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계곡에 숨겨진 이야기들

붐탕 계곡을 따라 걸으며 부탄의 '천일야화' 이야기를 듣다

by TOMO
다시 뚜벅이족으로

"오늘 차 없이 걷는 여행을 하는 건 어때?"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아침을 먹고 있으니 따시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양해를 구한다. 3일 내내 험난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운전하느라 힘들었던 파상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던 것. 부탄에 온 지 어느덧 일주일 째가 되었지만, 파상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배려를 안 한 내가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파상은 우리를 이곳저곳 데려다주고, 움직이지도 못 한 채 우리가 사원을 둘러볼 동안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며칠 연속으로 이어진 고된 운전은 파상에게 여러모로 많은 스트레스를 준 듯했다. 어딜 가든 뚜벅이족으로 여행하는 건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파상을 쉬게 할 겸 따시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한다. 이 둘은 정말 영혼의 파트너다. 따시는 마치 자기가 쉬는 것처럼 여러 번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었으니까.

뚜벅이족으로 걸으며 본 붐탕 계곡의 모습

숙소를 나와 걸으니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발전이 더딘 부탄에서도 붐탕은 현대문명의 때가 훨씬 덜 탄 것 같다. 소떼를 끌고 길 한가운데를 지나는 아저씨, 군데군데 아스팔트가 깨져 맨살이 드러난 흙길, 참카르 강 (Chamkhar Chuu)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는 아이들. 붐탕의 변화가 느린 건 부탄을 찾은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파로 (Paro), 팀푸 (Thimphu)를 비롯한 부탄 서부 지역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차를 타고 이동하기가 더욱 힘들어지자, 붐탕 (Bumthang)까지 애써 찾아가는 여행자들의 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여행자의 수가 적다는 건 굳이 개발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덕분에 붐탕을 여행하는 내내 부탄 현지인들의 삶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고, 사원 대부분을 나만 독차지할 수 있었다.

붐탕에도 조그마한 공항이 있다.

이 날의 도보 여행은 참카르 강의 동쪽에 있는 유적들을 둘러보고, 강을 건너 구루 린포체를 만나러 가는 일정이다. 붐탕을 대표하는 사원은 잠페이 하캉 (Jampey Lhakhang)쿨지 하캉(Kurjey Lhakhang). 붐탕 계곡의 동편과 서편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원은 붐탕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오래된 절들이다. 오랜만의 도보 여행으로 신나 있었기 때문에, 고찰(古刹)을 보기 전에 만난 모든 것들이 신비롭기만 하다. 잠페이 하캉으로 향하는 길엔, 스위스에서 온 프리츠 마우러 (Fritz Maurer)가 지은 스위스 팜 (Swiss Farm)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은 부탄 최고의 맥주라는 레드 판다(Red Panda)와 부탄에서 유일하게 상업용 치즈를 생산하는 상징적인 곳이다. 이른 시간이라 내부를 둘러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저녁에 레드 판다를 사서 마시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한다.

길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초르텐 (Chorten)

스위스 팜을 지나자 왼편에 바스팔라탕 공항 (Bathpalathang Airport)이 보인다.

"세상에, 붐탕에도 공항이 있었어? 진작에 말해주지!"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니 지옥길을 거치지 않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새삼 부러워져서 따시에게 투정을 부려본다. 부탄 여행 중 하루 종일 차에 앉아 이동만 하더라도 하루에 $250 내는 건 변함이 없다. 따라서 추가 비용을 내더라도 비행기를 타는 것이 오히려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길이 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아수라장이 된 왕두에-붐탕 로드를 경험하는 건 '정말' 한 번만으로 족하다. 따시는 보스인 소남 초르펠이 분명히 알려줬을 거라고 다시 한번 확인해보라고 말한다. 일정을 확인해 보니 붐탕으로 가는 길 상태가 '극히' 나쁘다고 강조해서 적혀있다. 실제와 글 사이의 괴리는 항상 존재한다. 게다가 글 한 문장으로 고집이 센 나를 납득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직접 겪어봐야 그 어려움을 깨닫는 나의 무지함은 지구 어딜 가든 변함이 없었다.

