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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손톱 Aug 29. 2024

간호사가 왜
프랑스에서 지리학을 배워요? - 2

02. 프랑스에서도 갈팡질팡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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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어서 쓰자면, 백수였던 나는 골방에서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이런 계획을 세우게 된다.

'공기업에 들어가서 3년을 일한 다음 휴직계를 1년 내고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가서 프랑스어를 배우자! 그리고 그 뒤의 인생은 그때 알아서 하자!'

도대체 갑자기 이게 무슨 계획인고 싶지만, 일단 하고 싶은 걸 찾지 못했고 더 이상 그런 유니콘 같은 걸 찾겠답시고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월세를 낼 돈도 필요했고, 이제 이십대 후반이니 그럴듯한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4개월간 단기 계약직으로 공기업에서 일했을 근무 환경 자체는 좋아 보였다. 3년 동안 거기서 경력을 쌓음과 동시에 틈틈이 프랑스어를 공부한 뒤, 어느 정도 쓸만한 실력으로 프랑스에 가서 어학연수를 하는 계획은 그럴듯해 보였다. 그래서 필기시험공부를 시작했고 동시에 숨구멍처럼 프랑스어 공부도 조금씩 했다.


2

그러다가 터닝포인트를 만났다. 그 당시 난 백수였기 때문에 문화활동을 할 시간이 있었다. 아늑한 원룸에서 드라마를 볼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본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거기 나오는 여주인공 '채송아'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경영대를 4학년까지인가 다니다가 바이올린이 너무 하고 싶어서 다시 입시를 준비해서 삼수를 하고 음대에 들어간 캐릭터였는데 드라마에서는 음대 생활과 인턴 생활, 그 사이에 피어난 로맨스와 고뇌 같은 것들이 주로 나오지 그 이전 이야기인 삼수는 그저 배경처럼 언급될 뿐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여주인공의 배경 설정, 그러니까 바이올린이 너무 좋아서 졸업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수를 해가면서까지 음대에 입학했다는 것이 너무 간지철철, 멋짐폭발이었다. 심지어 22살, 23살 이때는 아주 요상한 나이가 아니던가. 실상 아주 어린 나이이지만 당사자는 '아, 난 너무 나이 들었어, 너무 늦었어'하고 혼자 탄식하는. 그 요상한 나이에 새로 도전을 하다니. 입학 후에도 동기들처럼 바이올린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꿋꿋이 애정으로 밀어붙이는 주인공을 보면서 '아, 저렇게 좋아하는 무언가를 향해서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문득 그간 나의 행태가 떠올랐다. NCS 시험을 준비하는 와중에 취업에 하등 쓸모없는 프랑스어 문법책을 들여다보는 나를, 취업 준비하는 시간보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 주객이 전도가 되어버린 이 상황을. 생각보다 프랑스어를 많이 좋아하고 있음을 체감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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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그 당시에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 법륜스님이 쓰신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고 있었는데,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법륜스님이 하신 말씀도 나를 자극했다. 시간이 지나서 어떤 말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젊은이가 벌써부터 현실에 고개를 숙이면 어쩌려고 그러냐' 뭐 이런 뉘앙스였던 것 같다. 그것이 공기업 입사라는 목표를 다시 검토해보게 했고, '왜 프랑스를 입사 후 3년 뒤에 가야 해? 어차피 지금 시간 많은데 지금 가면 안 돼?'라는 물음을 던지게 했으며, '되지.'라는 답을 내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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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년간의 프랑스 어학연수를 계획하게 되었고, 다음 해 학기 시작에 맞춰 10개월 뒤에 떠나게 된다.

그중 8개월 동안은 건강검진 센터에서 점심까지 일하고, 오후에는 프랑스어를 공부하거나 유학을 준비하거나 쉬었다. 나에게는 이때가 가장 이상적인 생활이었는데 일과 내 생활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오전에 일을 마치면 오후에는 다 내 시간이니 일 때문에 피곤하다고 해도 자고 일어나서 뭔가를 할 시간이 있었다. 일도 재밌었다. 사람이 죽어나갈 일이 없으니 마음이 괴로울 일도 없고 동료들도 좋았다. 나는 내향적이라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었다. 첫 직장부터 이때까지 직장 생활을 길게 하지 못했기에 경력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지는 몰라도, 각기 다른 직장들을 경험하면서 나에게 맞는 직장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프랑스로 떠나게 된 것이다, 1년 간의 여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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