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면 어때. 평안과 위로만 얻을 수 있다면.
뭐야, 10월은 날씨가 좋다며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밖을 바라본다. 어제처럼 좋은 날씨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구름으로 뒤덮인 파로 종을 보는 순간 깨지고 만다. "아 뭐야... 10월의 부탄이 제일 날씨가 좋다며..."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가이드북을 뒤져본다. '히말라야 산맥이 가장 잘 보이는 시간, 10월'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10월이 부탄을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며, 파로에 머물고 있는 오늘도 10월이라는 걸 확인한다. 게다가 오늘 일정을 확인하니 칠리 라(Cheli La)라는 해발 3,810m 고개까지 차를 몰고 가 트레킹을 하는 것이 아닌가! 허겁지겁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때마침 들어온 따시에게 물어본다. 10월이 부탄을 여행하는 적기가 아니냐고. 따시는 웃으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물론 10월이 가장 좋은 시간이지만 해발 2000m가 넘는 산악지대인 부탄에서 비가 안 내리는 걸 바라는 게 이상한 것 아니냐고. 우리나라로 치면 장마철이자 비수기인 6월부터 8월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부탄 정부조차 살인적인 여행 비용을 깎으면서 수입을 올리려 한다고 날 위로해준다.
비 오는데 칠리 라 (Cheli La)로 가는 일정에도 문제가 없는지 물어본다. 칠리 라를 가는 이유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산맥의 모습이 장관이기 때문인데, 비가 오면 아무것도 못 볼까 봐 걱정이 되었다. 따시는 나에게 선택권을 부여한다. 칠리 라에 가는 대신 파로의 다른 사원들을 들려도 괜찮다고. 그래도 혹시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칠리 라로 가는 걸 선택했다.
칠리 라 대신 종드라카(Dzongdrakha)
비가 와 미끄러운 도로에서도 파상은 수많은 커브길을 유연하게 헤쳐나간다. 따시가 파상은 자기가 아는 최고의 운전수라고 칭찬을 하자 나도 거기에 선뜻 동의를 했다. 파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Bhutan Journeys에서 외국인을 이끌고 운전하기 시작했다. 지금 몰고 있는 어밴자를 탄 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하면서 그 전엔 현대차를 몰았다고 말한다. "신!(내 이름은 영어로 발음하기 너무 어려워 성만 부르라고 했다) 너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현대차보다 어밴자가 훨씬 안정감 있고 좋은 것 같아." 뭐, 내가 한국인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도요타가 훨씬 인기 있는 차고, 현대차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자체보다 긴 품질보증기간과 상대적으로 싼 가격 때문에 사는 것이니 파상의 의견에 딱히 반대할 수가 없었다.
30분 정도 운전을 해도 산 전체를 덮은 구름은 걷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칠리 라에 가도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일 것 같으니 포기하자고 제안하니 따시와 파상은 기뻐하며 차를 돌렸다. 이럴 거면 아침부터 가겠다는 나를 뜯어말렸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내 똥고집 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날린 것이니 항변할 수도 없다. 따시와 파상은 돌아가는 길에 성수(聖水)가 나오는 곳이 있으니 잠시 멈춰서 물을 떠가도 되냐고 묻는다. 성수라고 특별한 모습을 기대했지만, 파상은 쭈그려 앉아 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뜨고 있고 이 곳에서 흐르는 물에 치유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부탄은 온천지대가 아니기 때문에 부탄 사람들은 돌을 뜨겁게 달구고 이 돌을 물에 넣어 몸을 씻는 Hot-Stone Bath를 즐긴다. 돌에 진짜 치유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산 중턱까지 와서 목욕을 하려는 부탄 사람들의 의지가 참 대단했다.
성수를 뜨고 차에 올라타 몇 분을 가니, 따시가 손가락으로 절벽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종드라카(Dzongdrakha)라고 말한다. 구름으로 뒤덮여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몇몇 건물들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구루 린포체(Guru Rinpoche)가 악마를 봉인한 장소 중 하나로 알려진 종드라카(Dzongdrakha)는 네 개의 하캉(Lhakhang, 사원)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이 곳에 가기 위해선 빗물로 젖은 흙길을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눈 앞에 펼쳐진 사원 건물들 내엔 귀중한 벽화와 불상이 봉인되어 있다고 하나 모든 건물들이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워낙 적은 사람들만 방문하는 곳이라 상주하고 있는 스님을 찾아야 문을 열어주는데 어디로 가 있는지 찾을 수조차 없었다. 따시는 여기는 스님들이 명상을 하는 곳이라 소리를 낼 수조차 없다고 안타깝지만 포기하고 내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기껏 여기까지 고생해서 올라왔는데! 따시는 여기 존재조차 모르는 여행객들도 많으니 방문한 것에 의의를 두고, 내려가서 자기들이 싸온 맛있는 점심을 먹고 기분을 풀자고 날 위로해준다.
