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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 Sep 02. 2017

예술의 섬 나오시마(直島)

세토내해 한가운데 떠 있는 예술가들의 섬

2017년 여름은 정말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낸 시간이었다. 8월 11일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까지도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 여행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 했다. 3달 전 구글 캘린더에 여행 계획을 정리하고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더라면 비행기 타고 있는 동안 여행 계획 짜느라 정신없었을 것이다. 바쁘게 살았던 보상으로 여행 전날 급하게 여권을 챙기고 짐을 꾸려 일본 시코쿠(四国)로 향하는 준비를 마쳤다.


여행도 안 하면 퇴화된다?!

정말 오랜만의 여행이라 기대가 컸지만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서야 내가 뭘 빠뜨렸는지 생각이 났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110V를 사용하기 때문에 카메라 배터리와 스마트폰을 충전하기 위해선 110V용 어댑터를 반드시 챙겨가야 한다. (일본에서 구입하면 정말 비싸다.) 일본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이라 110V용 어댑터도 3개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걸 까먹어서 쓸데없이 돈을 써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인천에서 생각난 게 다행인데, 다카마쓰나 도쿠시마는 소도시인 데다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도시가 아니라 110V용 어댑터를 구하려면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상공에서 본 대한민국

처음부터 뭔가 꼬이긴 했지만, 100% 내 잘못일 뿐이기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도 못 하는 처지라 빨리 잊고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출발 당시 한국의 날씨는 흐리고 비가 와서 제대로 이륙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별 탈없이 이륙하자 구름으로 뒤덮인 한반도를 볼 수 있었다. 흐린 날씨에도 햇살을 느낄 수 있는 건 비행기를 탔을 때 누릴 수 있는 혜택 중 하나이다. 1시간쯤 지나자 아래로 일본이 보이기 시작한다. 도쿄나 나고야, 후쿠오카를 방문할 때와 다르게 시코쿠의 관문도시인 다카마쓰(高松) 시는 인구 45만 명의 소도시이기 때문에 논밭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녹색으로 뒤덮인 풍경이 시코쿠가 일본의 중심지가 아니라 변두리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고, 지금까지 일본 여행과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심취해서 착륙할 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 에어서울 항공기가 착륙을 하고 짐을 챙겨보니 앞좌석 아래에 놔뒀던 여행 가이드북(Lonely Planet Japan)이 사라졌다! 주변에 승객은 앞에 있었던 어린애 2명이랑 애들 아버지밖에 없어서 누가 들고 갔는지는 쉽게 짐작이 되는 상황이지만, 물어보니 끝까지 모른다고만 대답한다. 에휴, 그동안 여행하지 않아 내 여행 유전자가 퇴화되어 짐도 간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구나 하고 자책하며 시간을 뺏기기 싫어서 됐다고 말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일본의 중소도시에 취항한 에어서울. 그 중 대표도시가 다카마쓰다.

여행 시작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도쿠시마에서 벌어진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하튼 공항 여행객센터에 들러 다카마쓰 시내로 가는 리무진에 대한 정보를 얻고 다카마쓰 시내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여행책 없이 어떻게 여행을 할까 걱정도 했지만, 구글 지도와 내가 정리했던 여행 계획만 가지고 여행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좋은 일은 최대한 빨리 잊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세상만사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원리가 아닌가 싶다.

다카마쓰공항 바로 앞에서 다카마쓰 시내로 향하는 리무진을 탈 수 있다. 수시로 운행하며 다카마쓰역까지 요금은 760엔이다.

나오시마로 가는 길

다카마쓰 역에서 하차하면 다카마쓰 여객선 터미널로 향하는 통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0분 정도 걸으면 다카마쓰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다. 일반 페리가 정박하는 터미널과 쾌속선을 탈 수 있는 터미널이 구분되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다카마쓰에서 나오시마로 가는 배편이 시간 간격이 길기 때문에 일반 페리든 쾌속선이든 가장 가까운 시간에 탈 수 있는 배를 선택하는 편이 낫다. (일반 페리 - ¥520, 쾌속선 - ¥1,220) 내가 도착했을 때 시간은 11시 20분 정도라 남는 시간에 다카마쓰에서 유명한 사누키 우동을 먹고 12시 40분에 출발하는 일반 페리를 타기로 했다.

