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군도의 제일가는 섬, 백령도에서 보낸 황홀한 시간
한 달 전부터 어디로 떠날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3∙1절이 금요일이고 하루 정도 휴가를 내면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월 초에 설날 연휴가 끼어있는 데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연속되자 어느덧 2월의 마지막 주가 다가왔다. 주변 사람들은 홍콩을 비롯한 해외나 가까운 제주도로 떠난다고 했다. 가까운 일본에 가자니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 같고 (게다가 3∙1절 100주년이 아닌가!), 중국은 비자가 필요하니 물 건너갔다. 한반도에서 적어도 3일 정도 투자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순간 뇌리를 딱 스쳐 지나간 곳이 떠오른다. 수년 전부터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곳은 서해 저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섬이었다.
백령도는 인천에서 쾌속선을 타고 네 시간을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섬이다. 대한민국의 섬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갈 수 있는 섬이 바로 백령도다. 백령도로 갈 수 있는 인천과의 거리는 222km로 서울에서 강릉 정도의 거리라 생각하면 쉽다. 한반도 지도를 펼쳐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백령도가 남한에서는 맘 크게 먹고 가야 되는 섬이지만, 북한의 장산곶과는 고작 14km 떨어져 있는 것이다. 분단이라는 현실은 수많은 실향민을 낳았을 뿐 아니라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물적 자원의 엄청난 낭비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북한에서 배를 타면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섬을 대한민국 국민은 뱃멀미에 시달리기도 하고 날씨로 인해 하루에 세 편 있는 배편이 취소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뱃길에 오르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성남시 모란역 부근이다. 다행히 모란에서 인천터미널로 향하는 시외버스가 정차하기 때문에 인천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고단하지는 않다. 인천터미널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환승해 인천 연안여객터미널까지 가는데 1시간 40분 정도가 걸린다. 전 날 밤에 영화 <사바하>를 봐서 그런지 가로등 하나에 의존해 불을 밝힌 거리를 걷기가 너무 무섭다. 기괴한 소리를 내는 쌍둥이 언니가 떠오르기도 하고, 불로 장생하는 풍사 김제석이 나타나 내 길을 막을 거라는 상상도 하게 된다. 번화가에 이르자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다. 6시 10분 첫 차를 타고 인천 버스터미널을 거쳐 인천 연안여객터미널까지 도착하니 시계는 7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인천에서 백령도로 가는 배편은 하루 총 세 편이다. 7:50에 출항하는 배는 도저히 못 탈 것 같아 8:30에 출항하는 배를 예약했다. 연안여객터미널은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한 모습이다. 하지만 터미널의 협소한 공간은 옹진군청에 걸려있는 플래카드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제1국제여객터미널로 이전해 달라!" 평일이라 다행이지 주말이나 연휴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고 하는 그들의 말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터미널을 지을 때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이 있었을까. 터미널을 지을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의 질이 이렇게 나아질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시간이 조금 남아 터미널 옆 광장을 잠시 둘러본다. 시내버스 안에서 러시아 풍의 모조 탑 두 개가 서 있는 모습이 궁금증을 일으킨 것이다. 광장에 가니 인천항의 엄청난 크기가 실감이 난다. 2월 초에 들린 고흥의 녹동항이나 사천의 삼천포항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다. 대한민국 제3의 도시로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탑이 서 있는 광장으로 가니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다. 인천시가 2011년에 광장을 조성한 것은 인천 앞바다에서 러일전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도중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한 러시아 바랴크함 승조원들을 추모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3년 11월 방한했을 때 이 곳에 들렀을 정도로 인천은 러시아와 지속해서 친분을 맺고 있는 도시가 되었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우호도시 결연을 맺고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또한 2018년 10월 23일에 핀란드만에 있는 '코틀린 (Kotlin)' 섬에 인천광장을 조성함으로써 이에 화답하였다. 개발자라면 모를 리 없는 코틀린 섬에 찾아가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생긴 것이다.
백령도로 향하는 여객선의 이름은 '코리아 킹'이다. 촌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작명을 한 사람이 조국을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떠날 때만 해도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워 흘러가는 시간을 놓치기 아깝다. 영종도와 인천대교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도 잠시, 배는 망망대해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창밖에 수평선밖에 보이지 않자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두 시간 정도 곯아떨어졌을까. 잠에서 깼는데도 바다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울릉도에 갔을 때 읽을 책을 들고 오지 않아 후회한 기억이 떠오른다. 다행히 이번엔 심심할 겨를이 없다. 한창 책을 읽고 있으니 안내방송이 들린다.
