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탄의 푸나카에서 유럽 못지않은 건축 여행을 즐길 수가 있다
불타버린 요새의 흔적
구름으로 뒤덮인 산골 마을. 이제는 지겨울 법도 한데 매일 보는 풍경이 항상 새롭게 느껴진다. 며칠 전에 호텔에서 묵으며 본 풍경이지만, 아침 햇살을 받은 푸낙 창 강 (Punak Tsang Chuu)과 황금빛 계단식 논의 조화는 언제 봐도 멋지다. 하지만 부탄 사람들에겐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이라 아무 감흥이 없을 것이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아파트 숲으로 뒤덮인 도시에서 쳇바퀴 도는 삶을 사는 것과 똑같은 느낌일까. 따시가 한국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따시는 고층 건물로 도배된 서울의 모습과 부산 광안대교의 야경 등을 보니 너무도 신기해하며 한참을 쳐다보았다. 이런 삭막한 도시는 한국∙중국∙일본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라고 말했지만, 내 사랑스러운 부탄 친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넘겼다. 행복의 기준이 개인마다 다른 것처럼,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사람들이 갖는 생각과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다양성을 느끼는 데서 오는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관점을 떠올리는 시간은 언제나 짜릿하다.
붐탕에 다녀온 이후로 따시도 내가 매일 아침에 산책을 나가는 걸 안다. 얼마 전 내가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다가, 아침 산책 중 만난 부탄 친구들과의 만남을 들켜버린 것이다.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매일 아침마다 가이드 없이 무작정 밖에 나가 마치 자유여행인 양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내가 멋대로 행동한 것이 따시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행객이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가이드가 제재를 받을 수 있는 건가?"
"처음 정해 준 일정을 벗어나면 나를 위해 애써준 여행사의 영업에도 영향을 끼칠까?"
짧은 순간이지만 머리 속엔 온갖 걱정이 떠올랐고, 따시가 무슨 말을 할지 겁이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따시는 웃는 얼굴로 부탄 친구들을 만난 내가 대견스럽다고 말한다. 자기도 모르는 숨겨진 사원을 들린 것도 신기하다고, 나 같은 유형의 여행객은 처음 봤단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따시에게 내가 아침에 혼자 다녀도 상관없는지 허락을 구했다.
"아침에 내가 혼자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야? 너한테 피해를 끼치는 건 아니지?"
"걱정 마. 네가 사고만 안 치고 조용히 돌아다니면 돼. 오히려 부탄의 숨겨진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홍보해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다행이다. 이제 아침에 따시에게 말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지도를 확인해보니 로베사 마을에서 왕두에 포드랑 (Wangdue Phodrang)까지 거리는 6km 정도였다. 왕복으로 다녀오기엔 약간 먼 거리인 것 같으니 당당하게 내 요구사항을 말했다. 아침에 왕두에 포드랑까지 산책 갈 테니 전화하면 날 데리러 오라고. 뻔뻔하기 짝이 없는 부탁에 따시와 파상은 어이없어하며 웃는다. 이제 둘도 나에 대해 웬만큼 파악했기 때문에 흔쾌히 허락해줬다. 대신 팀푸에 입성하게 되면 꼭 맥주를 대접하라는 말과 함께.
로베사 마을에서 왕두에 포드랑 (Wangdue Phodrang)으로 향하는 길 왼편으로 왕두에 포드랑 신도시가 보인다. 부탄 정부는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대처로 구도시 주변에 아무 매력 없는 신도시를 계획하고 만들고 있다. 오래된 도시들은 개발이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골목들이 무질서하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반면, 새로운 도시들은 구획이 나뉘고 공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보기엔 깔끔해 보이고 살기에도 좋아 보이지만, 아무런 색깔이 없는 신도시는 여행자들에게 외면받기 쉽다. 강 건너편에 손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곳이지만 못 들렀다고 해서 전혀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폐허가 된 구도시가 나를 계속 애타게 찾는 느낌이 들었다.
왕두에 포드랑 (Wangdue Phodrang)은 부탄에서 지금까지 들린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1,280m에 위치한 마을이다. 부탄 건국의 아버지인 샵드룩 응아왕 남걀 (Zhabdrung Ngawang Namgyal)이 강가에서 놀고 있던 왕디 (Wangdi)라는 아이를 만난 뒤, 이 지방을 관할하는 종(Dzong, 요새)의 이름을 '왕디의 성'이라는 뜻의 왕두에 포드랑으로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원래 구시가는 왕두에 포드랑 종으로 향하는 입구를 따라 들어서 있었지만, 2012년에 일어난 큰 화재로 마을 전체가 불타버린 뒤 신시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이주했다고 한다.