다카마쓰 여객선 터미널. 나오시마로 향하는 배는 두 가지로 50분 걸리는 일반 페리와 25분 걸리는 쾌속선이 있다.
다카마쓰-나오시마 배시간. (출처 - http://www.shikokukisen.com/en/instant/)
다카마쓰 여객선 터미널 내부
다카마쓰에서 나오시마로 향하는 일반 페리

다카마쓰에서 나오시마로 향하는 배를 타면 세토내해 곳곳에 펼쳐져있는 많은 섬을 볼 수 있다. 일본이 섬나라라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네 개의 큰 섬을 주로 연상하지만, 이들 외에 작고 아름다운 많은 섬들이 곳곳에 있다. 세토내해는 혼슈, 규슈, 시코쿠 사이의 좁은 바다를 말하며, 산 정상에서 보는 세토내해의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시코쿠와 규슈의 몇몇 구역들이 국립공원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다카마쓰와 가까운 세토내해의 섬 중 쇼도시마 (小豆島)와 나오시마 (直島)가 특히 유명하다. 쇼도시마의 경우 섬의 크기가 꽤 되기 때문에 하루 만에 돌아보긴 어려울 것 같고, 나오시마가 더 인기 있는 섬이기 때문에 나오시마를 짧은 시간 안에 돌아보기로 했다.

나오시마의 미야노우라 마을 (宮浦).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 나오시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혼무라(本村)

나오시마의 관문은 미야노우라(宮浦)라는 마을이다. 나오시마는 미야노우라, 혼무라, 츠무라 크게 세 마을로 구성된 작은 섬이며, 미야노우라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혼무라를 거쳐 츠무라까지 운행한다. (요금 ¥100) 미야노우라가 관문으로서 역할을 하지만, 나오시마가 왜 예술의 섬으로 불리는지 알기 위해선 혼무라(本村)나 베네세 아트 사이트(ベネッセアートサイト)로 가야 한다. 베네세 아트 사이트는 츠무라까지 이동한 뒤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하지만, 미야노우라나 혼무라에서 걸어도 30분이면 도착한다. 미야노우라에 도착한 뒤, 우선 예약해 둔 숙소가 있는 혼무라로 이동해 짐을 풀고 나오시마를 만끽하기로 했다. 혼무라의 농협 정류장에서 내리면 혼무라 라운지를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여행객들이 여기서 쉬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아트 하우스 프로젝트 티켓을 구입하는 곳이기도 하다.

민슈쿠 오야지 노 우미 (Minshuku Oyaji no Umi, 民宿おやじの海)

숙박료: 2인실 ¥10,000

나오시마에서 묵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베네세 아트 프로젝트의 중심지인 베네세 하우스이다. 객실에서 환상적인 세토내해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을 무료로 관람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숙박하는 사람들에게만 공개된 공간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베네세 하우스의 가장 큰 매력이다. 베네세 하우스에 묵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이고 한적한 혼무라 마을에서 묵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민박집은 오야지 노 우미를 택했다. 오야지 노 우미는 민박집답게 일본의 가정집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마을 한가운데 위치해 있기 때문에 조용한 가운데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체크인이 오후 3시 이후부터 가능하기 때문에 짐을 놓고 혼무라의 하이라이트인 아트하우스 프로젝트를 감상하기로 했다.

민박집 오야지 노 우미

아트하우스 프로젝트 (Art House Project, 家プロジェクト)

입장료: ¥1,030 (하이샤, 미나미데라, 고오신사 외 3곳)

관람시간: 10am-4.30pm Tue-Sun

홈페이지: http://benesse-artsite.jp/en/art/arthouse.html

조언: 아트하우스 프로젝트 티켓을 사자마자 미나미데라(南寺)로 달려가라!

