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산하가 붉게 빛나는 가을, 나는 내장산으로 떠난다
아직 위드 코로나를 준비하고 있을 때 여행기를 올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일인 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백신을 맞고 조금씩 밖으로 나가고 있는 이때 한국의 좋은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해외여행도 가기 힘든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구나라고 알게 된다면 오히려 국내여행을 소개하기에 더 좋은 시기가 아닐까 싶다.
백양사로 떠난 건 2020년 11월 초였다. 매년 가을이 되면 매 주말마다 전국의 산으로 떠나곤 하는데, 대한민국 서남쪽 끝 전라남도에 있는 백양사엔 쉽게 발이 닿지 않았다.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백양사가 위치한 장성에 딱히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라 나중에 가야지 생각하며 매번 백양사 단풍 여행을 미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백양사로 떠나게 된 건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2019년 10월 이탈리아로 2주간 여행을 떠난 뒤, 남유럽에 대한 환상이 온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럽 이래 봤자 체코부터 그리스까지 이어지는 동유럽 여행을 떠난 게 다였던 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유럽 즉, 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 같은 유명한 나라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나이가 30이 넘어서야 간 이탈리아는 "유럽이 다 똑같겠지 뭐~"라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교과서에 나옴직한 베니스 운하・로마 콜로세움・피렌체 두오모 성당・피사의 사탑 등의 건축물은 이탈리아가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 당분간 시간이 되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귀국하자마자 2020년 10월에 스페인으로 3주간 여행을 떠나는 항공원을 끊었다. 100만 원이 넘는 거금을 들여 아시아나항공을 타고 바르셀로나로 곧장 떠나는 항공권을 구입했지만 돈이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가우디의 건축물과 그라나다의 사그라다 파밀리아까지, 스페인 전역을 한 달 동안 돌아봐도 시간이 부족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설렘이 유지된 건 고작 반년이 지난 뒤였다.
메르스나 사스처럼 국지적으로 유행하고 끝날 거라는 기대와 달리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휩쓸고 여행 산업에 막강한 타격을 주었다. 한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는 문을 걸어 잠그고 방역 체계를 가동하기 시작했으며, 내 인생의 낙이었던 여행 또한 즐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 나에겐 여전히 그동안 여행을 가지 못한 아쉬움이 쌓여만 가고 있다.
스페인으로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조심스럽게 집 밖으로 나갔다. 원래는 스페인의 따스한 햇살 속에서 스페인의 아름다운 도시를 사진으로 담기 바빴을 시간이었다. 중부 지방을 붉게 물들인 단풍은 어느덧 남쪽으로 내려와 내장산과 무등산을 비롯한 남쪽 지방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백양사 단풍을 언제 기약할 수 있겠나 싶어 급하게 계획을 짠 뒤 금요일 밤에 장성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다행히 수서에서 익산으로 가는 기차는 수도 없이 많았고, 익산에서 장성으로 가는 무궁화호도 있어 오후 10시가 되기 전에 장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는 장성 백양사 단풍을 보고 난 뒤 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필암서원에 들른 뒤 광주에서 하루를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지 않아 저질체력이 된 데다 재택근무에 익숙해져 집돌이가 된 나에게 오랜만의 주말 이틀 여행은 너무나 힘든 일정이었다. 하루 종일 백양사 단풍을 찍느라 손목도 너무 아파 단풍만 보고 곧장 성남으로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체력이라는 핑계를 들었지만 여행을 급하게 끝낸 이유는 백양사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워 이후의 일정에서 감동을 느끼기 어려웠다는 이유도 있었다.