얼마 남지 않은 구시가의 흔적들 속에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살아나간다. 언덕 위에 올라서면 훤칠하게 잘 생긴 사이프러스 나무 옆으로 17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사원인 라닥 네이캉 (Radak Neykhang)이 보인다. 라닥 네이캉은 고대 부탄의 전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절답게 내부로 들어가면 헬멧과 칼, 방패를 볼 수 있다. 대화재 속에서도 살아남아 역사를 지키고 있는 사원의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한 때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했던 왕두에 포드랑 종 (Wangdue Phodrang Dzong)은 2012년 대화재로 완전히 파괴되어 복구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부탄 정부는 복구공사를 자체 진행하기엔 비용과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 판단, 인도에 도움을 요청하여 요새를 재건하고 있었다. 왕두에 포드랑 종카그(Dzongkhag, 주)의 역사는 이 요새가 지어짐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1638년에 샵드룩이 푸낙 창 강 (Punak Tsang Chhu)과 당 강 (Dang Chuu)으로 둘러싸인 언덕에 종(Dzong)을 건설했고, 왕두에 포드랑은 수도인 푸나카(Phunakha)의 뒤를 잇는 두 번째 대도시로서 번성하였다. 왕두에 포드랑은 파로(Paro)와 트롱사(Trongsa) 사이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어 이 곳의 펜롭(penlop)은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파로나 트롱사에서 볼 수 있는 화려했던 역사는 화마로 인해 하룻밤만에 무너지고 말았고, 2021년이 되기 전엔 위용을 감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21세기에 무너진 유적을 따라 걸은 건 숭례문 이후로 처음이었다. 600년 조선 왕조의 산 증인이었던 숭례문이 10년 전 방화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졌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왕두에 포드랑 종은 성문이 아니라 우리나라로 치면 궁궐에 해당하는 곳이 아닌가. 창덕궁이나 경복궁 전체가 불타 없어지는 건 상상하기도 싫다. 그런데 자신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불타고 있는데 손도 쓸 수 없었던 당시 왕디 주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공사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내 발걸음을 차단한다. 어쩔 수 없이 멍한 심정으로 재건되고 있는 성벽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슬픔과 희망이 동시에 느껴졌다. 부탄이 비록 작고 가난한 나라지만 분주한 공사 현장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끝까지 지키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호텔로 돌아오니 행색이 남루한 아저씨 한 분이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부탄 현지인도 여기서 밥을 먹는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아저씨가 나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제안을 한다. 알고 보니 그분은 내가 묵고 있던 호텔 바라 (Hotel Vara)의 지배인이었다. 주인아저씨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저씨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젊을 때 정말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모으려고 애썼고, 모은 돈으로 고향 인근에 호텔을 지어 여행객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 지금은 몇 달씩 유럽이나 일본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가고 있었다. 젊을 때 노는 것도 좋지만, 일하는 재미를 모른다면 늙어서 후회할 것이라고 나에게 진심 어린 충고도 한 마디 건네준다. 또한 한국만큼 빠르게 성장한 나라도 없다면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모범이 된다고 칭찬도 해준다. 이 식사시간이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건 아저씨의 일하는 자세와 처세술 때문이 아니라, 항상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언제나 밝은 웃음으로 나를 대하는 그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푸나카로 향하는 다음 일정만 아니었다면 이 곳에서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부탄의 첫 수도, 푸나카로
푸나카(Punakha)는 300여 년 동안 부탄의 수도 역할을 한 역사적인 장소다. 엄마 강 (모 추, Mo Chhu)과 아빠 강 (포 추, Pho Chhu) 사이에 끼여있는 마을 한가운데에 부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푸나카 종(Punakha Dzong)이 서 있다. 부탄 왕국이 수립된 이후 중심이 팀푸로 옮겨갔음에도 불구하고, 푸나카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잊히지 않았다. 부탄의 첫 번째 왕이 1907년에 이 곳에서 즉위식을 올린 뒤, 현재 5대 왕인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까지 모든 왕이 이곳에서 왕관을 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공식적인 즉위식은 수도인 팀푸에서 열리지만 푸나카의 상징성을 기억하기 위해 푸나카 종에서 왕으로 즉위하는 걸 비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의회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3대 왕은 의원들을 푸나카로 모은 후 이 곳에서 처음으로 의회를 열었다. 부탄에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들은 모두 푸나카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푸나카 종은 엄마 강 (모 추, Mo Chuu) 건너편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답다. 마치 부모님이 자식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처럼, 엄마 강과 아빠 강이 푸나카 종을 감싸며 보호하고 있다. 