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왔던 길을 다시 돌아보다

한 번 들린 길을 다시 보면 미쳐 못 봤던 것들이 보이는 법

by TOMO
지옥, 천국, 그리고 다시 지옥으로

전 날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온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어릴 때 치과 의사의 진료를 떨면서 기다리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지옥 같은 왕두에-트롱사 로드에 다시 오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틀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흙탕물로 고여있는 웅덩이만 없다면 울퉁불퉁한 길에서 내 허리에 가해지는 고통만 참으면 된다.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지만, 붐탕으로 올 때와 다른 맑은 날씨를 보니 가는 길은 편할 수도 있을 거라는 착각이 든다.


하지만 붐탕을 벗어나 공사가 진행 중인 도로에 접어드니 내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확실히 길 상태는 붐탕으로 올 때보다 나았지만, 그동안 고통이 가해진 허리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수많은 돌덩이들 위를 오르고, 움푹 꺼진 웅덩이를 지나니 내 허리에 계속해서 무리가 가해진다. 온갖 생각이 다 들며 허리를 움켜쥐며 따시에게 불평한다.

"아니, 왜 도로공사를 전구간에 걸쳐서 하는 거야? 언제쯤 끝마칠 수 있는 거고?"

"부탄 정부는 원래 2017년 말에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인도 건설 회사의 수완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지."

"그럼 넌 언제쯤 공사가 끝날 거라고 생각해?"

"아마.. 2020년쯤?"

부탄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들, 아니 붐탕에 가려고 하시는 분들은 꼭 한 번 비행기를 타는 것을 추천한다. 똑같은 고통을 느끼는 건 한 번으로 족한 것 같으니 말이다.

IMG_6630.JPG 다시 트롱사 마을로 돌아왔다
부탄의 왕실 유산을 만나러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 다시 트롱사로 돌아왔다. 붐탕으로 가는 길에 트롱사 종(Trongsa Dzong)을 들린 뒤, 트롱사 타워도 둘러보려고 했지만 당시 정전이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들리게 되었다. 트롱사 타워 (Tower of Trongsa Royal Heritage Museum)는 트롱사 종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위치해있다. 오래된 외관과 달리 망루 내에는 현대식으로 잘 꾸며진 전시실과 부탄의 오래된 보물들이 보인다. 5층에 걸쳐 전시된 보물들을 보는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다양한 주제들에 맞게 전시된 유물들을 보니, 부탄 왕실과 불교문화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진다. 부탄 왕족의 오래된 재킷과 넷째 왕이 썼던 축구화를 비롯, 왕실에서 사용한 유품들을 보며 부탄 왕국을 이끌고 있는 왕축 가문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다. 왕실의 유품뿐 아니라 오래된 불상과 불화도 전시되어 있어 부탄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깊이와 조예를 느낄 수 있다. 부탄의 수많은 사원들이 불교 예술품들을 보관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비공개인 상태다. 구루 린포체를 비롯한 부탄 성인들의 발자취를 눈과 귀로 확인하고 싶다면 트롱사는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어제 들린 우겐 촐링 궁전(Ogyen Choling Palace)이 부탄 국립민속박물관이라면, 트롱사 타워(Tower of Trongsa)는 부탄 국립중앙박물관인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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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롱사 타워 왕실 유산 박물관 (Tower of Trongsa Royal Heritage Museum)
연인 같은 여행지

며칠 전에 묵었던 양킬 리조트 (Yangkhil Resort)에서 트롱사 종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는다. 맑은 날씨의 트롱사 종은 붐탕으로 올 때와 사뭇 달랐다. 구름으로 뒤덮혀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날씨 속의 요새는 푸른 하늘 밑에서 자기의 진가를 드러내는 듯 했다. 같은 장소라도 날씨, 계절, 시간에 따라 제각각 다른 매력을 주는 건 어딜 가든 변함이 없다. 태국을 여행할 때 한 네덜란드 부부를 기차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방콕에서 출발해 아유타야, 수코타이를 거쳐 람팡으로 가는 길이었고, 부부는 치앙마이로 가고 있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내가 아유타야수코타이의 아름다움에 대해 예찬을 하자, 아저씨는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우리 부부에게 태국 모든 곳이 아름다워요. 그래서 우리 부부는 4주 동안 네덜란드에서 열심히 일하고 1주일은 태국에서 보내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어요."

"와, 다른 나라는 안 가고 태국만 여행하시는 거예요?"

"우리 부부도 우리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어쩌겠어요. 우리에겐 태국이 지상낙원인 걸. 치앙마이도 이번이 몇 번째 들리는 건지 몰라요. 그래도 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는 거 아니겠어요?"

