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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 Jun 11. 2019

충청도의 과묵한 마을, 서천 (舒川)

충청남도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조용한 마을엔 무엇이 있기에

서천 (舒川)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국내여행을 좋아하고 지리에 빠삭한 사람들조차 어디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서천은 알려지지 않은 오지 중의 오지다. 무한도전의 팬이라면 노홍철의 고향으로 잠깐 들어본 적이 있으려나.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존재감이 없는 지역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 중 하나가 바로 서천이다. (노홍철의 출생지는 서울 강남으로, 부모님이 충남 서천 출신이다.) 서천군의 인구는 53,000명 정도로 대한민국의 다른 군(郡)보다는 규모가 있지만 이마저도 점차 줄어드는 실정이다. 서천에 그나마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유는 드넓은 평야와 서해 바다가 주고 있는 넉넉한 수산자원 때문일 것이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내실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이 되는 곳이 바로 서천인 것이다.

한산한 서천 읍내

서천이 좋은 땅이라는 근거는 전성기 시절 충청도에서 제일가는 지자체였다는 사실에 있다. 서천은 몰라도 한산이나 장항이라는 지명을 들어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산면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한산모시와 오랜 전통과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한산소곡주로 유명하다. 장항읍은 일제 시대 충청도의 드넓은 평야에서 자란 쌀들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항구다. 서해 앞바다에 만들어진 장항제련소는 한반도에서 생산된 금을 정제시키는 데 사용되었고, 장항을 일제시대 중요한 산업도시로 만드는 버팀목이 되었다. 서천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설 계획도 있었을 정도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이었다.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장항역

하지만 이도 이미 지나간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한산 모시는 여전히 좋은 품질을 자랑하고 있으나 전통 의상이 점점 외면받으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더 이상 끌지 못하고 있다. 장항은 장항선의 종점이었으며 철도의 이름이 이 곳에서 유래될 정도로 큰 항구였지만 철도는 쇠퇴하고 있는 도시를 벗어나 위치를 내륙으로 옮겼다. 한 때 3만 명이나 살던 장항읍은 현재 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비교조차 불가했던 서천읍보다도 인구가 적다. 읍내로 들어서면 빈집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을 정도로 휑하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곧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장항읍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해가 지자마자 잠을 청한다. 마치 가족과 친구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 홀로 외로이 남은 노인을 연상시킬 정도다.

서천만큼이나 소박한 서천 버스 터미널

왜 나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점점 쇠퇴해가는 서천에 갔을까. 아직 한반도에서 갈 곳이 너무나도 많은데 귀중한 시간을 사용해가며 충청남도 끝자락에 있는 작은 지방에 가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서천이 고집 있게 지켜온 전통과 조용한 농촌 마을이 주는 아늑함, 서해 바다답지 않은 아름다움에 있다. 한 때 한국인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던 모시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미 철로가 끊긴 장항읍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서천 사람들의 모습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근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지쳐있던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준 서천. 이틀의 짧은 여정 중 내가 발견한 서천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마량포구

마량진은 동백꽃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농어촌 버스를 타고 서천의 서쪽 끝 마량리로 향한다. 한적한 어촌의 모습을 기대한 내 예상과 달리, 마량리에 들어선 서천 화력 발전소는 굴뚝을 통해 끊임없이 연기를 내뿜고 있다. 화력발전소를 뒤편에 둔 마량포구는 공사가 한창인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신경 쓰지도 않는 듯하다. 얼마 되지 않는 어선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요트를 타러 온 사람들의 모습은 세상의 번뇌에 시달리지 않는 고승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마량포구는 생각보다 큰 항구지만 드나드는 배는 적다

마량포구는 아늑한 어촌 마을일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성지로서도 각광받는 곳이다. 미국 감리교 목사로서 1885년에 조선에 입국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우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쓴 인물이다. 그는 정동 제일교회를 세우고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44세가 되던 1902년에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해 목포로 가던 배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선박이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아펜젤러는 구조를 기다리지 않고 물에 빠진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머나먼 이녁 땅에서 숨지고 만다. 그가 순직한 어청도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 마량포구다.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해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성경 전래지 기념관이 마량포구에 세워졌으며, 기념관에 들어가면 조선에 대한 그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박물관이 그러하듯 이른 아침에는 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량포구를 대표하는 성경 전래지 기념관
조선에서 순국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량포구

