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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손톱 Sep 02. 2024

간호사가 왜
프랑스에서 지리학을 배워요? - 3

03 프랑스에서도 갈팡질팡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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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뭐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는가? 아무것도.

내가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서인데 그것은 내 커리어에는 득이 되지 않는다.

간호사와 프랑스어는 크게 관련이 없다. 뭐 당연지사 외국어를 잘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 외국어란 것은 영어이고 그 외에는 러시아어나 아랍어가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언어는 크게 중요치 않다.

그렇다면 프랑스어와 관련된 직업을 갖기 위해 프랑스로 간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내 취미 생활을 위해서 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취미 생활을 즐길 실력을 갖기 위해. 앞서 꿈을 찾겠답시고 근 1년간을 백수로 지냈다. 물론 그 기간에는 꿈을 찾느라 헤매는 시간 + 취업 준비 시간이 합쳐져 있다. 그 1년간 좋아하는 일이 없다면 취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야 삶에 생기가 돌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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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떤 취미?

프랑스어 번역이었다. 취업 준비할 때 하던 것은 주로 프랑스어 문법 공부였다. 아직 실력이 충분치 않았기에 뭘 번역할래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원서를 매일 정말 조금씩(한 단란, 때로는 한 문장) 번역했는데 조금씩 한 덕에 감질맛 나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재미있었다. 프랑스어 실력이 조금 더 는다면 아주 좋은 취미가 될 것 같았는데 이런 식으로 다른 것과 병행해서 공부하다가는 번역을 하기 위한 프랑스어 실력을 갖추는 게 한참 걸릴 것 같았다. 그리하여 빠른 프랑스어 실력 향상을 위해 어학연수 결심한 것이다.

그럼 왜 직업으로서의 번역은 아닌가? 직업으로서의 번역은 멋지다. 그러나 번역을 업으로 삼게 되는 것 자체가 어려워 보일뿐더러 일거리가 꾸준히 들어올지, 생계가 유지가 될지, 그 정도로 내가 실력을 쌓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는데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다. 번역이라는 것이 이력을 필수로 하는 일은 아니더라도 이력을 필요로 하는 듯 보였다. 이를테면 어학연수만 한 사람보다는 현지에서 관련 학위를 마친 사람을, 아니면 한국에서 통번역대학원을 나온 사람을 선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물론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런 이력을 쌓을 만큼의 시간적, 재정적 여유가 없다고 느꼈고, 그런 이력을 쌓는다고 해서 번역일을 많이 의뢰받을 만큼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만성 자신감 부족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취미 번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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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로 나는 어학연수를 떠났고 거기서 10개월간의 어학연수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즐거웠고 행복했다. 내 20대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한 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지 않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는 것과 거기서 만난 유쾌한 어학원 친구들이 내 한 해를 즐겁게 꾸며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갈림길에 섰다.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여기서 1년 더 공부를 할 것인가?

원래 계획은 1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년 정도의 방황은 면접장에서 잘 둘러대며 포장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우선, 나는 내 프랑스어 실력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이렇게 즐거운 상태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버리면 분명 아쉬움이 남을 것이고, 그럼 직장생활이 권태로울 때마다 매번 프랑스 생활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이 나를 괴롭힐 같았다. 차라리 여기서 갖은 고생을 하고 프랑스에 '프'자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이쪽 방향으로 오줌도 누고 싶지 않을 때, 그만큼 어떠한 미련도 없을 때 떠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년을 더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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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고민을 물고 온다. 자, 그럼 어디에서 공부할 것이냐. 어학원에서 1년 더? 아니면 대학에 입학?

당연히 어학원을 1년 더 다녀야지! 싶었지만 그럼 또다시 해피 1년을 보내게 될 테고, 미련이 짙게 남을 터이다. 게다가 학비도 비쌌다. 

반면 대학을 간다면, 물론 대학에 합격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수업 난이도가 더 어려워질테니 프랑스어 실력은 더 오를지 모르겠지만 생활이 괴로울 것이다. 자괴감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미련이 떨어지지 않을까? 한국에 뒤도 안 돌아보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학비도 싸다. 그래서 대학에 지원하게 되었다. 글로 써놓고 보니 굉장히 신속하게 결단을 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고 고심하고 또 고심했고 주변에 조언을 청하기도 했다.

대학은 내가 사는 도시에 있는 대학에 지원하기로 했다. 나는 이 도시가 좋으니까. 이사하기도 귀찮으니까. 그럼 무슨 과를 선택한담? 간호학과는 고민도 안 했다. 이미 배운 것을 또 배우고 싶지는 않았기에. 언어학 같은 것에 관심은 있었지만 요구하는 언어 수준이 높았고 그러려면 자격시험을 따로 쳐야 했는데 너무 귀찮았다.

대학 홈페이지에 가서 학과별 커리큘럼을 쭉 훑어보니 지리학과 과목이 가장 재미있어 보였다. 그래서 선택했다. 그렇다, 사실 잘 모르고 지원을 하긴 했다. 어차피 1년 다니고 그만둘 건데 뭘,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운좋게 지리학과에 붙어서 학사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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