당시엔 매번 똑같은 곳만 가면 질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일본 여행을 열 번 넘게 한 내 모습을 보면 결국 나도 아저씨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교토만 네 번을 여행했음에도 다시 교토에 방문하고 싶은 내 모습을 보면, 나에게 치앙마이란 다름 아닌 교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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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킬 리조트 (Yangkhil Resort)

트롱사를 바라보며 여행의 추억을 끄집어내니, 부탄 여행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네덜란드 아저씨에게 치앙마이, 나에게 교토인 것처럼 부탄도 다른 사람들에게 연인 같은 여행지가 될 수 있을까. 계절의 변화가 다양한 교토, 트렌디한 문화가 도시 자체를 변화시키는 치앙마이와 달리 부탄은 다른 곳보다 시계가 천천히 흘러간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겨울에 가도 부탄의 눈 쌓인 마을을 발견하기 힘든 요즘, 변화가 없으면 부탄을 다시 한번 찾기가 망설여질 것 같다. 물론 지옥 같은 도로 공사가 마무리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점심을 먹고 나오니 흙탕물로 더러워진 차를 물로 씻어내고 있는 따시와 파상을 만난다. 깨끗해진 어벤자의 모습을 보니 공사가 끝난 뒤 깔끔해진 부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부탄도 누군가에게 연인 같은 여행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IMG_6693.JPG 지옥길을 건너 온 후 재충전의 시간
돈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부탄에는 전 세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법이 있다.

"부탄의 국토 60% 이상은 반드시 숲이어야 한다."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어서일까. 부탄 정부는 전통적으로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희귀한 벵골 호랑이, 눈표범 (snow leopard), 검은 꼬리 두루미 새 (black-necked crane), 코끼리 같은 동물들을 부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부탄의 산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전 세계 인구 20%가 사용하는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나무로 뒤덮인 국토는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부탄 정부는 자연을 보호하는 목표 이외에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 줄 권리도 있다. 의료와 교육을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하지만, 국가 기반 시설이 부족하면 국민들의 고단한 삶을 덜어주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부탄 같은 농업국가가 돈을 가장 쉽게 버는 법은 관광업이다. 네팔은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완전히 개방했지만, 부탄은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제한적인 여행만 허용했다. 덕분에 부탄의 제1산업은 관광업이 아니라 전력 생산이 되었다. 높은 지대를 이용해 곳곳에 댐을 건설하여 만들어지는 전기를 인도로 수출해 돈을 버는 것이다.


트롱사에서 폽지카(Pobjikha)로 가는 길 아래를 내려다보면 숲을 파헤치는 공사가 한창이다. 너무도 안타까워 따시에게 물어보니 인도 건설 회사가 댐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란다. 수력으로 생산되는 전기를 인도로 수출해 돈을 벌기 위해서 부탄 정부가 벌이는 사업이라고 한다. 자신들의 불교문화는 지키고 싶고, 공장을 짓거나 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고, 국민들에게 복지 혜택은 제공해야 하는데 돈은 없다. 돈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너무나 와 닿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부탄 정부가 숲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있는 모습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자연이 파괴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부탄 정부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세계 어느 곳을 여행해도 똑같은 모습을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과 자연은 절대 공존할 수 없다는 현실의 벽이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니 너무도 슬펐을 뿐이다.

IMG_6765.JPG 부탄의 계곡 또한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헤쳐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부탄의 아름다운 자연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폽지카 계곡 (Pobjikha Valley)이다. 붐탕에서 트롱사를 지나 이 곳까지 하루 종일 달려 도착하니 어느덧 들판 위에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고개를 넘어 처음 본 폽지카 계곡의 풍경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 한가운데 넓디넓은 평원이 있고, 그 가운데를 나끼 강 (Nakey Chuu)이 흐르고 있었다. 따시는 여행을 하면서 내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폽지카 계곡과 사랑에 빠질 거라고 여러 번 이야기하곤 했다. 인적도 없는 어두컴컴한 평원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내일이 되면 폽지카 계곡을 안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탄 곳곳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인해 파괴되고 있지만, 적어도 폽지카 계곡만은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청정한 계곡 한가운데서 수많은 검은 꼬리 두루미 새 (black-necked crane)들의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연을 보존하고자 하는 부탄 정부에게 응원을 해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자드(ZARD)의 '지지 말아요(負けないで)'란 노래를 들으며 위로를 받는 것처럼.

IMG_6883.JPG 환상적인 폽지카 계곡 (Pobjikha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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