"저희 배는 곧 소청도에 도착합니다. 소청도에서 내리실 분은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백령도나 대청도에 가실 분들은 하선하지 마시고 자리에 앉아계시기 바랍니다."
서해 5도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다섯 개의 섬을 가리킨다. 우도는 사실상 무인도와 다름없는 섬인 데다 강화군에 속하기 때문에 안보에 중요하면서도 여행자들이 관심 있어하는 섬은 네 개의 섬이다.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세 개의 섬을 묶어 대청 군도라고 부르며, 그중 가장 큰 섬은 백령도다. 면적으로 따지면 대청도가 소청도의 네 배, 백령도가 대청도의 네 배다. (백령도 51.09km², 대청도 12.623㎢, 소청도 2.91km²)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섬은 단연 백령도이며, 그 뒤를 대청도가 따르고 있다. 소청도는 면적도 작고 볼거리도 없어 굳이 들리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나는 2박 3일의 일정 동안 백령도와 대청도에서 각각 1박을 한 후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빠졌는데, 역시나 소청도에서 내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코리아 킹'은 대청도에 한 번 더 정박해 승객들을 실어 나르고, 마지막으로 백령도로 향했다. 백령도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50분. 백령도의 명성답게 수많은 관광버스가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 같은 개인 여행자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활기찬 용기포항의 풍경은 가슴을 들썩이게 만든다. 아무 계획 없이 급하게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에 용기포항에 내려서야 여행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숙소는 어디고, 식사는 어디서 먹고, 오늘은 어디를 들리고. 머리가 참 복잡하다. '아일랜드 캐슬'이라는 곳에 전화를 하니 평일이라 대부분의 방이 비었다고 말한다. 숙소를 정하고 맛집을 찾아보니 '사곶냉면'이 유명한 것 같다. 점심은 냉면을 먹는 걸로 하고 백령도의 상징인 '두무진 유람선'에 전화를 해본다. '두무진 유람선'은 승객이 어느 정도 있을 때 운행하는 비정기 유람선으로, 나 같은 사람은 단체로 온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탈 수밖에 없다. 즉, 유람선이 언제 출발할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다는 것이다.
"아, 오늘은 배가 안 뜨고 내일 오전 8시 30분에 출항합니다."
다행이다. 안 그래도 첫날은 계획도 없는데 여유롭게 걸으며 둘러보지 뭐.
전화번호: 032-899-2210
관람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입장료: 무료
무거운 배낭을 숙소에 먼저 두고 도보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도를 보니 여객선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거리는 1.7km.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적거리다 백령도 공영버스를 놓쳐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아니라고 믿고 싶다.) 용기포 신항은 백령도 흰나래길 1코스의 출발점이라 백령도 여행의 애피타이저로 삼아 걸으면 좋다. 숙소로 가는 도중 오른쪽에 솟아오른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2013년에 지어진 전망대는 망원경으로 북한 영토를 보기에 최적인 장소라고 한다. 숙소와 전망대가 반대방향이라 전망대에 먼저 들린 뒤 짐을 내려놓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이 선택이 백령도 여행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 옆엔 서해 바다에서 고운 모래가 있는 하늬 해변이 있지만 북쪽을 향해있다는 이유로 철조망으로 철저하게 막혀 있다. 자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벽을 넘어 수많은 모래를 실어 나른다. 해변을 따라 세운 참호가 모래에 덮여 있는 모습을 보면 자연의 신비가 놀랍기만 하다. 전망대로 오르는 언덕을 터벅터벅 올라가자 나를 지나친 스타렉스 한 대가 유턴을 한 뒤 내 옆에 섰다.
"전망대 가시나 봐요? 데려다 드릴까요?"
스타렉스 운전대를 잡은 이는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이모였다
"그래도 될까요? 태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파른 언덕길을 이렇게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니. 하지만 나에게 찾아온 행운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국토 끝섬 전망대는 2013년에 개장한 전망대로, 백령도 곳곳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북쪽을 바라보면 백령도의 번화가인 진촌리를 비롯해 하늬해안과 심청각이 보이고 남쪽에는 여객선이 정박하는 용기포 신항과 4km 길이의 사곶해변이 끝없이 펼쳐져있다. 전망대 위 망원경을 통해 북한의 옹진반도를 볼 수 있는데, 안개가 낀 오늘 같은 날은 식별이 불가능하다. 아쉬운 내 맘을 위로라도 하듯이 이모는 망원경으로 한 바위에 초점을 맞춰 주신다.
