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파로(Paro)

부탄의 시작과 끝, 파로를 상징하는 파로 종 (Paro Dzong)

by TOMO
부탄의 관문, 파로국제공항

부탄이라는 나라에 발을 내딛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파로국제공항.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협소한 규모와 대형 항공기의 접근조차 막아버리는 짧은 활주로. 인구 80만의 소국에 해외 여행자들의 수마저 제한해버리니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큰 공항을 지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내가 가본 나라 중 이 공항의 규모는 어느 정도 될까?" 또르르 머리를 굴려본다. 면세점에 들릴 필요도 없었던 캄보디아 프놈펜 국제공항,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 등 동남아의 몇몇 공항이 떠오르지만 파로 국제공항을 이길 수 없다. 결국 '내가 가 본 한 나라의 대표 국제공항 중 가장 작은 곳 = 파로 국제공항' 공식을 머리 속에 새겨둔다. 입국 심사는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프린트한 비자를 제출하니 생각보다 너무 시시하게 끝났다. 나름 여러 질문에 대해 대비하고 있었는데... 소규모의 면세점 몇 군데를 지나니 바로 출국장이 보이고, 출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가이드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겼다.

IMG_0120.JPG 파로 국제공항. 공항도 부탄 전통식 건물로 꾸며져 있다.

대부분의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인파들, 승객들을 기다리는 택시기사들의 호객행위, 지하철과 버스를 탈 수 있는 승강장, 해외 여행객들을 도와주는 여행 안내소. 이 모든 것들은 부탄이라는 나라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해외에서 일하고 돌아온 노동자들을 맞아주는 몇몇 가족도 보이지만 소규모의 인파 중 돋보이는 사람들은 부탄 전통 의상으로 보이는 옷들을 입고 여행객의 이름이 쓰인 팻말을 들고 기다리는 가이드들이다. 인천 국제공항이라면 내 이름을 찾는데 한참 걸렸겠지만, 가이드들의 수도 얼마 안 되는 데다 영어로 쓰면 쓸데없이 길게 쓸 수밖에 없는 내 이름을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조그마한 키에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의 이름은 따시(Tashi). 내 짐을 받아 하얀색 도요타 어벤자에 실은 뒤, 푸짐한 인상의 드라이버를 소개해준다. 그의 이름은 파상(Pasang). 앞으로 2주간의 일정을 자기들과 함께 할 거라고 말하고 짧고 어색한 인사를 끝낸다.

IMG_2582.JPG 가이드 따시(Tashi)와 드라이버 파상(Pasang)
첫 아침식사

따시는 방콕을 거쳐 파로로 오는 지옥 같은 일정 끝에 도달한 내가 초라하고 불쌍해 보였는지 호텔에 데리고 가 아침을 먼저 먹도록 배려해준다. 호텔은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 드룩첸 (Hotel Drukchen)으로, 파로 추(Paro Chhu, 파로 강)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내가 짐을 옮기려고 하니 호텔 직원분이 알아서 방까지 옮겨주신다. "오 이게 바로 럭셔리 여행인가..."라는 염치없는 생각을 하며 식당으로 들어서서 부탄식 아침식사를 처음으로 접한다. 불교 국가답게 쌀이 주식이고, 여러 가지 야채 요리가 뷔페식으로 제공된다. "아, 2주일 동안 고기도 못 먹고 건강하게 살아야 되는 건가." 내 짧은 걱정은 점심을 먹을 때 'Beef, Pork, Chicken'로 분류된 수많은 종류의 음식 리스트를 보고 사라져 버렸다.