홍원항

홍원항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항구다

화력발전소 공사현장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자 또 다른 항구인 홍원항이 나온다. 마량포구보다 더 활기를 띠는 홍원항은 싱싱한 물고기를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6월의 서천 바다는 꼴뚜기와 갑오징어가 제철일 때다. 잡은 물고기를 수족관에 넣어 파는 다른 어시장들과 달리, 이 곳에서는 바로 잡은 갑오징어, 꽃게, 갈치를 비롯 다양한 물고기를 즉석에서 구할 수 있다. 갑오징어는 살이 통통 오른 모습으로 여행객들의 입맛을 돋우고 있다. 고기를 막 잡아 온 주민들은 오징어의 싱싱함을 강조하며 값을 매긴다. 몇몇 사람들은 충청도 사투리를 써가며 왜 이렇게 가격이 올랐냐고 불평을 한다. 하지만 갓 잡은 물고기를 먹어본 사람들은 안다. 잘 익은 한우만큼 맛있는 것이 한반도 앞바다에서 낚은 싱싱한 물고기라는 것을.

홍원항에선 갓 잡은 싱싱한 수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전주백반
전화번호: 041-952-7782
메뉴: 갈치구이 ₩10,000
생선구이를 먹을 수 있는 전주백반

아침 일찍 일어나 한참을 걸었더니 허기가 진다. 홍원항의 식당들이 자랑하는 요리는 '당연히' 회 코스다. 아침부터 회를 먹을 수는 없으므로, 홍원항 입구의 '전주백반'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전주백반은 항구에 있는 식당답게 생선구이를 곁들인 백반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고등어구이, 삼치구이, 조기구이 등 국산인 생선들이 있지만 그 날따라 갈치를 먹고 싶어 갈치구이를 택한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야 도착할 수 있는 저 먼 세네갈에서 온 갈치는 살이 도톰히 오른 모습이다. 제주산 갈치보다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는 맛이지만 허기진 내 배를 만족시키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마량리에 들렀다면 반드시 홍원항에 가 보기를. 갓 잡은 물고기를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촌 마을을 만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춘장대 해변

서해 바다답지 않게 푸른빛을 뽐내고 있는 춘장대 해변

서천의 깨끗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여러 군데가 있지만, 춘장대 해변만큼 아름다운 곳은 '단연코' 없다. 서천에는 춘장대 해변을 비롯, 동백정 해변과 비인 해변 총 세 군데의 해변이 있었다. 하지만 동백정 해변은 화력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그 흔적마저 사라졌고, 비인 해변은 해수욕장으로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게다가 대천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윗동네 보령과 달리 서천의 해안은 장항제련소, 서천 화력발전소를 비롯한 다양한 산업시설이 들어서 있어 깨끗했던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해변을 찾은 사람들보다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갈매기가 더 많다

해송으로 둘러싸인 춘장대는 사실상 마지막 남은 서천의 해변이다. 얼핏 들으면 '춘장대'라는 이름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더러운 인간의 이기심이 숨어있다. '춘장 (春長)'은 해변 주변의 70~80% 토지를 소유했던 민완기 씨의 호다. 그는 서울에 거주하면서도 해변에 자신의 호가 들어가기를 원했다. 토지 소유권을 가진 그의 의견을 묵살하기 어려워 서천군은 해변의 이름을 춘장대로 지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썰물 때가 되면 뻘로 변하는 춘장대 해변. 고기를 내밀고 모래사장을 활보하는 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다행히도 땅의 소유주는 재물보다 해변의 이름에만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춘장대 해변은 최소한의 개발만 된 상태로 아직도 천혜의 자연경관을 보존하고 있다. 사람보다 갈매기가 훨씬 많을 정도니 말 다했다. 썰물 때가 되면 수많은 꽃게들이 모래사장을 활보하며 갈매기들은 조용히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아직 피서철이 되지 않은 해변엔 자연학습을 즐기러 온 가족들이 장화를 신고 진흙에 발을 담근다. 노란 진흙 때문에 '황해 (黃海)'라는 이름이 붙은 서해바다지만 춘장대는 푸른빛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변산반도의 격포 해변, 태안반도의 꽃지 해변, 머드축제로 유명한 보령의 대천 해변조차 그 영롱함에 있어서 춘장대를 따라잡지 못한다. 춘장대가 순결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는 서천의 과묵함에 있다고나 할까.


