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통화 공급 증가
통화량 늘어나며 금리도 크게 떨어져
이자수입 줄면 이자소득자도 사라질 것
케인즈 예언 실현 여부는 더 지켜봐야
20세기 최고의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 케인즈는 “자본 공급이 늘어 금리가 떨어지면 이자수입도 줄어 이자소득자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이자소득자의 안락사(euthanasia of the rentier)’라고불렀다.
지난해 말 현재한국의 국채(3년 만기) 금리는 2.9%를 밑돌고, 미국 국채(10년만기) 금리도 1.8%를 하회했다. 국내의 경우 지난해 11월말 현재 신규 취급액 기준 수신금리는 3.0%, 대출금리는 4.9%에 달했다.
통상 이론상 적정금리는 경제성장률에 물가상승률을 더한 수준이다. 정부가 발표한 지난해 경제성장률 추정치는 2.1%,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2%에 이른다. 이론상 적정 금리는 4.3%라는 얘기다. 국채 금리나 수신금리를 기준으로 하면 현재 금리는 적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처럼 금리가 낮았던 때가 또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먼저 탄생한 서구에서는 불과 15세기까지만해도 대금업 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했다. 이자를 주고 받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금리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 물론 대금업이 허용된 유대인들은 예외였다. 중세 영국에서 유대인들은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를 제공하면 최고 연 52%, 담보가 없으면 최고 연 120%의 금리를 적용하기도 했다.
기독교 사회가 이자를주고받는 것을 허용한 것은 장 칼벵(Jean Calvin, 1509-1564) 때부터다. 칼벵보다 한 세대 앞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이라고주장했다. 그는 면죄부 판매도 ‘정신적 고리대금업’이라고 규탄했다.
이자 수수를 금지한것은 이자를 전형적인 불로소득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회적으로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돈을 빌려주더라도 이자를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받는다 해도 아주 낮은 금리를 적용했다. BC 1200년경 제작된것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 비석에는 “나에게 이자를 가져오지 말게.우리는 모두 신사(紳士)아닌가?”라는 가나안 상인의 말도 적혀 있다.
유대인들조차 자기들끼리는 이자를 받지 않았다. 토라(Torah, 율법)나 탈무드(Talmud) 모두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비(非)유대인에 대해서는 예외다. 신명기는 ‘타인에게 이자를 받을 지라도 네 형제들에게는 이자를 받지말라”고 가르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유대인이나 비(非)유대인 모두 예외를 찾으려고 골몰했다. 마침내 이슬람권에서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채무자의 집이나 농장을 사들인 뒤 이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이자를 챙겼다. 기독교권도 이런 훌륭한 벤치마킹 대상을 놓칠 리 없었다. 11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수도원들은 경쟁적으로 이런 편법을 써먹었다.
칼벵은 대금업을 눈부신 양지(陽地)로 끌어냈다. 칼벵은 대금업자가 양심을 지킬 것, 대금업을 독점하지 않을 것,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을 것 등의 조건을 내세워 대금업을 허용했다. 그는 합리적인 수준의 금리- 통상 연 5%-라면 대금업을 죄악시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칼벵은 이자에 대한 인식의 혁명을 이끌었다. 이자를 기회비용으로 간주했다. 어느 정도 수익성을 갖춘 사업을 포기한 채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자를 비롯한 불로소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고전학파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Ricardo, 1772-1823)는 ‘지주는 경제성장에 해로운 기생충”이라고 비난했고, 케인즈 역시 이자소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시했다.
케인즈는 토지와 자본을 달리 봤다. 그래서 ‘랑티에(rentier)’라는 말을 불로소득자가 아니라 이자소득자로 범위를 축소해 사용했다.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사전을 찾아보면 ‘랑티에’는 ‘부동산이나 유가증권에서 발생하는 소득으로 먹고 사는 사람’으로 정의돼 있다.
케인즈는 토지는 물리적으로 확대할 수 없는 만큼 희소성에 내재적 이유가 있는 반면 자본의 희소성은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 공급을 늘리면 자본의 한계효율이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자본의 수익이 손모 및 진부화로 소진되는 부분을 메워주고, 기술과 판단력을 발휘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 대해 보상해줄 정도의 마진만 남겨주는 수준으로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그는 금리가 떨어져 이자소득자들이 안락사하면 혁명의 필요성도 함께 사라진다고 장담했다. 케인즈의이런 주장은 금융권에서 신용공급을 갑작스레 크게 축소하면서 대공황이 벌어진 것과도 무관치 않다.
전세계적인 금리 하락의 가장 큰 원인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이나 개도국을 가릴 것 없이 중앙은행이헬리콥터로 돈을 뿌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케인즈의 예언이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국내의 경우 올해부터는 금융소득 종합과세 기준이 강화되면서 이자소득자를 사면초가(四面楚歌)신세로 몰아넣고 있다.
금리 하락이 과연 순기능만 발휘할까? 금리 하락은 칼의양날로 비유될 수 있다. 이자 소득이 줄어들면 소비 위축을 통해 경제성장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수 있다. 케인즈의 예언대로 금리소득자가 과연 과도기적 측면에 불과한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