부탄에서 고기를
종드라카에서 내려와 파로계곡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부터 계곡을 뒤덮은 구름은 걷힐 생각이 없다. 하지만 하루 종일 우리를 괴롭힌 구름이 이제는 운치 있고 멋진 풍경이 되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따시와 파상은 나보고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능숙한 솜씨로 도시락을 펼친다. 반찬통 안에 각종 고기반찬이 들어있는 걸 보고 어제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본다. 부탄은 자기들의 불교문화를 지키기 위해 쇄국정책을 펴는데 고기는 어떻게 먹냐고. 따시는 의외로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자기들은 불교 신자기 때문에 결코 생명을 없애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대신 자기들이 키운 가축들을 인접국으로 보내 도축시킨 뒤 고기를 수입해 온다고 말한다. 따라서 한 번에 많은 고기를 얻어와 오랫동안 보관하기 때문에 신선한 고기를 선호하는 몇몇 사람들은 부탄에서 고기를 섭취하는 걸 꺼린다고.
부탄 여행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 02 - 구루 린포체 (Guru Rinpoche)
구루 린포체는 파키스탄의 스왓 계곡에 있는 우디야나(Uddiyana, 부탄어로는 Ugyen)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싯다르타가 두 번째 올 부처라고 예언한 인물이다. 부탄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로 746년에 부탄을 방문하면서 불교가 전래된다.
구루 린포체가 처음으로 방문한 지방은 붐탕(Bumthang)으로, 당시 붐탕의 왕인 신두 라자(Sindhu Raja)가 붐탕의 신이었던 셀징 칼포(Shelging Khalpo)를 분노시켜 죽음에 이르게 된 때였다. 신두 라자의 신하가 왕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구루 린포체를 데리고 오기로 결정했고, 구루는 왕의 생명을 구하고 쿨지 하캉(Kurjey Lhakhang)에서 명상을 한 뒤 그곳에 각인(body imprint)을 남긴다. 구루는 셀징 칼포를 물리치기 위해 왕의 딸과 결혼하는 척하며 그녀를 황금병을 들고 있는 다섯 명의 공주로 변화시킨다. 셀징 칼포는 이 광경을 보기 위해 흰 사자로 변했지만, 구루는 이를 알아보고 가루다(garuda)로 변해 그를 사로잡는다. 붙잡힌 셀징 칼포는 불교의 수호신이 되라는 구루의 제안에 동의하고, 구루는 쿨지 하캉에 자기의 지팡이를 꽂는다. 현재 붐탕의 쿨지 사원 앞에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구루의 지팡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에 구루는 부탄의 이곳저곳을 방문하면서 악마를 억누르고 그 자리에 사원을 짓는다. 대표적인 곳이 파로계곡의 탁상 굄바(Taktshang Goemba)로 그가 호랑이를 타고 악마인 싱기 삼드룹 (Singey Samdrup)을 물리친 장소다. 구루는 필요에 따라 여덟 개의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호랑이를 타고 도깨비 형태로 변화한 돌지 드롤로(Dorje Drolo)다. 부탄 불교의 가장 큰 종파인 닝마(Nyingma)의 창시자로, 부탄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사람이다.