IMG_0178.JPG 파로에 있는 동안 묵은 호텔 드룩첸

호텔에서 밖을 바라보니 인구 4500명, 해발 2,280m에 위치한 작은 마을 파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작은 마을이 부탄으로 입국하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교통 허브라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잘 여문 들판들 사이를 흐르는 파로 추(Chhu, 강)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파로 종(Zhong, 요새), 군데군데 세워진 굄바(Goemba, 불교 사원), 언덕 위에 세워진 수많은 깃발들,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는 파로 시내... 인접국인 인도나 동남아시아의 왁자지껄한 풍경과 너무도 대비된 모습에 깜짝 놀랐다. 부탄을 처음 만난 내게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 들러 본 어떤 곳보다 이국적이고 아늑하며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했다.

IMG_0225.JPG 파로의 들판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파로추(Paro Ch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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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도중 만난 부탄의 사원
파로의 상징, 파로 종을 만나다

아침을 먹으면서 환상적인 풍경에 취해 있는 동안, 따시가 와서 나에게 일정표를 건네며 여행을 떠나길 재촉한다. 파상이 운전하고 도착한 곳은 파로 종 뒤편의 언덕. 여기서 트레킹을 시작해서 파로 종과 국립 박물관을 지나 마을로 내려오는 것이 부탄 첫날의 일정이었다. 처음엔 숲 한가운데를 거닐며 사원 여러 군데를 지나쳐 갔지만, 나중엔 파로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길 위를 걸어 다닌다. 따시가 숲 여기저기 꽂힌 깃발들을 가리키며 부탄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깃발의 다섯 가지 색이 티베트 불교에선 다섯 개의 원소를 상징하며, 태어난 연도에 따라 각자의 원소도 정해진다고. 그러면서 내 생일을 물어보며 내 원소가 불이라고 알려준다.

"야, 나도 원소가 불인데 내 아내는 물이야." 라면서 자기는 집에서 꼼짝도 못 한다고 말한다. 불의 상극이 물이라나. 그러면서 나는 불이니까 원소가 흙인 사람을 만나면 좋을 거라고 추천해준다. '오, 귀담아 들어서 한국에서 써먹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에 돌아와 하루 종일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으니 원소를 어떻게 확인하는지도 다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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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군다르 (Goendar), 룽다르 (Lungdar), 마니다르 (Manidar), 라다르 (Lhadhar)
부탄 여행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 01 -부탄의 깃발들

부탄 어디를 돌아다니든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다섯 가지 색으로 이뤄진 깃발들이다. 파랑, 초록, 빨강, 노랑, 하얀색 다섯 가지 색으로 그려지는 깃발들은 다섯 가지 원소인 물, 나무, 불, 흙, 철을 나타낸다. 또한 댜니(dhyani)라 불리는 다섯 명의 부처, 다섯 가지 지혜, 다섯 가지 방향, 다섯 가지 감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깃발의 종류는 총 4가지로 다음과 같다.

군다르 (Goendar)
가장 작은 깃발들로 부탄 전통주택 지붕 위에 올려진 깃발이다. 부탄의 수호신인 마하칼라의 축복과 보호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룽다르 (Lungdar)
언덕이나 능선에서 보이는 깃발들로 행운, 질병으로부터 보호, 목표 성취, 지혜를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다. 부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깃발이다.

마니다르 (Manidhar)
죽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하얀 깃발들로, 강을 내다볼 수 있는 위치에 불교의 번뇌를 상징하는 108개가 묶음으로 세워진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염원이 바람을 타고 강을 따라 먼 길을 떠나라는 의미로 바람과 강이 맞닿아있는 곳에 꽂힌다.