나오시마가 예술의 섬이라는 인식 때문에 섬 곳곳에서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국의 예술마을을 연상하고 벽화마을이나 종로의 서촌 또는 북촌처럼 나오시마 또한 거리 곳곳에서 조각들이나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네세 아트 사이트를 제외하곤 거리에 설치된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긴 힘들고, 만만치 않은 금액을 지불해야 나오시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시마가 유명해진 이유는 나오시마를 예술의 섬으로 바꾸는데 일조한 예술가들의 면면이 화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베네세 아트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안도 다다오, 이우환, 제임스 터렐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유명한 대가들이다. 이들의 개인적인 성과는 미술관에서 쉽게 볼 수 있겠지만, 대가들이 함께 팀 프로젝트로 이룬 나오시마는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결과물이기 때문에 섬 자체가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오시마의 아트하우스 프로젝트

아트하우스 프로젝트 입장권을 구입하면 혼무라에 흩어져 있는 6곳의 일본 주택 또는 신사를 방문해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프로젝트로 지정된 집들이 혼무라 전체에 걸쳐있기 때문에 혼무라 마을 곳곳을 둘러봐야 하지만, 섬마을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와 여유로움이 도보여행을 즐겁게 만든다.

이시바시 (Ishibashi). 히로시 센주의 작품이 전시된 집이다.

이시바시(石橋)는 메이지 시대 소금 생산으로 번영했던 이시바시 가문의 집이다. 현재는 히로시 센주가 5년 동안 작업한 결과물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시바시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작품 <The Falls>는 어두운 곳에서 마치 폭포 한가운데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주는 작품이며, <The Garden of Ku>는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원을 조성한 느낌이다.

혼무라 마을
고카이쇼 (Gokaisho)

고카이쇼(碁会所)는 옛날에 섬에 살았던 주민들이 모여 바둑을 뒀던 곳이다. 요시히로 스다의 작품인 <Tree of Spring>이 전시되어 있으며, 마당에 심긴 동백나무와 방 안에 놓인 동백꽃들이 작품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고오신사 (Go'o Shrine)

고오신사(護王神社)는 아트하우스 프로젝트에서 미나미데라, 하이샤와 더불어 가장 재미있는 곳 중 하나이다. 에도시대에 지어진 신사를 복원하면서 히로시 스기모토의 작품인 <Appropriate Proportion>을 설치하여 일본에서 가장 독특한 신사 중 하나가 만들어졌다. 고오신사는 그냥 둘러봐도 재미있는 공간이지만, 신사 한가운데 위치한 계단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선 지하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 한 명이 서서 겨우 들어가야 할 정도의 좁은 통로(여기 들어가려면 다이어트는 필수!)로 들어가면 히로시 스기모토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카도야(角屋)는 200년 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 아트하우스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완성된 곳이다. 타츠오 미야지마의 <Sea of Time>, <Naoshima's Counter Window>, <Changing Landscape>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숫자가 변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자리에 앉아 일본에서 보내는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조용한 가운데 느낄 수 있었다.

미나미데라 (Minami-dera)

미나미데라(南寺)는 전통주택을 개조한 것이 아니라 허물어진 절터에 안도 다다오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설계한 건물이다. 안도 다다오답지 않게 콘크리트가 드러나있지 않지만, 주변 환경과 최대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 외벽을 목조로 덮은 것이 특징이다. 미나미데라는 15분 간격으로 관람객들을 제한하고 있으며, 시간이 정해진 대기표를 받아야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티켓을 사자마자 미나미데라로 달려갈 것을 추천한다. (티켓을 살 때 직원분의 조언을 듣지 않아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다...) 미나미데라에서 대기표를 받으면 1시간~2시간 정도 기다려야 할 테니 이 시간 동안 다른 아트하우스들을 방문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미나미데라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벽에 기대어 들어가게 되는데, 그 뒤에 만나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들어가서 느껴보지 않으면 그 느낌을 알 수 없다.)