한산모시문화제

아직도 질 좋은 모시를 생산하는 곳은 서천군 한산면밖에 없다

<한산모시짜기>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문화다. 여름에 접어드는 6월에 서천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한산모시짜기>를 주제로 하는 한산모시문화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한산모시문화제는 전국 팔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모시를 생산하는 서천군 한산면 특유의 문화를 보존 및 홍보하기 위해서 열리는 행사다. 문화제가 초여름에 열리는 이유는 아마 모시로 만든 옷감이 더운 여름을 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미니 베틀 한산모시짜기''저산팔읍 길쌈놀이', 그리고 '한산모시 퍼레이드'다. 막대한 예산을 쓰면서까지 축제가 반드시 열려야 하는 건 '전통문화의 보존 또는 지역 특색의 홍보'를 위해서다. 축제에 참여하는 동안 서천 주민들이 <한산모시짜기>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모시문화제를 기념하고 있는 조형물

미니 베틀 한산모시짜기

모시를 이용해 팔찌를 만들고 있는 관광객들

미니 베틀 한산모시짜기는 축제에 방문한 관광객들이 실제로 모시를 짤 수 있는 행사다. 평소에 접하기 힘든 모시를 이용해 팔찌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광장에는 100개의 미니 베틀이 놓이며, 도우미들은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베틀 앞에 앉아 모시 짜기를 기대하고 있다.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외국인들도 모시를 짜기 위해 이 먼 서천에 왔다. 한산을 찾은 사람들은 차례로 앉아 모시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만져보기까지 한다. 모시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시 만들기, 모시 째기, 모시 삼기, 모시날기, 모시 매기, 꾸리 감기, 모시 짜기 등 총 7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관광객들은 마지막 단계인 모시 짜기만 체험한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30분 내외의 시간이 지나면 멋진 팔찌가 만들어진다. 자신들이 만든 팔찌에 흐뭇해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고, 체험이 너무 빨리 끝났다며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모시를 짜 보고 싶었지만 사전 신청을 하지 못해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한산모시문화제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전 신청을 한 뒤 모시를 짜 보기를!


한산 모시 퍼레이드

서천 주민들과 함께 하는 퍼레이드

한산 모시 퍼레이드는 한산초등학교에서 한산모시관까지 짧은 거리를 행진하는 행사다. 서천군수를 비롯한 서천 주민들, 공연 참가자들, 사전 신청한 방문객들이 한 데 모여 한산모시문화제를 축하한다. 한산모시관 앞 광장에 모이면 사람들은 원을 이루어 농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종묘대제나 수원화성문화제에서 볼 수 있는 대규모 퍼레이드는 아니지만 서천다운 소박함이 드러나는 행사다.

행진이 끝나면 광장에서 모여 문화제가 열린 걸 축하한다

저산팔읍 길쌈놀이

저산팔읍 길쌈놀이에서 우승한 한산을 축하하는 장면

저산팔읍 (苧山八邑)은 모시의 생산이 활발했던 충남 남서부의 한산, 서천, 비인, 남포, 홍산, 정산, 부여, 임천을 가리키는 말이다. 팔읍은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서로 독립된 군현이었으나 1914년 이후 서천군, 부여군, 보령시, 청양군으로 편입되었다. 잊힌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1982년 열린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충남 대표로 나선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길쌈놀이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저산팔읍 길쌈놀이는 총 여섯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당인 모시 풀베기와 모시 삼기, 둘째 마당인 모시날기와 모시 매기, 셋째 마당인 꾸리 감기 마당, 넷째 마당인 모시 짜기, 다섯째 마당인 모시 등급 심사,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 마당인 우승자 축하마당 순으로 진행된다. 한산 모시가 일등을 하여 한산 사람들이 춤을 추며 우승을 축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산 모시 문화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저산팔읍 길쌈놀이

