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프랑스에서도 갈팡질팡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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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뭐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는가? 아무것도.
내가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서인데 그것은 내 커리어에는 득이 되지 않는다.
간호사와 프랑스어는 크게 관련이 없다. 뭐 당연지사 외국어를 잘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 외국어란 것은 영어이고 그 외에는 러시아어나 아랍어가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언어는 크게 중요치 않다.
그렇다면 프랑스어와 관련된 직업을 갖기 위해 프랑스로 간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내 취미 생활을 위해서 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취미 생활을 즐길 실력을 갖기 위해. 앞서 꿈을 찾겠답시고 근 1년간을 백수로 지냈다. 물론 그 기간에는 꿈을 찾느라 헤매는 시간 + 취업 준비 시간이 합쳐져 있다. 그 1년간 좋아하는 일이 없다면 취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야 삶에 생기가 돌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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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떤 취미?
프랑스어 번역이었다. 취업 준비할 때 하던 것은 주로 프랑스어 문법 공부였다. 아직 실력이 충분치 않았기에 뭘 번역할래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원서를 매일 정말 조금씩(한 단란, 때로는 한 문장) 번역했는데 조금씩 한 덕에 감질맛 나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재미있었다. 프랑스어 실력이 조금 더 는다면 아주 좋은 취미가 될 것 같았는데 이런 식으로 다른 것과 병행해서 공부하다가는 번역을 하기 위한 프랑스어 실력을 갖추는 게 한참 걸릴 것 같았다. 그리하여 빠른 프랑스어 실력 향상을 위해 어학연수 결심한 것이다.
그럼 왜 직업으로서의 번역은 아닌가? 직업으로서의 번역은 멋지다. 그러나 번역을 업으로 삼게 되는 것 자체가 어려워 보일뿐더러 일거리가 꾸준히 들어올지, 생계가 유지가 될지, 그 정도로 내가 실력을 쌓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는데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다. 번역이라는 것이 이력을 필수로 하는 일은 아니더라도 이력을 필요로 하는 듯 보였다. 이를테면 어학연수만 한 사람보다는 현지에서 관련 학위를 마친 사람을, 아니면 한국에서 통번역대학원을 나온 사람을 더 선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물론 내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런 이력을 쌓을 만큼의 시간적, 재정적 여유가 없다고 느꼈고, 그런 이력을 쌓는다고 해서 번역일을 많이 의뢰받을 만큼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만성 자신감 부족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취미 번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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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로 나는 어학연수를 떠났고 거기서 10개월간의 어학연수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즐거웠고 행복했다. 내 20대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한 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지 않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는 것과 거기서 만난 유쾌한 어학원 친구들이 내 한 해를 즐겁게 꾸며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갈림길에 섰다.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여기서 1년 더 공부를 할 것인가?
원래 계획은 1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년 정도의 방황은 면접장에서 잘 둘러대며 포장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우선, 나는 내 프랑스어 실력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이렇게 즐거운 상태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버리면 분명 아쉬움이 남을 것이고, 그럼 직장생활이 권태로울 때마다 매번 프랑스 생활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이 나를 괴롭힐 것 같았다. 차라리 여기서 갖은 고생을 하고 프랑스에 '프'자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이쪽 방향으로 오줌도 누고 싶지 않을 때, 그만큼 어떠한 미련도 없을 때 떠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년을 더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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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고민을 물고 온다. 자, 그럼 어디에서 공부할 것이냐. 어학원에서 1년 더? 아니면 대학에 입학?
당연히 어학원을 1년 더 다녀야지! 싶었지만 그럼 또다시 해피 1년을 보내게 될 테고, 미련이 짙게 남을 터이다. 게다가 학비도 비쌌다.
반면 대학을 간다면, 물론 대학에 합격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수업 난이도가 더 어려워질테니 프랑스어 실력은 더 오를지 모르겠지만 생활이 괴로울 것이다. 자괴감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미련이 떨어지지 않을까? 한국에 뒤도 안 돌아보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학비도 싸다. 그래서 대학에 지원하게 되었다. 글로 써놓고 보니 굉장히 신속하게 결단을 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고 고심하고 또 고심했고 주변에 조언을 청하기도 했다.
대학은 내가 사는 도시에 있는 대학에 지원하기로 했다. 나는 이 도시가 좋으니까. 이사하기도 귀찮으니까. 그럼 무슨 과를 선택한담? 간호학과는 고민도 안 했다. 이미 배운 것을 또 배우고 싶지는 않았기에. 언어학 같은 것에 관심은 있었지만 요구하는 언어 수준이 높았고 그러려면 자격시험을 따로 쳐야 했는데 너무 귀찮았다.
대학 홈페이지에 가서 학과별 커리큘럼을 쭉 훑어보니 지리학과 과목이 가장 재미있어 보였다. 그래서 선택했다. 그렇다, 사실 잘 모르고 지원을 하긴 했다. 어차피 1년 다니고 그만둘 건데 뭘,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운좋게 지리학과에 붙어서 학사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