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 하나, 그의 사상이 담긴 명작 <부활>
<전쟁과 평화>를 읽고 나서 제일 아쉬웠던 건 <안나 카레니나>의 줄거리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톨스토이의 걸작이라는 두 작품을 비교하고 톨스토이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를 해나갔는지 알고 싶었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입한 책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하나밖에 없는 인생에 다양한 작품을 읽는 게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 그의 또 다른 걸작인 <부활>을 읽고자 했다. 다른 두 작품이 대작이라는 예찬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반면, <부활>은 ‘톨스토이를 파문시킨 문제작’이라는 평이 책 표지에 쓰여 있었다. 지금까지 상상했던 톨스토이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작품일 거라는 기대 속에 <부활>을 읽게 되었으며, 소설의 줄거리와 작품에 드러난 톨스토이의 사상 모두 흥미로웠다.
네흘류도프 공작은 러시아의 다른 귀족들처럼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젊은 시절에는 토지 사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한 때 철학과 미술에 몰두하며 삶의 목적을 찾으려 했지만 방탕한 삶을 살았으며, 현재는 관료 생활도 하기 싫어하는 백수 상태에 귀족의 딸인 코르차기나의 구애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마슬로바 (카츄사)는 미혼모 농노의 딸로 지주였던 소피아 이바노브나의 양녀로 자랐다. 카츄사는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주 자매의 조카에 의해 범해져 임신을 하게 된다. 이후 카츄사는 예전의 삶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와 하녀로 지내다 출산을 하게 되지만, 아이는 양육원에 보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마슬로바는 한 점원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결혼까지 약속했던 그는 아무 말 없이 니즈니노브고로드로 떠나 버렸다. 이후 마슬로바는 두 군데의 유곽을 거치고 한 번 입원하는 등 사창가에 종사하게 된다. 유곽 생활을 하게 된 지 칠 년째, 그녀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에 상인인 스멜코프를 죽였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죄목은 스멜코프의 돈을 강탈할 목적으로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었다. 피의자로 기소된 사람은 마슬로바와 호텔의 청소부인 보츠코바와 농민인 카르틴킨이었다. 마슬로바는 스멜코프가 호텔에서 그녀를 계속 붙잡아두는 바람에 보츠코보와 카르틴킨이 준 수면제를 먹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보츠코바와 카르틴킨도 수면제를 줬을 뿐이고 뒤에는 수면제조차 주지 않았다고 말하며 죄를 부인했다.
때마침 네흘류도프가 이 사건의 배심원으로 배정을 받게 되었고, 그는 마슬로바를 보고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그는 고모의 집에서 머물 동안 카츄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군인이 된 후 방탕한 생활을 접하고 나서 카츄사를 단지 욕망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휴가를 받아 고모 집에 들른 그는 카츄사와 관계를 맺은 뒤 다음 날 100 루블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 그녀와 이별한다.
십 년 만에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 네흘류도프는 그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 참회하기 시작한다. 그는 배심원들과 회의를 하면서 카츄사가 무고하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츄사와의 관계가 들통날까 봐 그녀를 강력히 옹호하지는 못 했다. 배심원들은 카츄사가 무죄라고 결론을 내리고 답변서를 제출했지만 ‘유죄이나 살해 의도는 없었음’이라는 단서를 표기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결국 마슬로바는 징역 4년형을 받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재판이 끝난 뒤 그녀를 만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한 뒤 그녀를 돕기 위해 청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감옥까지 찾아가고 그의 생각을 전달하지만 마슬로바는 경멸적인 태도로 그를 대한다. 그는 감옥을 왕래하며 교도소의 참상과 죄 없이 갇힌 사람들을 목도하고 국가의 폭력성과 형벌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해 느끼게 된다. 마슬로바의 부탁으로 베라 예프레모브나와 멘쇼프 부자를 도와주면서 그의 삶도 점점 변화하기 시작한다. 네흘류도프는 재판의 판결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며 마슬로바에게 끊임없이 결혼을 약속한다.