악마를 억누르기 위해 지어진 키추 사원 (Kyichu Lhakhang)
점심을 먹고 남는 시간에 향한 곳은 키추 하캉(Kyichu Lhakhang)이다. 따시는 파로가 지겨워 오늘 일정을 마치려고 했지만, 난 키추 사원에 꼭 가고 싶어 시간도 남는데 들려보자고 말한다. 키추 사원은 부탄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지만, 부탄이 워낙 작은 나라라 사원의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다. 사원으로 향하는 길은 다채로운 색깔의 깃발들이 걸려있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걸 암시하는 듯했다. 따시는 이 사원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설명해준다. 티베트의 왕인 송첸 감포(Songtsen Gampo)가 659년에 부탄에 사는 악마를 억누르기 위해 하루 만에 108개의 사원을 지었는데, 키추 하캉은 악마의 왼쪽 발에 해당하는 곳에 지어진 사원이라고 말한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부탄 사람들이 사원을 따라 걸으며 벽에 있는 바퀴(Prayer Wheel)를 돌리고 있다. 따시는 나에게도 기도해보라고 말하며 반드시 시계방향으로 돌아야 한다고 넌지시 알려준다. 사원을 한 바퀴 돌고 먼저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구루 하캉(Guru Lhakhang)에 들어서니 5m 높이의 구루 동상이 보인다. 구루 린포체에 대한 부탄 사람들의 사랑은 대단하여 세 번째 국왕의 아내가 후원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조워 하캉(Jowa Lhakhang)으로, 7세기에 만들어진 조워 석가모니(Jowo Sakyamuni) 동상이 봉안되어 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파로 시민들을 위로해주며 인자하게 웃고 있는 부처의 모습은 불교신자가 아닌 나에게도 평안을 준다. 부탄의 어느 사원이든지 내부 촬영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 부처님의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파로 마을 탐방
따시는 파로 마을 한가운데 나를 내려주고 자유시간을 부여한 뒤, 오후 5시에 샴파카 카페 앞에 오면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염원하던 자유시간! 우선 파로 마을 한가운데 세워진 두 개의 사원을 보기로 한다. 드룩 최딩(Druk Choeding)과 최텐 하캉(Chhoeten Lhakhang)은 작은 사원이라 큰 볼거리는 없지만 가이드 없이 혼자 둘러보는 여행이라 탐험하는 기분으로 경내를 둘러본다. 최텐 하캉은 마치 탑처럼 세워진 사원으로 2층에 조워 석가모니와 구루 동상이 있다고 했지만, 굳게 잠겨있어 내부를 둘러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드룩 최딩으로 발걸음을 향하니 때마침 집회가 열려 스님들과 현지인들로 분주한 모습을 보여준다. 목조 계단 앞의 수많은 신발들을 피해 올라가니 한 승려가 가이드는 어디 있냐고 묻는다.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가이드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둘러봐도 되냐고 물어보니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하더니 마지못해 허락한다. 내부는 오래된 벽화들과 기도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부탄 사람들의 삶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사원들을 둘러보고 공사 중이라 분주한 거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작지만 매력 있는 기념품 상점들에는 오래된 우표와 부탄 사람들이 사용하는 불교용품, 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 골동품을 구할 수 있었다. 어딜 가든 마찬가지겠지만,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 물건들은 너무 비싸서 살 수 없고, 이 정도면 살 수 있겠다 싶은 물건들은 그다지 갖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 여행 초기니 붐탕(Bumthang)이나 팀푸(Thimphu)에 가면 더 좋은 기념품들을 살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빈 손으로 상점들을 나왔다.
파로 마을 중심부는 30분이면 다 돌아볼 정도로 작은 규모라 따시와 약속한 시간은 아직도 한참 남아있었다. 약속 장소인 샴파카 카페(Champaca Cafe)로 걸어가는데 수많은 개들이 왈왈 짖으며 나를 위협한다. 나는 무서워서 지나가기 너무 겁나는데, 파로 시민들은 별 신경도 안 쓰고 걸어 다닌다. 부탄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걸어가려고 했지만, 다른 생김새인 나는 다르게 대할까 봐 무서워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는 걸 선택한다. 고생 끝에 찾아간 샴파카 카페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아쉬운 건 간판에서 보이는 종카(Dzongkah, 부탄 언어)보다 훨씬 크게 써진 영어가 상징하듯 파로 마을의 카페 대부분은 외국인들이 찾는 곳이라는 것. 혼자 외롭게 앉아 페스트리 위의 아이스크림과 함께 믹스커피 맛이 나는 커피를 마신다. 방금 하이킹을 끝내고 온 듯한 중국인 여행객들, 패키지로 온 듯한 서양인들.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비슷한 나이의 여행객들조차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 서글퍼진다. 부탄 여행을 생각하고 있는 여행객들이라면 하나를 꼭 기억해야 한다.
"부탄은 배낭 여행자들의 천국은 절대 아니라는 것!"
부탄은 평안과 위로의 나라
약속 시간인 5시에 나가니 따시와 파상이 웃으면서 나를 맞아준다. 파로 시내 탐방이 어땠냐고.
"아무 특별한 것 없던데?"
내가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줬는지, 그들은 깔깔 웃으면서 나중에 수도인 팀푸에 가서 시티 라이프를 같이 즐기자고 말한다. 그래... 대답은 긍정적으로 했지만 내 고향 창원보다 적은 인구가 사는 부탄의 수도에서 즐기는 도시생활이 특별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부탄에서 기대한 건 왁자지껄한 도시 생활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평화와 위로니 포기할 건 포기해야지. 그나저나 이틀 동안 부탄을 여행하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대부분의 부탄 여행객들의 연세가 지긋하시다는 것. 은퇴하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여생을 아름답게 보내기 위해 노부부들이 택하는 곳이 부탄이라는 것.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위로가 웬 말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 내가 가장 원했던 것은 부탄이 줄 수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가 삶에서 항상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녀야 할 두 가지, 평안과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