하이샤 (Haisha)

하이샤(はいしゃ)는 '치과의사'라는 뜻으로, 치과로 활용되던 건물을 신로 오타케가 개조한 건물이다. 그의 작품은 <Dreaming Tongue>으로 조각, 그림, 건축 등 예술의 다양한 분야가 하나로 합쳐져 있다. 건물 안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만날 수 있으며, 특이한 외관과 달리 건물 내부는 일본 전통 건물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작품 이름이 <Dreaming Tongue>인 것은 입안에 무엇인가를 넣고 그 맛과 냄새를 통해 꿈을 떠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안도 뮤지엄 (Ando Museum)

안도 뮤지엄 (Ando Museum)

입장료: ¥510

관람시간: 10am-4.30pm

홈페이지: http://benesse-artsite.jp/en/art/ando-museum.html

안도 뮤지엄은 아트하우스 프로젝트에 포함되지 않은 미술관으로 별도의 입장료를 또 내야 한다. 안도 다다오(安藤忠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로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강원도 원주의 뮤지엄 산, 제주의 본태박물관, 서울의 JCC아트센터) '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건물은 외장재 없이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 특징이며, 실내에서 자연광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건물이 지역적 특색과 녹아들도록 만들어졌다. 베네세 아트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특히 치추 미술관)을 통해 그의 사상과 예술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안도 뮤지엄은 안도 다다오의 생애에 대해 소개하고 그의 작품들을 미니어처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510을 내고 들어갈 만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베네세 아트 사이트에서 감상하는 그의 작품들이 훨씬 더 가치 있다.)


베네세 아트 사이트 (ベネッセアートサイト)

베네세 아트 사이트는 나오시마의 세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가장 가까운 츠무라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갈 수 있으나, 혼무라나 미야노우라에서 걸어도 30분이면 도착한다. 이미 오후 4시가 다 되어 가 베네세 하우스 미술관은 다음날 보기로 하고 이우환미술관과 치추미술관을 보기로 했다. 혼무라에서 베네세 아트 사이트로 향하는 길은 산책길로 활용되며, 도중에 나오시마 주민들의 수자원으로 활용되는 저수지를 만날 수 있다.

이우환미술관 (Lee Ufan Museum, 李禹煥美術館)

입장료: ¥1,030

관람시간: 10am-6pm Tue-Sun, to 5pm Oct-Feb

홈페이지: http://benesse-artsite.jp/en/art/lee-ufan.html

이우환 화백은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니혼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여 미술활동을 하는 특이한 내력을 가진 작가이다. 모노하(物派)란 회화에서 사용되는 나무나 돌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의 상태를 제시하는 미술인데, 이우환 화백은 모노하의 이론적인 토대를 제시해 일본에서 명성을 얻었다. 일본 미술의 큰 흐름을 한국인이 제시한 특이한 내력을 가졌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그의 업적을 인정하고 나오시마에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설립되는 것을 보면 예술엔 국적이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우환미술관은 입구부터 찾기가 힘들다. 계단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고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만, 계단을 내려가면 이우환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고 뒤편에 콘크리트 벽 하나가 세워져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입구를 쉽게 찾을 수도 있다.) 콘크리트 벽에 접근하면 입구를 겨우 찾을 수 있으며, 미술관 내부로 들어가면 안도 다다오가 만든 세계 안에서 이우환 화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가운데 돌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뒤편에 걸려있는 그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과 나와의 관계, 그 사이에 흘러가는 시간, 붓칠 하나로 그린 듯한 단순한 그림이 주는 느낌 등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우환미술관. 콘크리트 벽이 겹겹이 쌓인 듯한 곳이 미술관으로 향하는 통로이다.
베네세 아트 사이트의 세 가지 미술관. 이우환 작가는 베네세 아트 사이트 중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일본에서 인정받고 있는 화가이다.