지역 축제가 열리면 주민들은 평소에 보기 힘든 초대가수들의 공연에 열광한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전통을 경시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사농공상이라 하여 농민들을 나라의 기틀로 보고 농사를 장려하였고, 숭유억불을 통해 승려들을 천민 취급하고 도시 내 오래된 사찰을 훼철하였다. 덕분에 고려시대까지 전통을 이어온 수많은 불교행사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한국 축제 문화는 유교에서 앞세우는 제사와 농민들의 풍악, 사물놀이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무사가 중심이 된 일본 문화에서는 상인들이 대접을 받았고 그들의 후원을 통해 거대한 규모의 마쓰리가 각 지역마다 독특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의 마쓰리는 농경문화가 아닐뿐더러 애초에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한 즐기는 문화였기 때문에 현대화가 된 지금도 잘 보존되고 계승되어 오고 있다.

한산 모시 문화제의 초대가수였던 박미경, 김종국, 강유진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여주는 축제가 부족한 것은 유학이 중심이 된 조선 사회보다 일본의 침략이 더 큰 요인을 차지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그들의 정책 이전에 전 국토를 황폐화시킨 임진왜란이 있었다. 조선 시대 전황을 수습하는 왕실과 먹고살기 바쁜 농민들이 전통문화의 보존에 신경 쓸 겨를이나 있었을까. 천민 취급을 받는 승려들 또한 억압받고 판국에 불교 행사를 유지할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지역마다 고유의 문화를 드러내는 일본의 마쓰리와 달리 한국의 각 지방들은 내세울 만한 전통이 많이 사라졌다. 식민지 시절을 거치는 와중에도 몇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 축제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미 명맥이 끊기긴 했지만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산모시를 바탕으로 '저산팔읍 길쌈놀이'라는 민속놀이를 창조한 충남도민들의 노력이 가상하기만 하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 한산모시짜기를 앞으로도 계속 지켜나갈 수 있는 서천이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한산모시관

한산모시를 체험할 수 있는 한옥

한산모시관은 잊혀 가는 우리 전통 의류인 모시 문화를 잇기 위해 건립된 박물관이다.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무려 1500년 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모시를 차례로 보면서 모시의 아름다움과 공정과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한산모시관 옆으로 기와집과 초가집이 서 있으며 이 곳에서 모시 짜기를 체험할 수도 있다. 한산 모시 짜기를 대대로 이어와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장인들의 작업 과정도 지켜볼 수 있다.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인 '한산모시짜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이 바로 한산모시관이다.

한산모시홍보관에서 질 좋은 한산모시를 구입할 수 있다.

한산모시관을 나와 오른쪽을 돌아보면 한산모시를 홍보하고 판매하는 한산모시홍보관이 있다. 2층 건물로 반듯하게 지어진 건물로 들어가면 서천의 특산물을 판매하는 조그만 상점과 한산모시를 직접 구매할 수 있는 판매장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한산모시짜기가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배경과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다른 무형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베틀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모시는 결코 값이 싸지 않다.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며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한산 모시를 구입해보자. 개량된 모시는 점점 더워지는 여름을 나기에 안성맞춤인 옷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야 할 전통문화, 한산모시짜기

한산소곡주갤러리

한산소곡주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갤러리

한산모시관을 나와 한산면의 중심지로 들어가는 길에 수많은 양조장을 만날 수 있다. 한산면은 모시뿐 아니라 전통주로도 유명한 곳이다. 백제 시절부터 전해왔다는 공법으로 만들어진 한산소곡주는 정통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었다. 소곡주의 가치는 1512년에 편찬된 삼국사기 정덕본 (正德本)에 등장할 정도니 그 오랜 역사를 짐작할 만하다.

"무왕 37년 3월 왕이 조정 신하들과 백마강 부근에서 소곡주를 마시어 그 흥이 극치에 달했다."

시음을 도와준 직원분

조용한 농촌 마을인 한산면에 영업을 하고 있는 양조장의 수는 60개가 넘는다. 서천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한산소곡주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다. 한산면이 소곡주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서천 평야의 기름진 땅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농촌 사회가 벼농사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논을 뒤엎고 벼 대신 다른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과 달리 서천은 여전히 벼농사가 중심인 땅이다. (덕분에 서천에서 내세울만한 특산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한산면에 가는 길에 마음에 드는 양조장이 눈에 띄면 한산소곡주를 시음해보고 구입하는 것도 좋다. 어떤 양조장에 들릴지 결정을 못 내린 사람들은 한산농협 옆 한산소곡주갤러리에 방문하면 된다.