라다르 (Lhadhar)
가장 큰 깃발인 라다르는 종(dzong)이나 중요한 장소에 꽂히는 깃발로 악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라다르가 꽂힌 장소는 신성한 장소로 예복을 갖춰야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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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 종 (Paro Zhong)

숲길을 헤쳐나가 아래를 바라보니 위엄 있게 서 있는 파로 종 (Paro Zhong)이 보인다. 가이드인 따시는 고향이 파로인 데다 직업이 가이드라 수도 없이 본 풍경이라 내 느려진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요새의 환상적인 모습에 내 발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샵드룩 나왕 남걀 (Zhabdrug Ngawang Namgyal)구루 린포체 (Guru Rinpoche)는 여행 중 귀에 박히도록 들을 정도로 부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인데, 구루 린포체가 지은 사원에 샵드룩 나왕 남걀이 1644년에 지은 요새가 바로 파로 종이다. 현대식 무기엔 맥없이 쓰러질 요새지만, 먼 과거에는 높은 성벽 가운데 활을 쏠 수 있는 수많은 구멍이 있어 쉽게 함락되지 않았으리라. 요새 가운데 지어진 우체(Utse, 망대)는 성벽보다 훨씬 높게 지어져 멀리서 침범해 오는 적들이 있는지 감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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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 종 내부

성벽 안으로 들어서니 단순히 방어용 요새인 줄 알았던 곳에 수많은 방들과 사무실이 있었다.

"여기가 도대체 뭐하는 곳이야?"

"음, 너네 나라로 치면 도청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나라의 도청들과는 다른 게 있지."

따시는 파로 종 내에 위치한 각종 사무실들을 지나치면서 여기는 경제부, 여기는 교육부, 여기는 교통부라면서 설명을 해준다. 망대 뒤편으로 가니 아래 편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앞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종(Dzong)의 반은 행정국, 나머지 반은 불교국이라고 보면 돼."

신기했다. 국교가 정해져 있는 나라는 많지만, 행정을 담당하는 건물의 반이 불교에 할당되어 있다니. 실제 파로 종 내부엔 승려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파로 종칵(Paro Dzongkhag, 파로 지방) 전체 불교를 관할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승려들이 거주하는 생활공간뿐 아니라 요새 내에 하캉(Lhakhang, 사원)도 있어, 불교가 부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불교가 삶에 녹아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부탄에서는 도청에 공무원과 승려들이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듯했다.

IMG_0377.JPG 국립박물관

파로 종 바로 위엔 1649년에 세워진 원형 모양의 망루가 있는데, 1968년부터 국립박물관으로 쓰이다 2011년에 지진으로 피해를 입어 한창 복구 중이다. 부탄 역사를 보여주는 수많은 유물들이 박물관에 있었지만,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라 보기 어렵다고 따시가 설명해준다.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마을에 내려오니 아름다운 목조 다리가 보인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 시대에 목조 다리를 터벅터벅 걸어가니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니 부탄 학생 2명이 책을 들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또한 따시와 파상처럼 부탄 전통복을 입고 있었던 것. 부탄 정부는 '우리는 부탄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가이드와 운전수가 반드시 전통복을 입기를 강제하고 있고, 다음 세대인 부탄의 학생들 또한 부탄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고(Gho, 남성 옷) 또는 키라(Kira, 여성 옷)를 입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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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 추를 가로지르는 다리, 냐마이 잠 (Nyamai Zam)
지상의 낙원, 부탄?

부탄을 여행하는 첫날, 짧은 시간의 여행이었지만 자신들의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부탄 정부의 노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자유롭게 문호를 개방한 동남아의 여러 국가들을 보라. 한 도시 내에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공간과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공간이 따로 있는 참담한 현실. 부패한 정부 때문에 최소한의 생계 지원도 받지 못하고 외국인들에게 구걸하고 조잡한 기념품 하나 팔기 위해 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 여행자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으로 바라보며 언제든 사기 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이에 반해 아직도 나 같은 외국인을 보고 신기하게 쳐다보는 부탄 사람들은 너무도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아 보였다. 부탄을 보기 위해선 엄청나게 높은 벽을 넘어야 하지만, 그 벽을 넘어 본 것은 지상의 마지막 낙원인 것처럼 보였다. 파로에서 보낸 첫날에 느낀 인상은 그랬다.

IMG_2295.JPG 파로 종 (Paro Dzong)과 국립박물관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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