치추미술관 (Chichu Art Museum, 地中美術館)

입장료: ¥2,060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이 돈을 주고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관람시간: 10am-6pm Tue-Sun, to 5pm Oct-Feb

홈페이지: http://benesse-artsite.jp/en/art/chichu.html

한자를 해석해보면 땅속 미술관(?)이라는 이상한 의미를 가진 미술관인데, 이 같은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안도 다다오의 설계철학이 작용한 것이 크다. 안도 다다오는 세토내해의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지 않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박물관 내부 공간을 대부분 지하로 한정시켰다. 다카마쓰에서 나오시마로 향하는 페리에서도 베네세 하우스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이우환미술관과 치추미술관은 밖에서 볼 때 그 존재조차 찾기 힘들다. 치추미술관은 입장료가 비싼 축에 속하지만 전시된 작품은 단 세 명의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세 예술가들이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 그리고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이다. 

치추미술관의 입구. 치추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다양한 종류의 꽃들을 만날 수 있다.

치추미술관은 입장권을 사는 곳과 미술관이 분리되어 있다. 이는 관람객들이 클로드 모네가 말년에 그린 지베르니의 정원을 미술관까지 가는 길에 감상하라는 배려다. 지베르니의 정원보다 크기는 훨씬 작겠지만 다양한 꽃들과 연못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모네의 작품을 감상하기 전의 준비단계로 충분하다.

치추미술관에서 가장 내가 감동받은 것은 미술관 건물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공대생이라 미술보단 건축에 더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나 보다.) 여태껏 본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 치추미술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통로뿐 아니라 미술관 내부에도 자연광이 잘 어우러지도록 설계했다. 덩굴로 뒤덮인 입구에서 바라보는 통로는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길인 양 환상적인 모습을 선사했다. 미술관의 각 전시실은 공간 활용면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아도 될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 길 내내 안도 다다오를 느껴보라는 배려 같았다. 인공적인 조명 하나 없이 햇빛 하나만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한 안도 다다오는 일본이 낳은 천재적인 건축가이다. 치추미술관은 '빛'을 포착하고 이를 표현하는 예술가들이 합작하여 만든 나오시마의 걸작이다. 클로드 모네, 제임스 터렐, 월터 디 마리아의 작품들은 안도 다다오의 건물과 어우러져 자연의 대표적인 예술인 빛을 표현하는데 주력하였다.

클로드 모네의 <Water-Lilies, Cluster of Grass>

클로드 모네는 빛의 변화를 포착하는 인상파의 대표화가로 평생 인상주의를 지킨 프랑스의 화가이다. 말년엔 지베르니 자택의 정원에 심취해 300여 점의 수련 연작을 그렸으며, 치추미술관이 소장한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도 그가 말년에 그린 수련 연작 5점의 그림들이다. 수련 연작들도 시간이나 날씨,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포착하는데 집중하여 그린 그림들로, 치추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도 다양한 모습의 수련들을 포착하고 그려내었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직접 접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세 번을 다시 돌아볼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들이었다.

월터 드 마리아의 <Time/Timeless/No Time>

월터 드 마리아는 '대지미술(Earth Works)'이라 불리는 미술계의 선구자이다. '대지미술'은 자연 속에서 흙, 바위, 모래 등을 조금씩 변형하거나 첨가해 작업하는 미술 분야로, 히피들의 자연회귀 정신과 관련이 있다. 치추미술관에서 본 윌터 드 마리아의 <Time/Timeless/No Time>은 <벼락치는 들판>처럼 자연 한가운데 세워진 예술품은 아니지만 천장에서 나온 빛을 기둥들에 반사되어 나오는 모습, 검은 공 한가운데서 보이는 하늘이 자연 자체를 잘 표현한 것 같았다. 계단을 다 올라가 내려다보면 비현실적인 세계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제임스 터렐의 <Open Field>
제임스 터렐 <Open Sky>

제임스 터렐은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설치 미술 작가로, <Open Field>에선 인공조명을 통해, <Open Sky>에선 자연광을 통해 관객들이 빛을 감상하고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미나미데라에서 느낀 그의 빛에 대한 애정은 여기서도 여전하여 빛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고, 작품에서 드러난 그의 기발함과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할 수 있었다. 안도 다다오와 제임스 터렐의 합작품은 굳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오지 않아도 한국에서 만날 수 있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뮤지엄 산'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이며 '제임스 터렐관'을 따로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제임스 터렐에 특화된 미술관이다. 나도 가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반드시 찾아 치추미술관과 비교해보며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다. 