티벳의 침략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강이지만, 정작 피해는 이들을 지키고 있는 엄마 강과 아빠 강에 의해서 일어났다. 1994년에 지구온난화로 인해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가 터져버리자 아빠 강에 다량의 물이 유입되었고, 홍수로 인해 푸나카 종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엄마 강을 가로질러 푸나카 종으로 갈 수 있는 17세기에 건설된 바잠 다리 (Bazam Bridge)도 1958년에 홍수로 인해 떠내려 간 기억이 있다. 푸나카 종은 대홍수뿐 아니라 1897년 대지진과 수많은 화재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그 자리를 수백 년 동안 지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전각들이 철거되고 조선총독부 뒤편에서 공원처럼 바뀐 경복궁과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고 볼 수 있을까. 경복궁도 수많은 피해 속에서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푸나카 종은 부탄의 수많은 종(Dzong) 중에서 팀푸의 심토카 종 (Simtokha Dzong)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0년대 중반에 수도가 팀푸로 옮겨지기 전까지만 해도 부탄의 경제와 행정의 중심지는 푸나카였다. 지금은 거대한 요새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푸나카지만, 상징적인 중요성은 여전하여 왕의 즉위식이 열리는 곳이자 부탄의 불교 총무원장이 추운 겨울을 보내는 곳으로 남아있다.
부탄의 모든 역사에 관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구루 린포체 (Guru Rinpoche)는 푸나카 종의 역사에도 등장한다. 그는 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에 남걀이라는 사람이 코끼리를 닮은 언덕에 도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푸나카에 도착한 샵드룽 (Zhabdrung)은 코끼리의 상아에 해당하는 이 곳에 요새를 짓기로 결정하고 1638년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1326년에 원래부터 있던 종 축 (Dzong Chug, 작은 종)에 샵드룽이 완성한 풍탕 데첸 포드랑 (Pungthang Dechen Phodrang, 큰 행복의 궁전)이 더해진 푸나카 종은 점점 더 확장되어 1676년에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6층 높이의 우체(utse, 망루)까지 지어져 지금의 모습을 완성했다.
푸나카 종의 가장 특이한 점은 다른 종들과 달리 3개의 도체이(dochey, 안마당)가 있는 것이다. 거대한 망루를 사이에 두고 행정국과 종교국이 나눠져 있는 건 다른 종에서도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형태지만, 푸나카 종은 마체이 하캉 (Machey Lhakhang)이라는 절이 세 번째 안마당을 차지하고 있다. 사원 하나를 위해 건축 형태를 바꿀 정도니, 마체이 하캉이 얼마나 중요한 절였는지 알 수 있다. 절 내부엔 뻬마 링파 (Pema Lingpa)와 샵드룽 응아왕 남걀 (Zhabdrung Ngawang Namgyal)의 발자취가 남아있으며, 푸나카 종에서 죽은 샵드룽의 유해(遺骸)가 이 곳에 보존되어 있다. 부탄 국왕과 불교 총무원장인 제 켄포 (Je Khenpo)만이 절 안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에 아쉽게도 부탄 건국의 아버지인 샵드룽을 만날 수는 없었다.
푸나카 종에서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장소는 제한되어 있지만, 푸나카 종의 강당에 들어서면 아쉬움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100개의 기둥이 있는 강당'은 건축과 미술이 만나 예술의 집합체가 된 곳이기 때문이다. 내부로 들어가 보면 실제론 54개의 기둥만 발견할 수 있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부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세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세 개의 금상(金像)은 각각 부처, 구루 린포체, 샵드룽을 나타내고 있었다. 부처의 삶을 그려낸 벽화들과 정교한 나무공예로 둘러싸인 공간은 푸나카 종이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의 건축기행'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체코 프라하의 성 비투스 성당,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일본 교토의 킨카쿠지, 중국의 자금성 같은 곳들을 사진으로 담으면 조각들이 모여 아름다운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 듯한 느낌이다. 파로의 탁상 사원과 푸나카 종도 조각들 중 하나가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3박 4일 정도의 짧은 일정 동안 부탄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파로의 탁상 사원과 푸나카의 푸나카 종을 들린다고 하니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특히 푸나카 종은 부탄 사람들의 정성이 담긴 걸작이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건축물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푸나카 종을 보고 나니, 이제야 부탄의 역사와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규모가 작고 아름다움은 덜할지 모르지만, 오직 부탄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집불통(固執不通)
따시는 푸나카 종 뒤편의 아빠 강 (Pho Chuu)을 가로지르는 흔들 다리로 날 데려갔지만 한국에선 널리고 널린 모습이라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따시가 일정에도 없는 이 다리로 안내한 이유는 상당히 불순했는데, 특별히 이 곳에 데려갔으니 오늘 일정을 여기서 끝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분명히 일정표엔 달라이 굄바 (Dalay Goemba)에서 오후를 보내기로 되어있는데 사원에 가는 대신 흔들 다리로 만족하라는 의미였다. 웬만하면 이해해주려 했지만, 오후 12시도 안 넘었는데 일정을 끝내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팀푸로 가도 오후 2시도 안 될 텐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가 매일 내는 체류비용이 머리 한편에서 떠오르기도 했고. 결국 내가 일정표대로 따라야 한다고 강하게 나가자 따시는 토라져서 달라이 굄바로 가는 내내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분명히 잘못한 건 가이드로서 일을 소홀히 한 따시지만, 긴 시간 동안 같은 곳을 반복해서 방문했기 때문에 쉬고 싶은 그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따시와의 관계가 나빠지면 영영 못 볼 사이가 될 것 같아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럼에도 달라이 굄바에 꼭 가야겠다는 내 의지는 굽히지 않았으니, 난 정말 고집불통인 게 분명하다.