부탄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 08 - 뻬마 링파 (Pema Lingpa)

부탄에 불교를 전파한 구루 린포체 (Guru Rinpoche)는 수많은 경전을 부탄 곳곳에 남긴다. 그는 죽기 전에 후대에 텔톤(terton, 보물 찾는 자)들에 의해 그가 남긴 보물들이 발견될 것이라 예언한다. 뻬마 링파(Pema Lingpa, 1450-1521)는 닝마 종파의 위대한 다섯 텔톤 중 한 명으로, 구루 린포체가 숨긴 수많은 보물들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가 찾은 수많은 불경들과 보물들은 여러 사원에 흩어져 부처님의 가르침을 증명하고 있으며, 그가 창시한 춤은 쎄추(tsechu)를 통해 부탄 전역의 사원에서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느끼는 부탄의 문화가 뻬마 링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뻬마 링파는 붐탕의 탕 계곡 (Tang valley)에 있는 쿤장드락 굄바(Kunzangdrak Goemba) 주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철을 가공하는 기술을 배워 25살까지 대장장이로 일한다. 이때 만든 철갑옷은 땀싱(Tamshing) 사원과 땅비(Thangbi) 사원에 아직도 보관되고 있으며, 사원에 가면 그가 만든 갑옷을 실제로 입어볼 수도 있다.

뻬마 링파는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승려로부터 다끼니어(dakini)로 된 두루마리를 받는 꿈을 꾸게 된다. 두루마리를 해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이는 다끼니어의 한 단어가 세속의 언어로는 1000개의 단어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갖은 애를 쓴 끝에 영(Spirt, 臺)의 도움을 받아 이를 번역하는 데 성공한다. 두루마리는 탕 계곡 깊은 웅덩이에 구루 린포체의 경전이 숨겨져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고, 뻬마 링파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뻬마 링파는 그의 생애 동안 부탄에서 수많은 불상, 경전, 보물 등을 찾아냈으며, 티벳의 삼예(Samye)까지 건너가 보물 찾는 작업을 지속했다. 그가 찾아낸 보물들은 지금까지도 붐탕의 땀싱(Tamshing) 사원과 쿤장드락(Kunzangdrak) 사원을 비롯한 닝마 종파의 사원들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업적으로 뻬마 링파는 부탄 전역에서 존경받는 스승으로 대우받고 있으며, 부탄 사람들은 심지어 그를 구루 린포체가 환생하여 세상에 다시 온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영혼은 쿠(ku∙몸), 숭(sung∙가르침), 뚝(thug∙마음) 세 가지 형태로 나뉘어 환생하게 된다. 부탄에선 지금도 뻬마 링파가 환생한 세 명의 승려가 있으며, 부탄의 정신적 스승으로 여겨지고 있다. 뻬마 링파는 여섯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으며, 수많은 환생체로 부탄에 돌아왔다. 그의 손자 중 한 명인 걀세 뻬마 띤레이 (Gyalse Pema Thinley) 또한 뻬마 링파의 환생체로, 폽지카 계곡의 강테 굄바 (Gangte Goemba)를 세운 인물이다. 강테 트룰쿠 (Gangete Trulku)라 불리는 '마음'의 환생체는 걀세 뻬마를 시작으로 현재 1955년에 태어난 쿠엔장 뻬마 남걀 (Kuenzang Pema Namgayl)이 9번째로 그 대를 잇고 있다. 하지만 뻬마 링파의 자손 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 바로 현재 부탄 왕조를 잇는 '왕축 가문' 또한 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뻬마 링파 (Pema Lingpa). 구루 린포체의 것과 비슷한 모자를 쓰며 손에는 붐파(bumpa)를 들고 있다.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슬픔