"저기가 백령도 물범들이 서식하는 바위예요. 물에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저 바위에 눕곤 한답니다."
망원경으로 봐도 식별이 잘 되진 않지만 갈매기들과 다른 하얀 물체가 뭍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원래는 3월이 넘어야 찾아오는데, 올해는 1월부터 찾아왔어요.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중국 바다에 큰일이 벌어졌는지 이유는 알 수 없네요."
백령도의 점박이 물범들은 겨울을 중국의 랴오둥만에서 보내며 번식을 마친 뒤 여름을 보내기 위해 백령도로 찾아온다. 원래 인천 앞바다까지 찾아왔지만 과도한 개발로 인해 백령도에 살기 시작했다고. 최대 300여 마리 정도의 물범이 발견될 때도 있지만 아직까진 5마리 정도만 왔다고 한다.
이모의 친절한 안내에 너무나 고마워 기념사진을 남기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알고 보니 백령도의 문화해설사를 맡고 있는 박창옥 이모였다. 그녀의 박학한 지식은 수많은 경험과 연륜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녀는 백령도에서 태어나 섬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토박이다.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백령도의 변화를 지켜보고, 역사를 몸소 체험한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내가 백령도의 주민이 된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어릴 때 초가집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대한민국이 산업화되고 군대가 현대화되자 백령도 주민들도 그 혜택을 덩달아 입기 시작했다고 한다. 군사 훈련과 안보를 위해 필요한 장비들이 지나갈 길이 닦이고, 수천 명이나 되는 국군들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간척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부족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해수를 담수화시키는 등 백령도의 삶은 시간이 흐르면서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백령도 주민들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데는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이유도 있지만 군사적 긴장 관계에서 오는 경제적 혜택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통일이 되면 누가 백령도에 오려고 하겠어요. 관광뿐 아니라 군대가 주둔함으로써 백령도 주민들이 얻는 혜택은 어마어마하답니다."
전화번호: 032-836-0559
영업시간: 오전 11시 - 오후 4시 (화요일 - 일요일)
메뉴: 물냉면 ₩6,000, 빈대떡 ₩6,000, 짠지떡
"점심으로 냉면을 먹으면 괜찮을까요?"
전망대에서 이모에게 물어보니 사곶냉면이 가깝고 맛있다면서 나에게 추천해준다. 이모도 냉면을 안 먹은 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면서 오랜만에 냉면 먹으러 가야겠다고 말한다. 또 차를 얻어 타고 4km나 떨어진 거리를 데려다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용기원산 언덕을 내려와 용기포 신항을 지난 뒤 이모만 알고 있는 지름길을 거쳐 사곶동 마을에 도착했다. 사곶해변이 마을 바로 앞에 펼쳐져 있지만 내일 보기로 하고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기로 한다. 시계는 이미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지만, 식당엔 아직도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동네 주민 아주머니들이 왁자지껄 수다를 떨고 있고, 백령도에 근무를 하고 있는 친구를 위해 먼 곳까지 면회를 온 청년들도 있다. 원래 오늘 영업을 마감하려고 했지만 이모가 미리 전화를 해서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수육은 이미 마감이 돼서 물냉면과 빈대떡을 주문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있으니 이모가 이상하게 생긴 떡을 내준다.
"요놈이 짠지떡인데, 한 번 먹어봐. 백령도 아니면 못 먹는 음식인데 할머니가 특별히 주신다네."
짠지떡의 만두피는 찹쌀가루와 메밀가루를 섞어 만들어서 그런지 회색빛이 강하다. 한 입 씹어먹어 보니 바다와 육지의 향이 오묘하게 섞인 맛이 난다. 만두피 안에 든 것은 다진 김치, 굴, 홍합으로 백령도의 풍부한 먹거리를 상징하는 듯하다. 백령도에서 만드는 음식 대부분은 외지에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자체 생산하는 것이다. 서해 안의 다른 섬들과 달리 백령도는 평탄한 지형과 풍부한 지하수를 가지고 있어 농사를 짓기 용이해 쌀뿐 아니라 배추, 마늘, 양파 등 다양한 농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육지에서 필요한 것은 의사, 기술자 등의 고급 인력밖에 없다고 하니 백령도는 가히 '서해의 진도'라고 불릴만한 섬인 것이다.