치추미술관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나오시마의 관문인 미야노우라에 도달할 수 있다. 미야노우라로 가는 길 왼편엔 아름다운 세토내해가 펼쳐져 있으며, 바다 풍경을 감상하면서 한적히 걸을 수 있는 것 또한 나오시마가 주는 즐거움이다. (시간상으로 맞지 않지만 미야노우라는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 뒤에 소개할 것이다.)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 (Benesse House Museum)

입장료: ¥1,030

관람시간: 8am-9pm

홈페이지: http://benesse-artsite.jp/en/art/benessehouse-museum.html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은 혼무라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츠무라로 이동하여 들렀다. 츠무라 종점에서 내리면 한적한 해변 풍경과 더불어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색 땡땡이 호박을 볼 수 있다. 쿠사마 야요이는 불우한 어린 환경 속에 주변 여기저기에 점이 보이는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작가이다. 지금도 정신병원에 입원해있지만, 자신의 질환을 승화시켜 추상미술에서 인정받고 있는 조각가 겸 설치미술가이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진화랑(Jean Gallery)에서 그녀의 호박을 만날 수 있으며, 나오시마로 건너와 다시 호박을 만나게 되니 오래된 친구를 만난 양 반가웠다.

쿠사마 야요이의 대표 작품 땡땡이 호박(?) 그녀의 작품은 수많은 점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을 지나면 베네세 하우스 구역으로 들어오게 되며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에 설치된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Phalle)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니키 드 생팔은 프랑스의 여류 조각가로,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헤어져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도 쿠사마 야요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고 자기 세계에 대한 욕구와 사회의 모순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녀의 조각들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원색을 최대한 활용하여 밝은 모습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그녀가 겪은 불행과 달리 그녀의 작품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들어 즐거움을 준다. 치유와 해방의 예술가라는 그녀를 나오시마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베네세 하우스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방문하기 위해선 조금 수고스럽지만 오르막길을 타야 한다. 물론 중간에 만나는 예술작품들과 세토내해에 펼쳐진 풍경들이 이런 수고스러움을 약간이나마 덜어준다.

베네세 하우스로 올라가는 언덕에도 조각들을 만날 수 있으며 붉은색을 띠는 사암과 해식동굴도 볼 수 있다.

베네세 하우스 또한 단번에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콘크리트 외벽이 노출되어 있고 덩굴 또는 나무가 콘크리트를 덮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베네세 하우스 입구. 벽을 타고 오르는 덩굴들이 인상적이다.

베네세 하우스는 나오시마의 모든 미술관 중 가장 다양한 장르의 미술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호텔로 활용되기 때문에 숙박하는 사람들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일반 관람객들에게 제한된 구역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꼭 호텔에 묵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다 개성 있고 재미있기 때문에 나오시마에 온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러야 할 곳 중 하나이다. 세토내해의 풍경을 미술관 안에서도 볼 수 있으며 자연, 건축, 미술이 한데 어우러진 광경은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베네세 하우스에 전시된 작품들
빛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

베네세 하우스 미술관에서 내가 특별히 주목한 곳은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원형 계단이 위치한 광장이다. 중앙 천장에 위치한 뿔 모양의 유리를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며 바로 아래 위치한 미술품이 보여주는 인공조명이 이와 어우러진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빛의 변화를 관찰하며 예술품을 보면서 느낀 감동은 한국에 와서도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주었다.