길을 따라 걸으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사원은 콘촉섬 하캉 (Konchogsum Lhakhang)이다. 뻬마 링파 (Pema Lingpa)에 의해 15세기에 지어진 사원이지만 2010년에 버터 램프(butter-lamp)에 의해 불이 나 대부분이 타버리고 만다. 이후 피해를 입은 사원을 복구하는 대신, 사원을 새 건물 내부에 봉인하는 형태로 지었기 때문에 사원의 예스러움은 사라지고 화려함만 남아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남팔 남세 (Nampal Namse) 상이 한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비로자나불로, 부처님의 공덕을 다섯 속성으로 나눈 오지여래(五智如來) 중 대일여래(大日如來, 지혜와 법을 상징)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로자나불 오른쪽으로 1000개의 팔과 1000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Chenrezig) 상과 롱쳄 랍잠파(Longchem Rabjampa, 닝마 종파의 스승 중 하나)가 보인다. 왼쪽에는 구루 린포체 (Guru Rinpoche)뻬마 링파 (Pema Lingpa)가 서 있어 부처님을 비롯한 부탄의 위대한 인물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불상들이 모여있는 곳 앞에는 파손된 종이 보인다. 티벳이 붐탕을 침략했을 때 종을 훔쳐가려 했지만 너무 무거워서 들고 가는 걸 포기해, 길 위에 내팽개친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불에 그을린 본당 건물과 깨져있는 종을 보니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그 이면엔 너무도 아픈 역사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새로 지어진 사원 벽에는 다시는 슬픔을 겪지 말라는 듯 화려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사원의 오래된 벽을 따라 걸으며 한 바퀴 돌며 짧은 기도를 올린다. 다시는 아픔을 겪지 말라고 기원하며.

부탄에서 가장 화려한 콘촉섬 하캉 (Konchogsum Lhakhang)
뻬마 링파의 성지, 땀싱 굄바

부탄 불교에서 가장 큰 종파는 겔룩빠(Gelukpa)지만, 적어도 붐탕에서는 닝마(Nyingma) 종파가 대세다. 닝마를 창시하고 이끈 뻬마 링파가 붐탕 출신이라 그런지, 타지방에선 보기 힘든 닝마 사원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땀싱 굄바(Tamshing Goemba)는 붐탕 계곡을 포함한 부탄 전역을 대표하는 닝마 사원이다. 1510년에 뻬마 링파 (Pema Lingpa)에 의해 지어졌으며, 오래된 건물 내부엔 수많은 불상들과 보물들이 봉안되어 있다. 닝마 사원이라 그런지 생김새도 예사롭지 않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스님들의 거주처가 있는 마당이 보이고, 마당 뒤편으로 일반적인 모습과 다른 이층 사원이 보인다. 절은 외벽과 구별 없이 이어진 형태로 되어있으며, 돌을 쌓아 만든 벽 군데군데 심어진 붉은 돌은 종카(dzongkha, 부탄에서 쓰이는 주 언어)가 쓰여 있어 더없이 친근하다.

땀싱 굄바 (Tamshing Goemba)

하지만 사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관이 아니라 사원 내부 구조와 오래된 벽화들을 비롯해 부탄의 전설적인 인물들을 상징하는 동상이다. 사원에 들어가면 마치 건물 안에 또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입구로 들어서면 강당이 나오고 그 가운데 신들이 모셔진 본당(本堂)이 있는 것이다. 본당 내부엔 뻬마 링파의 세 가지 환생체를 위한 성좌가 있으며, 특별한 날에는 세 명의 승려가 각각의 자리에 앉아 행사를 주관한다고 한다. 사원이 품고 있는 보물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구루 린포체를 둘러싼 잠파(Jampa, 미륵불)석가모니불이다. 이 불상들은 뻬마 링파와 함께 활동한 칸드로마(khandroma, 인간이지만 신적인 존재를 지칭)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단 위의 막사라(maksaras, 전설에서 전하는 악어)가루다 (garuda)가 신들을 수호하고 있고, 불상들을 둘러싼 벽에는 구루 린포체의 여덟 가지 형태가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어 이 곳을 성스럽고 신비로운 장소로 만들고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강당이 한눈에 보이는 발코니가 보이는데, 무릎을 굽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낮다. 사원을 지은 뻬마 링파의 키가 작아서 이 정도 높이면 충분했다고. 이층에 있는 또 다른 회당 안에는 아미타불을 비롯해 쎄추(tsechu)에 쓰이는 수많은 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사롭지 않은 생김새의 사원

