사진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것은 사진으로 보여줘도 그 유물들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보물 제1878호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 - 위 호우(청동 그릇)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이름(廣開土大王)이 쓰인 것으로, 신기하게도 신라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되었다. 경주 호우총이라는 이름도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적힌 호우가 발견되었기에 붙여진 것으로, 고구려의 유물이 신라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내력은 학자들이 가설로만 정립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직 미해결 된 과제로 남아있다.
보물 제1845호 부여 사택지적비 - 부여 사택지적비는 사택지적(砂宅智積)이라는 사람이 노년에 불교에 귀의하고 불당과 탑을 건립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사택은 당시 백제의 대표 귀족인 8대성 가운데 하나인 사(砂)씨의 여러 표기 중 하나이며, 사택지적비는 문체와 서법이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를 보여주고 있어 보물로 지정된 유물이다.
보물 제1870호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 위 금동찰주본기는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의 창건과 수리 경위 등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기록으로 사리장치의 품목과 안치 장소 등을 통해 통일 신라시대 사리장엄의 절차와 의식도 알 수 있게 해준다. 경주 황룡사는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목탑이며, 그 규모는 경주 황룡사지에 가면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문화와 기술로 만들어진 탑을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규모와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보물 제1901-1호 조선왕조의궤(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 조선왕조의궤는 조선 시대 왕실의 중요한 행사와 나라의 건축 사업 등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서적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유물이다. 조선왕조의궤 대부분은 천혜의 요새로 여겨지던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되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할 때 약탈되었으며 프랑스가 가져가지 않은 서적들은 방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조선왕조의궤를 우리나라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반환한 것은 대한민국의 국력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반증이 될 수 있으며,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2011년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라는 특별전을 통해 눈물을 글썽이며 봤던 조선왕조의궤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감동이었고, 조선왕실의 행차를 그림으로 보면서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좋은 기억이었다.
보물 제1844호 경주 월지 금동초심지가위 - 경주 월지에서 출토된 가위를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고작 가위에 불과한 생활품을 왜 저렇게 수준 높은 기술로 제작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 때문이다. 신라 왕실 사람들은 일상 생활품인 가위조차 뛰어난 기술로 생산한 것을 볼 때, 수준 높은 공예품들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일본 나라의 쇼소인에서도 비슷한 가위를 소장하고 있어 한·일간의 교류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는 보물이다.
보물 제1899호 은제도금화형탁잔 - 탁잔은 잔을 올려놓는 잔 받침과 잔이 한 벌인 것을 말한다. 위 탁잔은 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잔 받침은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원통형의 모양까지며, 그 위가 잔이다. 은으로 만들어졌으나 금으로 도금한 공예품은 당시 고려시대의 유행 중 하나로, 고려 귀족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보물 중 하나이다.
보물 제1869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 우리나라 대표 유물 중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려청자를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고려청자가 어떤 면에서 뛰어난지는 모르지만 학교에서 한국의 대표 예술품으로 교육시킨 영향이 큰 것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해서 그 아름다움을 실제로 느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도 고려청자 전성기의 뛰어남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보물인데, 은은한 비췻빛 유색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학의 모습, 송이 형태로 그려진 구름은 미술에 무지한 나도 감탄하고 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보물 제1905호 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항아리 -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생산되는 도자기들은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었는데, 청진동에서 출토된 항아리들은 조선 전기 백자 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보물들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으로 유명한 최순우 선생은 백자를 보며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백자에 대한 사랑이 컸다. 고려청자에 비해 장식이 없고 단순하지만 조선백자가 가진 아름다움은 그 모습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순수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국립중앙박물관은 여름 최고의 피서지가 될 만큼 가치 있는 곳이다. 온도에 민감한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실내 온도와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넓은 공간에서 쾌적하게 문화재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여름 주말을 보내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특별전을 통해 사우디 아라비아와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도 주말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방법이 되지 않을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 선조들이 남긴 유산을 보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장소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이기 때문에, 꼭 한 번 방문하라고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