베네세 하우스 2층. 세토내해가 객실 바로 앞에 펼쳐져있다.
베네세 하우스에 들르면 의자에 앉아 세토내해를 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다.

베네세 하우스 미술관을 둘러본 뒤 츠무라에서 혼무라까지 걸어가며 나오시마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에 남겼다. 츠무라에서 본 나오시마 버스는 쿠사마 야요이의 상징인 점들과 호박이 그려져 있어 여기가 나오시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시켰다.

나오시마 버스

미야노우라 (宮浦)

미야노우라는 나오시마의 관문인 마을로,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나오시마에서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다. 항구 옆으로 다양한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을 반기는 곳으로, 나오시마에 도착한 많은 사람들이 작품들과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긴다. 나는 혼무라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미야노우라에 오랫동안 있지는 못 했지만, 여기에서 묵어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방문한 미야노우라항의 모습

치추미술관을 들린 뒤 걸어서 방문한 미야노우라 마을은 해가 지기 전 붉은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항구 옆의 작품들도 햇살을 받아 나오시마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담으라고 유혹하고 있었고,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 또한 햇빛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틈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오시마에 하루밖에 묵지 못하다니! 걸으면서 만난 독일인들이 왜 나오시마에 3일 동안 묵기로 결정했는지 늦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
미야노우라항 바로 옆 공원에서 볼 수 있는 예술 작품들

아이러브유 목욕탕 (直島銭湯, I Love Yu, I♥湯)

입장료: ¥510

운영시간: 2-9pm Tue-Fri, 10am-9pm Sat&Sun

홈페이지: http://benesse-artsite.jp/art/naoshimasento.html

미야노우라의 하이라이트는 I Love Yu (I♥湯)라는 목욕탕이다. 목욕탕이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여기 또한 혼무라의 아트 하우스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현대미술가에 의해 디자인된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현대미술가 오타케 신로에 의해 꾸며진 건물은 외관부터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탕이 하나밖에 없는 작은 욕탕이긴 하지만 내부에도 오타케 신로의 작품들(대표적으로 코끼리!)이 설치되어 있어 목욕하는 도중에도 나오시마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미야노우라에 들리면 반드시 가봐야 할 곳 중 하나이다.

미야노우라의 노을

시오야 다이너 (Shioya Diner, シオヤダイナー)

영업시간: 11am-9pm Tue-Sun

메뉴: Beef Stake ¥1,800

시오야 다이너는 아이러브유 욕탕 바로 옆에 위치한 식당으로, 미국 식당같은 분위기를 내는 곳이다. 내부는 다양한 그림과 아기자기한 조각들로 꾸며져 있으며, 흘러나오는 락앤롤 음악은 맥주 마시기에 최고의 분위기를 제공한다. 케이준 치킨이나 비프스테이크의 경우 아저씨가 주문을 받으면 바로 구워서 제공하는 시스템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맛을 보장하는 곳이다. 다카마쓰나 우노로 돌아가지 않고 나오시마에 묵는 사람들이 저녁에 주로 찾아 한적한 시간을 보내는 곳이며, 나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시오야 다이너에서 먹은 비프 스테이크

나오시마를 떠나며

나오시마는 걸어서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Lonely Planet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선정될 정도로 멋진 섬이다. 나처럼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에 푹 빠진 사람 또는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방문해야 하며, 오지는 아니지만 조용한 섬마을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도 방문할 만한 곳이다. 3일 정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오면 좋겠지만, 도쿠시마에서 열리는 아와오도리를 보기 위해 다카마쓰로 가는 쾌속선을 타고 도쿠시마로 향했다. 여행책 없이 나오시마 여행을 잘 마쳤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약과 일정도로 도쿠시마에선 다시 생각하기 싫은 일이 벌어졌다. (ㅠㅠ...) 

어쨌든 미술, 건축 마니아들은 나오시마를 꼭 방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다카마쓰로 돌아가는 쾌속선
하루만에 다시 본 다카마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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