어두컴컴한 땀싱 사원에 들어갔다 나오니 마치 신들의 세계에 다녀온 기본이 들었다. 구루 린포체와 부처님을 비롯해 그들을 수호하고 있는 동물들, 마치 튀어나올 것처럼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벽화들. 오래된 목재들이 풍기는 특유의 향기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버터 램프들. 성수를 부어주며 나에게 축복을 해 준 스님. 부탄에서도 머나먼 여정 끝에 찾을 수 있는 땀싱 사원은 속세에서 벗어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안식처였다. 비 오는 날 구름으로 뒤덮인 석굴암을 찾을 때 느낄 수 있는 신성함이랄까.

땀싱 사원이 자랑하는 벽화와 사원을 둘러싼 외벽
붐탕에서는 길가에 서 있는 초르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길

붐탕 계곡의 오른편이 뻬마 링파가 중심이 된 닝마(Nyingma)라면 계곡 건너편엔 구루 린포체가 중심인 겔룩빠(Gelugpa)가 펼쳐진다. 다리를 건너가는 길엔 또 다른 전설이 숨어있다. 한 여신이 구루 린포체를 만나기 위해 강 위에 돌다리를 만들었는데, 이를 시기한 붐탕의 악마가 다리를 부숴버린 것. 따시는 다리 아래로 깨진 돌들의 흔적을 보여주며, 붐탕은 수많은 전설들이 전해지는 아름다운 땅이라고 강조한다.

붐탕 계곡의 아름다운 모습
룽다르로 뒤덮힌 다리를 건너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오직 구루 린포체 그를 위한 사원, 쿨지 하캉 (Kurjey Lhakhang)

계곡을 넘어가자 3층으로 된 절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땀싱 사원과 달리 특별할 것 없는 외관에 실망하려는 찰나, 여기가 신성한 곳이라고 알려주는 오래된 벽들과 알록달록한 종카가 쓰인 바위가 보인다. 영겁의 세월을 거친듯한 벽 내부엔 사람들의 염원이 적힌 듯한 돌들이 빼곡히 박혀있다. 인상적인 벽을 빼면 평범해 보이는 사원인데 이 곳에 꼭 들러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부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면, 아이돌보다 더 유명한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욘사마가 겨울연가를 찍었다고 일본인들이 춘천을 찾는 것처럼, 부탄 사람들은 구루 린포체의 흔적을 좇기 위해 쿨지 하캉 (Kurjey Lhakhang)으로 온다.

쿨지 하캉은 사원 건물보다 건물들을 둘러싼 벽들이 환상적이다
알록달록한 종카가 쓰여진 바위

사원의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쿨(kur)은 '몸'을 뜻하고 지(jey)는 '흔적'을 뜻하는데, 이 곳에 구루 린포체가 동굴에서 명상을 하면서 찍힌 그의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절은 오른쪽에 있는 구루 하캉 (Guru Lhakhang)으로, 1652년에 트롱사의 펜롭이었던 밍유르 텐파(Mingyur Tenpa)에 의해 지어졌다. 처마 밑에는 가루다가 하얀 사자와 붙어 있는데, 이는 구루 린포체(가루다)가 악마였던 셀징 칼포(사자)를 물리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1층은 스님들이 거주하는 공간이고, 2층에는 자신의 죄를 놓고 온다는 좁은 바위길이 보인다. 3층은 사원 전체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오직 구루 린포체를 위한 공간이다. 왼쪽 벽에는 1000개가 넘는 작은 크기의 구루 린포체 동상 가운데 구루 린포체, 뻬마 링파, 따라(Tara, 보살)가 서 있다. 성전 한가운데에는 역시나 구루 린포체와 그의 여덟 가지 형상을 비롯해 여덟 개의 초르텐이 보인다. 제단 뒤로는 그가 명상을 수행했다는 동굴이 있으며, 성전의 벽화는 구루 린포체와 그를 수행한 25명의 제자들을 그려내고 있다. 사원 뒤편의 사이프러스 나무는 구루 린포체가 들고 다니던 지팡이라고 하니, 이 곳은 성지 중의 성지가 될 수밖에 없다.