네흘류도프는 젊었을 때 자기가 품었던 토지 사유가 부당하다는 생각에 확신을 갖고 소유하고 있는 영지에 찾아가 농민들에게 협동조합을 제안하고 공동으로 농사를 짓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비록 농민들이 그의 생각을 이해하지도 못 했고 받아들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네흘류도프는 조그만 변화에 만족한다. 마슬로바가 무죄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그는 장관을 비롯한 고위공무원과 황제에게 청원을 올리기도 한다. 네흘류도프의 부탁으로 마슬로바는 병원의 보조 간병인으로 일하게 되지만, 남자 간호사와 놀아났다는 죄명으로 무고하게 병원에서 쫓겨나 원래 감옥으로 돌아가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의 무죄를 위해 다양한 귀족을 만나고, 형무소에서 억울하게 붙잡힌 사람들을 위해 애쓴다. 아무런 죄 없이 감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슬로바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게 되며, 폭염 중에 유형을 떠나면서 죄수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평민들과 같은 기차에 타며 그동안 귀족들과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는다. 귀족들의 삶이 얼마나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되어있는지 알게 된 후, 그는 높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감옥생활에서 죄수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감옥 생활이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타락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긴다.
마슬로바도 네흘류도프를 만나게 된 뒤 점점 원래의 선했던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그녀는 감옥에서 만난 시몬손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지만, 네흘류도프는 과거에 저지른 일과 아량 때문에 그녀에게 청혼하였다는 걸 알게 된다. 네흘류도프의 헌신과 시몬손의 사랑으로 카츄사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선량한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유형지로 떠나는 여정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친구 셀레닌이 보낸 편지가 네흘류도프에게 전해진다. 셀레닌은 네흘류도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을 전하며 마슬로바가 사면장을 받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슬로바는 사면될 거라는 소식에도 기뻐하지 않고 자기는 시베리아에서 시몬손과 함께 살 거라고 말한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사와의 관계가 끝난 후 호텔에서 성경을 들춰보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끔찍한 죄악으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물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을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도 용서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차례 반복해도 용서하라.”
- 마태복음 18장 21~22절
어째서 너는 네 형제 눈의 티끌은 보면서
네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마태복음 7장 3절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복음 8장 7절
제자는 그 스승보다 높지 못하나,
완전해진다면 그 스승과 같아지리라.
- 누가복음 6장 40절
톨스토이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부활>이다. <전쟁과 평화>가 1867년, <안나 카레니나>가 1877년, <부활>이 1899년에 출판되었다. <전쟁과 평화>가 나폴레옹 전쟁을 생생히 그려내고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역사관을 내세운 작품이라면, <안나 카레니나>가 허세로 가득 찬 러시아 상류층의 문화를 비판하고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를 드러낸 사회적 소설이다. <부활> 또한 러시아 사회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이지만, 소설의 예술성에 집중하기보다 사회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파헤치고 깨달음을 준다는 면에서 소설이자 사상서라고 볼 수 있다.
앞선 두 개의 작품을 읽으면서 톨스토이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과 소설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는 형식에 감동을 느낀 이라면, <부활>을 접했을 때 당혹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19세기가 거의 끝나가던 시점, 러시아의 귀족 사회와 제정 통치에 대한 불만이 곳곳에서 제기될 때 톨스토이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은 <부활>의 주인공인 네흘류도프에 의해 드러나게 되며, 네흘류도프가 최후에 내린 결론은 러시아라는 나라뿐 아니라 러시아 국민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심리 상태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자수라는 결론을 내린 것처럼, 톨스토이도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네흘류도프의 심리 변화를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고 그가 내린 결론을 끝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부활>을 읽으면서 톨스토이의 작품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인공인 네흘류도프의 심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사 (마슬로바)의 삶을 타락시켰다는 죄책감에 그녀를 따라 시베리아로 떠나게 되지만, 카츄사는 시몬손과 함께 시베리아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네흘류도프는 둘의 관계가 끝난 뒤 성서를 펼쳐 읽기 시작한다. 네흘류도프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카츄사의 재판이 시작되고 죄 없는 사람들이 법이라는 이름 하에 투옥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참상에 대해 깨닫게 된다.
항상 모든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 타인을 벌하고 교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죄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이제야 네흘류도프는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타인을 심판하고 벌주는 합법적 범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타락한 사람도 여전히 사랑하고 연민으로 보듬어주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우리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며 삶은 쾌락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확신 속에 살고 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나머지도 곁들여 받게 되리라. 그런데 우리는 ‘나머지’ 것들만 찾고 있으니 끝내 찾지 못하는 것이다.