빈대떡과 물냉면이 차례로 나오자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빈대떡은 광장시장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로 맛있었지만, 사곶냉면의 상징은 바로 황해도식 물냉면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함흥냉면과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국물의 맛은 확연히 다르다. 3대 냉면이라 불리는 평양냉면, 진주냉면과도 확실히 다른 독특한 풍미를 자랑한다. 겨자를 섞었지만 주욱 들이키는데 아무 거부감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냉면은 육지에 와서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을 정도다. 황해도식 냉면이 어떤 맛인지 궁금하지만 백령도에 찾아갈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인천 시내의 사곶냉면 분점에 찾아가면 된다. 인천에 다섯 개의 분점이 있으며 모두 백령도 사곶냉면의 친척들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하니 그 본연의 맛을 그대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백령도에서 자체 생산한 농산물의 미(味)를 느끼진 못할 테지만.
전화번호: 032-836-8088, 010-4199-7685
유람선 시간: 불규칙적이므로 반드시 미리 전화해서 출항시간을 알아봐야 한다.
유람선 투어: ₩19,000
백령도에 내리자마자 두무진 유람선 시간이 내일이라는 걸 확인했지만, 1시간이 지난 뒤 오늘 오후 4시에 출항할 거라고 연락이 왔다. 사곶냉면에서 점심을 먹은 뒤 바로 두무진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두무진 유람선이 여객선이 정박하는 옹기포항이 아니라 섬 북서쪽 끝에 있는 두무진항에서 출항한다는 것이다. 사곶냉면에서 무려 14km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만 항구에 가려면 하루에 7번 있는 공영버스를 타거나 비싼 가격의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행사를 통해서 백령도를 둘러보는 것이다. 내 사정을 들은 이모는 흔쾌히 두무진까지 데려다주신다고 약속한다. 내가 만약 국토 끝섬 전망대 대신 숙소에 먼저 들렀다면 이런 행운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은 노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어느 정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라고 할까.
두무진으로 가는 내내 이모는 백령도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간척사업을 통해 경작지가 만들어진 평야, 백령도에 소금을 공급하는 염전, 백령도 주민에게 물을 공급하는 백령 호수 등을 지나쳐 인적이 한산한 섬 북쪽으로 진입한다. 백령도 지도를 보면 섬답지 않게 대부분의 마을이 내륙이나 남쪽 해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모는 원래 북쪽에도 마을이 있었지만 밤의 불빛이 무장간첩의 출입을 용이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전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에 대해 알려준다. 6,70년대만 하더라도 백령도에 수많은 간첩들이 왔으며 누가 간첩이고 주민인지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몇몇 간첩들은 여객선을 타고 육지로 가서 첩보활동을 펼쳤을 것이다. 경비가 삼엄한 휴전선을 넘는 것보다 백령도를 통해 침입하는 것이 가장 쉽고 현명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CCTV가 해안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데다 곳곳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북한의 간첩들이 들어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이모는 두무진 유람선 매표소에 나를 내려준 뒤 남은 50분 동안 산책로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유람선을 타고 두무진의 기암괴석을 둘러보는 것이 하이라이트지만 흰나래길의 일부인 두무진 산책로를 걷는 것도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거라고 귀띔을 해준다. 작별의 순간이 왔다. 두무진에서 다시 진촌리 (백령도의 번화가)로 돌아오는 것이 어렵다면 다시 전화하라고 말씀해 주신 이모의 배려가 너무 고맙기만 하다.
두무진 산책로는 해병대가 파놓은 참호와 나란히 서 있다. 참호를 따라 바다 풍경을 감상해도 되고 숲 속에 나 있는 데크 길을 따라 걸어가도 된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두무진의 풍경은 1612년 백령도로 귀양 온 이대기는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아름답다. 아무도 없이 홀로 파도소리를 들으며 서해답지 않게 깨끗한 바다 위로 독특한 모양의 기암괴석들을 감상하니 이대기의 말에 공감을 안 할 수가 없다.
오후 4시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엄청난 인파가 몰려오고 두무진이 시끄러워진다. 평일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유람선에 올라 자리에 앉는다. 유람선의 최대 탑승인원은 90명 정도며 반 정도가 채워진 것 같다.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배가 출항을 하자 나는 배 뒤편에 가서 두무진을 감상할 준비를 한다. 좁은 공간에서 미리 자리 잡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두무진의 기암괴석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공간이 협소해 포기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가마우지의 배설물로 하얀색을 띠게 된 선대암, 코끼리바위, 형제바위, 장군바위 등 다양한 형상의 바위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기암괴석을 지나면 금강산을 닮은 절벽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절벽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곳도 있는데, 이는 북한을 향해 조준하고 있는 포가 숨겨진 동굴이라고 한다. 북한과 휴전 중이라는 상황은 신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자연까지 훼손시킬 정도로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다.