사원은 세 개의 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원의 두 번째 절은 부탄의 첫 번째 왕이었던 우겐 왕축 (Ugyen Wangchuck)에 의해 1900년에 지어진 삼파 룬드룹 하캉 (Sampa Lhundrup Lhakhang)이다. 사천왕을 비롯해 구루 린포체에 의해 신이 된 악마들을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 곳의 상징 또한 구루 린포체로, 무려 10m가 넘는 그의 동상이 가운데에 서 있다. 가장 최근에 지어진 절은 1984년에 세 번째 왕비였던 아시 케상 왕축 (Ashi Kesang Wangchuck)에 의해 지어졌다. 그녀는 절을 둘러싸고 있는 108개의 초르텐을 함께 지으며 쿨지 사원을 성역화하는데 힘썼다. 왕족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며 구루 린포체의 축복을 받기 위해 애쓴 것처럼, 부탄 사람들도 자신들이 죽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이 먼 붐탕까지 와서 그를 만나고자 한다. 이슬람교도들이 생애 한 번은 메카와 메디나를 방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현재 국왕도 구루 린포체의 명성을 넘어설 수 없다. 잠시 부탄에 왔다가 사라지는 사람들과 달리 구루 린포체는 부탄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을 위로하고 지켜주는 수호신이기 때문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오래된 절들인 쿨지 하캉 (Kurjey Lhakhang)
쿨지 사원을 둘러싼 108개의 초르텐
쿨지 사원과 가까운 곳에 있는 장토 펠리 하캉 (Zangto Pelri Lhakhang)
나무에 화살을 꽂아버리다

초원이 펼쳐진 붐탕 평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길은 너무나 아름다워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인적조차 찾기 어려운 이 평화로운 길을 따라 걸으며 도대체 내가 왜 이 먼길까지 왔나 자책한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고난과 역경 뒤에는 반드시 행복이 온다'는 말이 진실이었다는 걸 깨달으며 만족하고 있는데, 따시가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을 들려준다.

"오늘 점심은 부탄 농가에서 주민들과 함께 현지 식사를 먹을 거야"

활동 반경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부탄에서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다. 파로에서 친구들을 사귄 이후로 새로운 인연을 한동안 만나지 못 한 지금, 따시의 말은 더욱 반갑게 들려온다.

붐탕 평원을 가로질러 가는 평화로운 길

부탄의 농가에 들어가 앉아있으니 농민들이 정성껏 준비한 식사가 나온다. 집에 살고 있는 가족들도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이미 점심을 먹은 상태다. 따시는 어차피 영어를 못 해 대화하기 어렵다며 나를 위로해준다. 하긴,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대신 부탄의 현지 식사가 얼마나 맛있는지 느껴본다. 양념에 버무린 고기도 맛있었지만, 수많은 고추로 뒤덮인 부탄 음식에 더 손이 간다. 이 곳이 아니면 다시는 느껴볼 수 없는 맛인 데다, 이 시간이 아니면 다시는 접하지 못할 경험이기 때문이다. 점심식사를 배불리 먹고 농가 옆에 있는 마당으로 가서 며칠 만에 다시 활을 잡는다. 이번엔 뭔가 제대로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니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내 손을 떠난 화살은 과녁을 향하기는커녕 뒤편의 나무 높은 곳에 가서 박힌다. 따시는 며칠 전과 다름없는 나의 형편없는 활 솜씨를 비웃으며 나무 위로 올라가 박힌 화살을 빼낸다. 에휴, 부탄에 만약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활 쏘는 연습을 엄청 해야겠다. 따시는 나를 보고 한국인들은 활을 못 쏜다는 편견을 가졌기 때문이다.