<부활>은 형식보다는 내용에 지나치게 많은 무게가 실려 균형을 잃고 있다. 국가의 폭력성에 대한 저항,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거부, 사법제도와 형벌제도의 불합리성 폭로 등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부활>이 담고 있는 내용 자체가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부활>을 집필하던 당시 톨스토이는 유명한 소설가가 아닌 인류의 스승이자 사상가로 여겨졌다. 귀족 출신의 사회최고지도층 인사가 <부활>을 통해 국가와 종교를 부정하고 사회 세계 자체를 거부하고 있으니 제정 러시아는 톨스토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부활>에 등장하는 교회 비판이 빌미가 되어 1902년에 톨스토이는 정교회 종무원에 의해 파문당하게 된다.
<부활>을 읽고 나서 네흘류도프가 최종적으로 얻은 결론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그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접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을 얻게 되며, 그 해결책이 지극히 단순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개인이 자신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로 결심할 수만 있다면 네흘류도프가 내린 결론이 옳을 수 있다. 그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며, 실수한 사람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권리가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에게 주어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저질러지는 수많은 범죄와 부패를 보면서 저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는다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까라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실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수많은 독재자들을 용서한다고 해서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
네흘류도프도 러시아 상류층의 태도와 그들이 가진 생각에 대해 경멸하고 있으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귀족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 또한 러시아 귀족들처럼 죄를 지으면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죄인들이 어떻게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 감옥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하지만 <부활>은 법에 의해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사에게 지은 죄에 대해 반성하고 자신의 삶을 걸고 회개하였으며, 카츄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 ‘교도소’는 죄인들을 교화하여 사회에 다시 나갔을 때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개인이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도소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출소하고 난 뒤 범죄자들이 다시 죄를 짓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상이 교화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징역형을 통해 죄인을 벌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오래전에 <부활>을 통해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이를 따르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 사람을 감화시키고 그를 바꾸는 데는 많은 비용과 오랜 시간이 들기 때문에 판사의 판결 하나로 처벌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본 뮤지컬 <포미니츠>에서 본 크뤼거와 제니가 떠오른다. 파멸의 삶을 살고 있던 제니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갖은 노력을 다 한 크뤼거가 결국 제니를 감화시키는 이야기다. 이미 암울한 삶의 늪에 빠진 ‘한’ 사람을 바꾸는 데도 이렇게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인구가 엄청나게 불어난 현대 사회에서 네흘류도프가 말한 방법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결국 개개인이 네흘류도프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해 고찰하고 <부활>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삶을 살 거라는 결심을 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바뀌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부활>을 통해 제시한 삶의 방향에 대해 공감하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간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또한 천천히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북유럽의 삶에 대해 동경하고 그들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북유럽이 이룩한 사회도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북유럽인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현재와 같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 결국 <부활>에서 네흘류도프가 보여준 헌신과 그가 내린 결론을 단지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활>을 읽고 네흘류도프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도 점점 더 아름답게 바뀔 수 있다. 톨스토이 또한 방탕한 삶을 살다가 노년에 들어서야 예수가 말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점에서 <부활>을 쓴 것이 아닐까. <부활>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에 비해 분량이 짧지만 3대 걸작으로 꼽힌 이유는 작품에 담긴 사상이 엄청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스토옙스키와 마찬가지로 톨스토이도 그의 작품에서 러시아의 두 대도시인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를 소설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부활>은 네흘류도프가 카츄사를 따라 유형지로 떠나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시베리아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중 니즈니 노브 고르도, 페름, 튜멘, 예카테린부르크, 톰스크 등의 도시가 등장한다. 니즈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거치지 않는 도시지만 다른 도시들은 열차가 정차하며 시베리아에 있음에도 상당히 규모가 큰 대도시기 때문에 한 번쯤 들려볼 만하다. 굳이 이 도시에 들리지 않더라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네흘류도프와 카츄사가 떠난 고난의 길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코로나가 끝난 이후 모스크바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 <부활>을 읽으며 횡단철도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