두무진 유람선은 홍도 유람선, 울릉도 유람선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의 4대 유람선을 홍도, 울릉도, 두무진, 백도 (여수 거문도에서 출발)로 꼽는데, 아직 백도 유람선은 타지 못했다. 거문도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적어 백도 유람선을 타지 못한 건 아직도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다.
백령도에는 섬 북쪽을 거쳐 남쪽으로 돌아오는 북포리행 순환버스와 반대방향으로 운행하는 화동 방향 순환버스가 있다. 각각 9~11번 정도 운행하며 일요일에는 증편 운행하니 참고하면 좋다. 요금은 거리에 상관없이 1,000원이며 시간을 잘 확인하면 자유여행으로 온 사람들도 불편함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두무진 유람선에서 내리니 시간은 오후 5시. 시간표를 확인하니 오후 5시 54분까지 기다리면 진촌리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50분까지 남은 시간을 기다리기 무료해 섬의 왼쪽 해안길을 따라 연화리까지 걷기로 했다. 하루 종일 차를 타고 편하게 이동해서 그런지 5km 정도의 거리는 걷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었다. 기대했던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지 못한 건 아쉽지만 한적한 백령도의 농촌 풍경을 보며 산책을 즐긴 것도 괜찮은 경험이었다.
전화번호: 032-836-0713
영업시간: 오전 8시 - 오후 9시
메뉴: 해초비빔밥 ₩10,000, 오늘의 메뉴 (우럭구이) ₩20,000
뚱이네맛집은 진촌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식당이다. 진촌리의 식당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당으로 백령도에서 난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를 먹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초비빔밥, 산낙지밥 등 일품 음식을 먹지만, 나는 오늘의 메뉴에 적인 우럭 구이를 선택했다. 따로 밥이 나오지 않으므로 2,000원을 더 내고 밥을 추가하니 밑반찬도 준다고 하신다. 서해에서 잡힌 우럭은 각종 양념이 쳐져 있어 부드러운 생선살에 짭짤한 맛이 가미되어 있다. 백령도가 어업이 아닌 농업이 중심이라는 사실은 밑반찬에서도 드러난다. 백령도에서 재배한 농산물로 만든 반찬은 전라도 음식이 연상될 정도로 맛있다. 백령도의 식당 대부분은 점심시간에만 영업을 하는 곳이 많으므로 저녁은 뚱이네맛집을 비롯한 진촌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
전화번호: 032-836-6700
숙박료: ₩60,000 (평일) ₩70,000 (주말)
아일랜드캐슬은 용기포 신항에서 진촌리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 자리한 호텔(?)이다. 여행사 관광상품으로 백령도에 온 단체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 평일엔 한산했다. 손님의 수가 충분히 많다면 호텔 내 뷔페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할 수도 있다. 진촌리 번화가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조용히 묵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숙소다.
전화번호: 032-899-2210
관람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입장료: ₩1,000
심청각은 진촌리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새겨진 전시관으로, 백령도가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의 배경인 것을 기념하여 지어진 것이다.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와 그녀가 환생했다는 연봉바위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건립된 전시관에 들어가면 심청전과 백령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오전 9시 이전에 방문해 전시관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인당수를 감상하고 내려온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침에 일어나 심청각으로 향하던 도중, 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건다.
"심청각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지? 젊은 사람 따라가면 되겠네!" (저 이제 젊은 사람 아니에요...)
어차피 나도 심청각으로 가는 방향이니 같이 아침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시는 할아버지는 아직도 정정하신 듯 아무 어려움 없이 오르막길을 오른다. 항상 하루에 2시간씩 산책을 하는 데 건강의 비결이 있으리라. 지금은 직장 때문에 성남에서 살고 있지만 고향은 창원이라고 말하니 자기도 부산에서 왔다고 하면서 똑같은 경상도 사람이라고 반가워하신다. 부산에서 이 먼 곳까지 어떻게 오셨냐고 물어보니 울산에서 배 타고 2박 3일 동안 왔다고 한다. 인천에서 여객선을 타고 온 것이 아니니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어서 백령도까지 온 것일 터. 역시나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일하러 먼 길을 찾아왔다고 한다.
"백령도에 관광 온 건 아니고 짐 실으러 왔어. 일반 화물은 아니고 까나리 액젓 만들고 남은 쓰레기 처리하러 온 거야."