농가에서 먹은 현지 식사
너무 세게 시위를 당겨 내 화살은 나무 저 높은 곳에 꽂혀버렸다. 화살을 가지러 나무 위로 올라간 따시.
붐탕의 가장 오래된 사원, 잠페이 하캉 (Jampey Lhakhang)

파로에 키추 하캉(Kyichu Lhakhang)이 있다면, 붐탕에는 잠페이 하캉(Jampey Lhakhang)이 있다. 티벳의 왕이었던 송첸 감포 (Songtsen Gampo)에 의해 659년에 지어진 사원으로, 키추 사원과 마찬가지로 악마를 억누르기 위해 지어진 108개의 절 중 하나다. 키추 사원은 악마의 왼쪽 발 위에, 잠페이 사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지어졌다. 잠페이 사원 또한 구루 린포체의 성지 중 하나로, 그가 붐탕에 왔을 때 들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잠페이 사원의 노란 지붕과 오래된 외관이 아름답다.

사원 내부로 들어가면 세 개의 돌계단이 보이는데, 각각의 계단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를 상징한다고 한다. 첫 번째 계단은 석가모니 부처를 의미하고 있으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점점 내려와 바닥과 같은 높이를 이루고 있었다. 두 번째 계단은 현재의 부처를 의미하는데, 이 계단마저 지상으로 내려오게 되면 신들이 인간과 분간되지 않게 되며 현재와 같은 세상은 끝이 난다고 한다. 계단을 지나면 사원의 가장 오래된 보물, 아니 부탄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잠빠(Jampa, 미륵불)를 만날 수 있다. 잠빠를 만나러 가는 문 오른쪽에는 뻬마 링파가 대장장이 시절 만든 철갑옷이 보인다. 따시는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 갑옷을 입고 성소를 세 바퀴 돌아보라고 한다. 뻬마 링파의 손길이 느껴지는 성스럽고 무거운 갑옷을 걸친 상태로 걸으며, 번뇌를 떨치고 부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를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따시는 나를 데리고 미래에 오실 부처님을 소개한다. 불상은 지금까지 본 부처님들과 사뭇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불상과 달리 머리가 크고, 인자하기보다 옆집 아저씨처럼 포근한 인상을 준다. 미래에는 신과 인간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따시는 잠뻬이 사원의 역사와 중요성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며, 성소 벽에 그려진 오래된 벽화를 보여준다. 벽에 그려진 부처님들을 보면서 코라(kora, 성물 주변을 도는 행위)를 하니 마치 부탄 사람들처럼 부처님의 영험한 기운을 받은 느낌이 든다.

문에 새겨진 문양이 너무도 아름답다
사원 뒤의 붐탕 계곡과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잠페이 하캉(Jampey Lhakhang)은 구루 린포체가 부탄에 오기 전에 지어진 사원이라, 구루 대신 미륵불이 모셔진 본당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구루 린포체라면 환장하는 부탄 사람들이 부처님만 혼자 있게 내버려 둘리가 없다. 우겐 왕축(Ugyen Wangchuck)은 원래 있었던 절 북쪽에 두코르 하캉 (Dukhor Lhakhang)을 지었고, 붐탕을 다스리던 치미 돌지 (Chimi Dorji)는 남쪽에 구루 린포체를 모시는 구루 하캉 (Guru Lhakhang)을 세웠다. 절 이름만으로 안에 누가 있는지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구루 린포체를 향한 부탄 사람들의 애정은 변함이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잠페이 사원 주변을 따라 돌고 있는 부탄 사람들