장성읍에서 백양사로 향하는 버스는 오전 6시 30분 정도에 있었다. 백양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시 20분 정도로 아침 일찍이라 그런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단풍을 여유롭게 보려면 늦잠 자지 말고 서둘러야 한다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새벽녘의 백암산은 아직 햇살이 비치지 않아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단풍 너머로 보이는 백암산의 기암괴석인 백학봉에 천천히 햇빛이 쪼이기 시작하니 단풍의 모습도 천천히 바뀌는 듯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백암산의 상징인 백양사로 향했다. 백양사 쌍계루는 백암산의 단풍을 상징하는 명소다. '백양사 단풍'이라고 검색하면 열에 아홉은 쌍계루 앞 연못에 비친 단풍의 사진이다. 아직 쌍계루까지 햇살이 비치지 않아 웹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을 직접 담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쌍계루를 담기 위해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지 정면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아쉬운 마음에 백양사 경내를 둘러본다. 비록 쌍계루만큼 멋진 광경을 눈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붉게 물든 단풍이 내 마음을 위로해준다. 백학봉은 단풍과 어우러진 백양사를 보며 서로의 매력에 대해 논하며 경쟁하는 듯한 모습이다. 백양사는 백제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쌍계루를 비롯한 많은 목조건물이 소실되어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도 얼마 되지 않는다. 보물로 지정된 목조건물은 전무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소요대사탑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남아 백양사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하루 종일 쌍계루 주변을 거닐며 백양사의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연인이 있다면 단풍 아래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홀로 여행 온 나에게 그런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대신 백양사를 둘러싼 능선을 걸어보는 백양사 종주코스를 통해 백암산의 단풍을 만끽하기로 했다. 백양사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약사암이 나오며, 이곳에서 약수를 마시며 백양사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약사암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백암산의 상징인 백학봉이 나온다. 아래에서 본 백학봉의 웅장한 풍경은 온 데 간데없고 멀리 내장산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봉우리만 눈에 띌 뿐이다. 몇 년 전엔 내장산의 단풍을 보며 약간 실망하기도 했는데 백암산의 단풍은 명성에 걸맞게 환상적인 모습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학봉까지 오르면 남은 길은 상대적으로 평탄하고 쉬운 길이다. 상왕봉-사자봉-청류암을 거쳐 가인마을로 내려오는 종주코스는 8.1km이며 5시간 30분이 걸린다. 능선을 따라 걸으면 이미 수확을 끝낸 장성의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장산 쪽을 바라보면 전라도 답지 않은 험난한 산세가 보이며 울긋불긋한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를 끝으로 대한민국의 단풍은 막을 내리기 때문에 꼼짝없이 내년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가인마을로 내려오자 백암산의 계곡을 따라 조용히 살아오는 주민들의 삶을 느낄 수 있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린 주왕산의 내원마을이 철거된 것처럼 이곳 또한 주민들이 떠나면 국립공원의 환경을 보전한다는 이유로 지도 상에서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관광객들은 백양사를 다녀온 뒤 백양사 정류소 부근에서 식사를 하며 가인마을까지 가는 건 일부 등산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점점 수도권으로 모이는 현실 앞에 가인마을의 미래 또한 어둡기만 하다.
오후 3시쯤 되자 백양사의 단풍을 보러 온 차량들로 인해 좁은 도로는 수많은 차량들로 붐빌 틈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성군의 농어촌버스가 제 시간을 지킬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백양사의 단풍으로 여행의 소기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장성읍 대신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백양사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이때만 해도 내 선택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백양사역으로 향하는 버스 기사 분이 처음에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더니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공간으로 길을 바꾸어 운전하기 시작했다. 옆 도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빨리 움직이는 걸 보고 기사 분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몇 분 지나자 버스는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한 승용차가 대충 주차해 버스가 통과할 만한 공간이 나지 않았고 버스는 멈춘 상태로 차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사 분께서 내려 차 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이제 막 하산한 상태라 급하게 뛰어 와도 대략 30분이라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 동안 허겁지겁 뛰어 온 아주머니가 차에 오르는 게 보인다. 수백 명의 사람이 차 하나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다는 사실이 우습기만 하다.
이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양사역에 도착해 익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생각보다 백양사역에 정차하는 무궁화호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차 문제로 버스가 움직일 수만 있었어도 좀 더 빨리 집에 도착해 쉬거나 필암서원에 들릴 여유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백양사 단풍에 흠뻑 빠져 행복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도, 불만도 없었다. 단지 2020년의 단풍이 이렇게 끝나가는 데 대한 아쉬움만 진하게 남아있었다.
2021년의 단풍이 성큼 다가온 지금, 다시 한번 대한민국 단풍 지도를 살펴본다. 오대산의 단풍, 문경새재의 단풍, 선운산의 단풍 그리고 작년에 다녀온 백양사의 단풍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단풍이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올해는 오대산 월정사 대신 소금강을 통해 단풍을 보러 갈까, 아니면 오랜만에 계룡산에 찾아 지금껏 보지 못 한 계룡산의 가을을 만끽해볼까. 평소엔 아무렇지 않았던 국내여행이지만, 대한민국의 가을은 마치 해외여행을 떠날 때만큼 나를 설레게 하는 계절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