아, 그렇다. 백령도의 가장 유명한 특산물은 까나리액젓이며, 만들다 남은 쓰레기를 처리할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의 백령도에 매립할 수는 없기 때문에 쓰레기를 처리할 업체가 필요했고, 백령도 주민들이 하도 요청해서 울산에서 먼 길까지 온 것이다. 앞으로 2박 3일 동안 쓰레기를 실은 뒤 서해 한가운데에 쏟아 버릴 예정이라고 한다. 바다에 폐기물을 버릴 때는 반드시 정해진 위치에 버려야 하며, 서해의 처리 장소는 2019년까지만 사용할 수 있다고 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에서 합의했다. 이를 어길 시 해경에 의해 조사받으며 실형을 받을 수도 있다고. 백령도에 오니 평소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듣게 되니 더욱 색다른 경험을 한 느낌이 든다.
전화번호: 032-899-3510
사곶해변은 두무진과 더불어 백령도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다. 천연비행장으로 널리 알려진 사곶해변은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모래가 아닌 규암으로 만들어진 모래가 두껍게 쌓여 만들어졌다. 바닷물을 머금으면 더 단단해지는 사곶해변을 걸으면 자동차 바퀴 자국이 보인다. 모래 한가운데를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보통 해변을 걷다 보면 발이 푹푹 빠져 불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사곶해변은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니, 발자국을 새기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낄 정도다. 썰물 때 길이 4km, 너비 300m에 달하는 해변은 대한민국 어디서도 찾기 힘든 풍경이다. 사곶해변 남쪽 언덕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절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전화번호: 032-899-3403
콩돌해변은 사곶해변과 마찬가지로 규암이 부서져 만들어진 해안이다.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지정되었으며, 거제나 해남의 몽돌해안과 달리 깨알 같은 크기의 돌들을 만날 수 있다. 콩들의 색깔도 흰색∙회색∙갈색∙청회색 등으로 형형색색을 이루고 있어 매력을 더한다.
전화번호: 032-836-7009
영업시간: 오전 11시 - 오후 3시
메뉴: 칼국수 ₩6,000, 수육 ₩8,000
장촌칼국수는 아는 사람만 찾아온다는 백령도의 맛집이다. 백령도의 남포리에 위치한 식당은 간판도 없어 그 위치를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점심시간에 찾아오면 낡은 주택 앞으로 수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어 여기가 식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촌칼국수를 상징하는 요리는 당연히 칼국수다. 섬이라 해물칼국수일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걸쭉한 국물에 칼국수 본연의 맛으로 승부하는 칼국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맛을 자랑한다. 갓 찐 수육을 시킨 뒤 무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더욱 맛있다. 백령도에 거주하는 교사들이나 군인들이 점심을 먹으러 먼 길을 찾아올 정도라고 하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백령도를 떠나기 전 점심 식사를 먹으러 콩돌해변에서 2km 정도를 걸어온 보람이 있을 정도로 장촌칼국수는 훌륭한 식당이었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과 달리 간판도 없어 식당에 전화까지 했으니 얼마나 찾기 어려운 지 감이 올 것이다. 식당 안은 백령도에 살고 있는 젊은 교사들로 붐벼 활기찬 분위기였다. 그들 틈에 끼여 혼자 식사를 하니 외로운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명성답게 맛있는 칼국수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식당 앞에 나서서 장촌리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오후 12시 7분이다. 시간표에 표시된 것과 달리 공영버스는 5분 빠른 12시 12분에 도착했기 때문에 백령도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사람들은 10분 정도 미리 기다리는 것이 좋다.
백령도에서 인천으로 가는 마지막 배는 오후 1시 30분에 출발한다. 먼 곳까지 와서 백령도만 보고 가기에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청도에서 하루를 더 보낼 수도 있다. 나 또한 백령도만 보고 가기 아까워 대청도를 둘러보기로 했다. 농업이 중심인 백령도와 정반대로 대청도의 주요 산업은 어업이며, 기암괴석이 자랑거리인 백령도와 달리 대청도는 모래사막과 아름다운 해변을 내세우고 있는 섬이다. 백령도와 지척인 대청도는 쾌속선을 타고 20분이면 도착한다. 백령도와 달리 대청도에 내린 여행자는 오직 한 사람, 나밖에 없었다. 전날이 평일이라는 여파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대청도는 정말 별 볼일 없는 섬이었던 것일까.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 한 채 선진포항에서 여행객들을 맞이하는 관문인 선진동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