잠페이 사원에서는 절뿐 아니라 거대한 초르텐(chorten)도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일찍 부처님 곁으로 돌아간 두 번째 왕의 동생을 기리기 위해, 다른 하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왕의 영적 조언자였던 라마 펜첸 켄포 (Lama Pentsen Khenpo)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새로 지어진 건물과 높게 지어진 초르텐에 둘러싸여 10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닌 본당은 사원 내부로 들어서기 전엔 코빼기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딩 숲에 파묻힌 서울의 궁궐들과 비교할 때, 잠페이 사원에서 위화감을 느낄 수 없는 건 새로운 건물들 또한 부탄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며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본당과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듭난 잠페이 하캉을 보니, 강남의 선정릉(宣靖陵)이 푸대접받고 있는 현실이 떠오른다. 선정릉은 수백 년의 세월을 버텨온 조선왕실의 보고(寶庫) 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동안 삼릉공원으로 격하되어 회사원들이 아무 감흥 없이 산책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부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잊는 건 말이 안 된다. 높은 빌딩을 짓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의 정신과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없는 것일까. 외벽을 따라 걸으며 기도 바퀴 (prayer wheel)를 돌리는 부탄 사람들이 존경스러운 이유는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서 꿋꿋이 서 있는 부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잠페이 사원처럼 부탄의 고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사원 주변을 따라 걸으며 기도 바퀴를 돌려본다. 부탄 사람들과 같이.

땀싱 사원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숨겨진 보물인 참카르 하캉 (Chamkhar Lhakang)을 마지막으로 붐탕 계곡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참카르 사원은 부탄의 일반 주택처럼 단출한 건물이지만, 원래 인도의 왕이었던 신두 라자(Sindhu Raja)가 철로 만든 궁전이 있던 곳이다. 그는 구루 린포체를 붐탕으로 초대하며, 자신의 딸인 따시 케우도엔(Tashi Khewdoen)을 그의 아내가 되게 한다. 사원 내부에서 구루 린포체 동상 옆에 그녀가 함께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축제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모습의 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절들이 각자가 품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품고 있지만, 하루라는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걸 들을 수가 없기에 따시와 나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붐탕의 시내, 자카르로 향한다.

붐탕의 숨겨진 보물 차카르 사원 (Chakhar Lhakhang)


부탄의 '천일야화', 붐탕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두 단어는 몰라도 알라딘, 신밧드, 알리바바는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알라딘과 요술램프 요정 지니 이야기는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할 정도였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모두 천일야화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 일부이다. 그럼 왜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천일야화'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천일야화'에선 왕비의 외도 때문에 여성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술탄이 등장한다. 그는 왕비가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후, 앞으로 여자들과는 하룻밤만 동침하고 죽이기로 마음먹게 된다. 외도를 보지 않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딸을 가진 집에서 가족을 잃어 슬퍼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자 대재상의 딸이었던 셰에자라드는 나라의 여인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에 자청해서 술탄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결혼한 이후 1001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술탄에게 매일 밤마다 끊임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술탄은 그녀의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진 나머지, 자신의 결심이 무엇인지 망각하고 만다. 왕비의 지혜에 감탄한 술탄은 악행을 멈추고 남은 생애를 그녀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디즈니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알라딘>

붐탕 계곡을 한 바퀴 돌면 마치 '천일야화'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탄의 전설이 너무도 흥미로워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붐탕 계곡은 마치 셰에자라드 왕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만든다. 왕비가 술탄의 악행을 멈추게 한 것처럼, 송첸 감포, 구루 린포체, 뻬마 링파 등 부탄의 역사에서 아직도 살아있는 인물들은 부탄의 악마들을 물리치고 히말라야 산맥 작은 나라에 극락(極樂)을 만들었다. 하루 종일 붐탕 계곡을 따라 걸으며 사원의 전설과 보물들을 찾게 되니, 나도 술탄처럼 내가 하던 일을 잊고 영웅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며 행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은 굳이 붐탕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 파로, 푸나카, 팀푸만으로도 부탄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붐탕은 수많은 역경을 거쳐서 올 만큼 멋진 곳이다. '천일야화'의 술탄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탄의 전설을 들으며 나쁜 기억을 잊을 수 있는 망각의 계곡이니까.