한산 소곡주를 생산하는 양조장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양조장에서 빚은 술을 구입할 수도 있다.

한산소곡주갤러리는 관광객들이 다양한 한산소곡주를 마셔보고 구입할 수 있도록 설립되었다. 특정 양조장에 속한 박물관이 아니라 한산면 내 67개의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소곡주를 전시∙판매하고 있다. 같은 한산소곡주라도 맛이 다른 이유는 디자인은 같지만 양조장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맘에 드는 한산소곡주를 발견했다면 양조장의 이름을 기억하고 반드시 그곳에서 구입해야 한다.

서천의 또 다른 자랑, 한산 소곡주

한산소곡주는 16%의 소곡주와 41%의 소곡 화주로 나뉜다. 갤러리에서 시음할 수 있는 소곡주는 총 5개의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모든 양조장의 술들을 맛볼 수 없기에 시음할 수 있는 소곡주는 순번을 정해서 제공된다고 한다. 소주와 비슷한 도수임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깔끔해 목으로 잘 넘어가는 것이 소곡주의 특징이다. 도수가 꽤 높은데도 마시고 나서 취기가 잘 돌지 않아 천천히 맛을 음미할 수도 있다. 다섯 종류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술을 구입하려 했으나 갤러리에선 이미 동이 난 상태다. 결국 양조장의 이름과 전화번호만 얻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집에 돌아간 후 다시 맛 볼 소곡주의 맛을 기억하며 갤러리를 나왔다.

한산면의 유일한 게스트하우스 노란달팽이와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소곡주 정거장

장항읍에서 쓸쓸히 먹은 저녁식사

장항역엔 더 이상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다

서천의 유서 깊은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 난 뒤 장항으로 향했다. 장항읍은 장항선의 유래가 된 곳이자 몇 년 전만 해도 철도의 종점이었던 상징적인 곳이다. 한솔제지, 장항제련소를 비롯한 산업시설이 이 곳에 건설되어 서천의 중흥기를 이끌 정도였다. 동해에 포항이 있다면 서해엔 장항이 있다고 할까. 하지만 장항의 산업시설이 쇠퇴하고 폐쇄되기까지 하자 장항역은 화물역으로 용도가 바뀌고 결국 폐역이 되고 만다. 현재는 한적한 어촌마을 아니 심하게 말하면 유령도시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장항읍의 우정식당에서 먹은 돼지국밥과 손주의 애정어린 편지

도시에선 아직도 이른 시간인 오후 8시는 장항이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늦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정처 없이 방황하던 터라 불이 켜진 곳이면 바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우정식당이 눈에 띈다. 우정식당은 혼자 찾아온 여행객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요리를 만들어주는 식당이다. 장항의 오랜 역사와 함께한 식당인 듯 식당 내부에도 세월이 묻어있다. 문을 닫을 시각이지만 아주머니는 돼지국밥 한 그릇 달라는 내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장항의 늦은 밤에는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식당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장항의 넉넉한 인심 덕분에 돼지국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문을 나서려는 찰나 손주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눈에 띈다.

"할머니 대박 나서 로버트 사주세요"

-우주최강 귀요미 손자 심기현

우정식당
전화번호: 041-956-1637
메뉴: 돼지국밥
일요일인데도 한적한 장항읍의 모습

늦은 밤에 미리 예약해 둔 숙소로 향하면서 장항읍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본다. 전성기 시절엔 군청이 들어선 서천읍보다 훨씬 큰 규모였던 장항읍은 점점 더 희망을 잃어가는 땅이 되어가고 있다. 수많은 공장이 장항을 떠난 지 오래고, 어획량은 감소해 살고 있던 어민들마저 고향을 떠나는 현실이다. 게다가 금강하구둑에 이어 2018년 12월 동백 대교가 건설되면서 상권마저 금강 너머 군산에 빼앗기고 만다. 마치 인구 감소로 인해 많은 문제에 직면할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는 듯하다. 장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서천 여행 둘째 날은 장항을 걸으며 그 역사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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