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물질은 아주 적은 양으로
인간과 지구에 큰 영향 가져와
환경 및 안전 규제가 느슨하면
천사는 사라지고 악마만 들끓어
미군 지휘부는 1939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골칫거리 하나가 해결됐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면서 방역(防疫) 문제를 고민했다. 전염병은 총탄 못지않게 숱한 장병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방역에 대한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 때도 많은 병사들이 발진티푸스 같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원인은 ‘이(sucking lice)’였다. 옷에 붙어 다니면서 병사들의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 피를 빨아먹었다. 리케치아균이 이를 숙주로 삼아 발진티푸스를 퍼뜨렸다.
위생 시설이 뒷받침되면 전염병은 걱정할 게 없다. 하지만 깨끗한 곳에서 전투를 치르는 경우는 없다. 병사들은 총탄을 피하기 위해 오물투성이 속을 기어 다닌다. 강력한 방역 대책이 절실했다.
스위스의 화학자 파울 밀러(Paul Muller)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밀러는 1939년 강력한 살충 효과를 가진 화학물질을 소개했다. 바로 DDT라는 물질이었다. 밀러는 1948년 DDT 덕분에 노벨상을 받기도 했다.
DDT의 효과는 탁월했다.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는 물론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모기를 퇴치하는 데도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다. DDT는 6∙25 전쟁 때도 위력을 떨쳤다. 전쟁 기록 사진을 통해 포로나 피난민들이 하얀 가루로 만든 DDT를 뽀얗게 뒤집어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DDT는 빠른 속도로 보급됐다. 전쟁이 끝나자 농약으로 활용되기시작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DDT 보급에 앞장섰다. 전세계적인 말라리아 추방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DDT는 당장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분말 형태로 피부 속으로 스며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서히 독성을 발휘했다. 소화기관이나 폐를 통해 흡수된 후 갑상선 등 지방이 많은 장기에 차곡차곡 쌓였다.
시간이 흐르자 DDT의유해성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1950년대부터“DDT의 잠재적 위험이 과소평가됐다”고 주장했다. 여성 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1962년 자신의 저서 ‘침묵의 봄(SilentSpring)’을 통해 DDT의 위험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인체 내의 지방은DDT를 대량으로 증폭한다. 채소에 묻어 있는 DDT를 0.1ppm 섭취하면 100배나 많은 10~15ppm이 체내에 축적된다.
1ppm은 아주 적은 양이다. 어떤 물질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0만분의 1에 불과하다는 뜻이다.하지만 화학물질은 극소량이라도 파괴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동물실험에 따르면 DDT 5ppm은 간세포의 괴저나 조직분해를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슨이 DDT의 위험을 폭로하자 화학업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카슨을 ‘양치기 소년’으로 내몰기 위해 애썼다. 25만 달러를 들여 연구의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연방 정부 차원에서 조사에 착수했다. 마침내 유해성이입증됐고, 미국 정부는 DDT 생산을 금지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계기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가 기업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명분으로 규제 수위를 지나치게 낮췄기 때문이다. 정부는 “악마는디테일에 있다”며 규제 완화를 결정했다.
화평법은 신규 화학물질이나 연간 1t 이상의 기존 화학물질을 제조, 수입, 판매하는 경우를 대상으로 한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550㎖ 한 병에 들어간 독성물질 PHMG는 2.75㎖에 불과하다. 한해 전체 사용량은 300㎏에도 미치지 못했다. 화평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느슨한 환경 및 안전 규제는 위헌일 뿐 아니라 정의에도어긋난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을 통해 “우리들과 우리들의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규제가 정치하지 못하면 국가적 분식회계를 촉발한다. 수익과 비용의 실현 주체와 시점이 달라진다. 당장은 화학업계의 매출및 수익 증대, 고용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뒤 사회 전체가 그 이상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
천사도 디테일 속에서 살아 숨쉰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법률이 허술하다면 천사는 사라지고, 악마만창궐할 뿐이다.
참고 문헌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옮김. 2011. 침묵의봄. 에코리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