붐탕의 사원들을 탐방하면 마치 '천일야화'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붐탕 시내 탐방

따시는 붐탕 시내에 들어서니 나에게 한 시간 남짓한 자유 시간을 선사한다. 파로보다 작은 마을이지만 훨씬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귀띔을 해준다. 마을에 들어서니 붐탕 출신의 아름다운 왕비를 자랑하듯, 대문짝만 한 5대 왕과 왕비의 사진이 서 있다. 작은 규모의 마을 곳곳에 확실히 눈에 띄게 예쁜 아가씨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부탄의 다른 지방과 달리 자유롭게 꾸미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놀랍다. 심지어 대낮에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아가씨도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왕비만큼 아름답지만 너무도 자유분방한 붐탕 여성들의 모습에 놀라 한 기념품 가게로 숨기로 결심한다.

붐탕 시내

'Dragon Handicrafts'라는 간판을 건 가게로 들어서니, 지금까지 봐왔던 부탄의 수공예품과 더불어 트렌디한 기념품들도 눈에 띈다. 부탄의 우표들을 모은 책, 부탄의 명소들을 손으로 직접 그린 엽서, 고(Gho)나 키라(Kira)를 입고 있는 조그만 인형들. 친절한 주인아저씨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나에게 마음껏 사진을 찍으며 구경하라고 말한다. 나를 데리고 자물쇠로 잠긴 진열장을 열더니, 부탄의 초대 왕이 입었던 고(Gho)를 보여주기도 한다. 상상하기도 싫은 도로 공사 때문에 붐탕까지 찾아오는 외국인들을 보기가 힘들다고 불평하면서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다.

붐탕의 기념품 가게, 드래곤 핸디크래프트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많이 봤는데 한국인을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인 거 같네요. 조금만 빨리 왔으면 훨씬 싸게 여행할 수 있었을 텐데."

"아 그래요? 한국인들만 싸게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이 우표를 봐요. 올해가 한국-부탄의 수교 30주년이라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죠. 부탄 정부는 올해 특별히 한국인들에게만 파격적으로 여행 비용을 깎아줬어요."

"어? 그런데 전 할인 혜택을 거의 못 받았는데요..."

"부탄 정부가 열심히 돈 벌어야 할 성수기에 혜택을 주겠어요? 6월에서 8월 사이 비가 무진장하게 오는 때에만 깎아준 거지 뭐."

드래곤 수공예품 가게의 주인 아저씨와 함께

아저씨랑 이야기하고 있으니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아이가 걸어 나온다. 주인아저씨의 두 번째 아이는 아저씨의 품에 안겨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아저씨는 가족이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붐탕에서 장사를 하면서 평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저런, 아름다운 여성들뿐 아니라 붐탕은 멋진 남자들도 살고 있는 곳이었구나. 붐탕의 자랑거리는 오래된 절들과 전설만이 아닌 것 같다. 계곡 옆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니, 요 며칠 동안 내내 불평만 한 내가 부끄러워진다. 시련을 겪으며 올 만큼 붐탕은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적인 곳이었으니까.

카페 펄크 (Cafe Perk)
카페 펄크에서 먹은 샌드위치와 커피

가게를 나와 밤에 마실 레드 판다(Red Panda, 부탄의 맥주)를 구입하고 2층의 카페에 들어간다. 붐탕 답게 손님 한 명 없는 조용한 공간이다. 호텔에 가면 저녁식사를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샌드위치와 감자튀김, 커피를 주문한다. 여행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익숙한 일상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재미있게 놀더라도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심취해 있더라도, 매일 보는 가족들이 오히려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붐탕 계곡 너머로 저물어가는 해 질 녘을 보는 시간도 그랬다. 일과를 마치고 가끔씩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사색하던 때가 사무치게 그리워진 시간. 3시간 앞서 해가 진 한국 땅의 평범한 일상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가져온 책을 꺼내 페이지를 넘긴다. 망각의 계곡인 붐탕에서도 익숙했던 기억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 걸 깨달으며.


이미지 출처: https://azaleasdolls.deviantart.com/art/Arabian-Nights-Scene-Maker-70626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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