달라이 굄바 (Dalay Goemba)는 150여 명의 승려들이 거주하는 불교대학이다. 부탄의 승려들은 공인되기 전에 인도 파트나(Patna)에 있는 불교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곤 했는데,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9대 제 켄포 (Je Khenpo, 부탄의 불교 총무원장)에 의해 지어진 사원이 달라이 굄바인 것이다. 사원이 가진 역할의 중요성을 제외하고 건물 자체와 소장한 문화재로만 따지면 특별할 것이 없다. 달라이 굄바로 향하는 길이 부탄 최고의 드라이브 루트 중 하나라는 것만 빼면 이 곳에 꼭 들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따시가 여길 안 들려도 된다고 생각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따시는 이미 화가 풀렸음에도 내 미안한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절을 들렀다 나오는 길에 길가에서 나는 열매를 따서 나에게 주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순박한 따시의 모습에 오늘 맥주는 반드시 내가 대접하고 만다는 다짐을 했다.
히말라야를 만나다
팀푸로 가기 전, 도출 라 (Dochu La) 고개에 다시 한번 멈춰 섰다. 며칠 전엔 구름으로 휩싸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다. 전망대에 선 순간, 눈으로 뒤덮인 히말라야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7,000m를 넘는 산맥들 가운데 우뚝 솟은 조몰하리 (Jhomolhari, 7,314m) 봉을 만나자 반가운 마음에 탄성을 지른다.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제갈공명을 만났을 때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일정 두 번째날 에 칠리 라 (Cheli La)에서 히말라야를 보려고 했지만 날씨 때문에 가기도 전에 포기했고, 며칠 전 도출라 (Dochu La)에선 구름으로 뒤덮여 볼 수조차 없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만난 봉우리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다음엔 꼭 트레킹을 하러 오라고 나에게 손짓하는 듯했다.
전망대에 서 있으니 특이한 조합의 부탄 사람들이 눈에 띈다. 한껏 멋을 부린 부탄 청년들 사이로 스님 한 분이 서 있다. 불교에 귀의했다고 해서 일반인이랑 친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부탄에선 부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스님도 거리낌 없이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한국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에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배경으로 찍은 그들의 사진은 부탄을 대표하는 얼굴은 사원도 종(Dzong)도 아닌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해준다.
부탄의 수도, 팀푸로 입성하다
여기저기 공사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현장, 도요타 차들로 가득 찬 왕복 2차선 도로, 부탄답지 않게 현대식 건물로 가득 찬 거리. 이 모든 것이 부탄의 수도 팀푸에 입성하면 보는 풍경들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라면 소도시에 불과한 규모지만, 2주 동안 부탄에서 살다 보니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수도도 너무 혼잡해 보인다. 점점 더 현대화되고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가지만 팀푸는 여전히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부탄이라는 나라의 수도답게 다른 나라의 수도와 전혀 다른 모습들을 거리를 걸으며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부탄에서 남은 시간은 고작 이틀밖에 없다. 짧은 시간이지만 '세상에서 오직 둘 밖에 없는 수도'라는 타이틀을 가진 팀푸를 거닐 수 있다고 하니 여행의 마무리를 이 곳에서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부탄 사람들은 행복하다'라는 문장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이야기의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 상에 둘 밖에 없는 '신호등이 없는 수도' 팀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