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계좌 하나로 시작된 일들

나는 단지, 생활비 통장을 내어준 사람이었다

by 변호사 연덕

1. 남편에게 계좌를...

2025년 봄이었다. 서울 외곽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짐을 빼던 날, 나는 혼잣말을 했다.
"모든 건 그 계좌에서 시작된 거였지..."

그 집은 내가 열세 해 넘게 살았던 곳이었다. 오래 붙잡고 있던 익숙함이었고, 동시에 벗어나고 싶던 피로이기도 했다.

나는 그냥 한 사람의 아내였다. 돈 관리는 각자였고, 서로의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부부였다.

문제는 남편이 신용불량자였다는 거였다. 계좌도, 카드도 없던 그에게 나는 내 이름으로 계좌 하나를 열어줬다. 생활비 인출용이었고, 나도 그게 특별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처음엔 정말 그게 다였다.



2. 낯선 돈, 낯선 전화

그러다 어느 날, 낯선 돈이 들어왔다. 2025년 7월, 남편의 지인이 보냈다는 1천만 원이 내 계좌에 들어왔고, 바로 다음 날 다른 계좌로 송금됐다. 남편은 그걸 그냥 "급한 돈"이라고만 했고, 나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며칠 뒤, 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신 남편, 사기범이에요. 그리고 그 계좌, 당신 이름이잖아요."

나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계좌엔 남편이 들고 다니던 체크카드가 연결돼 있었다. 그는 필요한 곳에 썼고, 난 알지 못했다. 때로는 "생활비가 급하다"는 말에, 때로는 "대출금 갚아야 한다"는 말에, 나는 돈을 보냈고 남편은 내 계좌를 편하게 이용하고 사업에 활용했다.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3. 통장의 무게

하지만 남편이 사기 범죄를 저질렀고 그 돈이 내 계좌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경찰서에 불려가 조서를 쓰며, 나는 말했다. "모른다"고, "그저 남편에게 계좌를 내줬을 뿐"이라고.

그러자 상대는 말한다. "그런데 왜 돈이 당신 계좌로 갔죠? 왜 체크카드가 당신 명의죠?"

질문은 상식적이었고, 상식적인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편은 결국 구속되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주방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분노, 허탈감, 창피함, 그리고 뭔지 모를 공허함.



4. 기억 속 계좌번호

시간이 조금 흘렀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 계좌를 만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남편이 그런 식으로 돈을 돌리는 사람이라는 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지만 그땐 정말 몰랐다. 그냥,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계좌 하나였다. 아무렇지 않게 내줬던 그 통장이, 내 삶을 바꿨다. 지금은 그 계좌번호를 외우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걸 증거라 부르지만, 내겐 그것이 후회로 남아 있다.



5. 1심, 계좌의 주인이라는 이유

법원은 내게 남편과 공동으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이유는 단 하나. 내 통장으로 돈이 들어왔다는 것. 남편이 사기를 저질러 받은 돈이 내 계좌로 들어왔다는 사실.

나는 내 일 하느라 바빴다. 2015년부터는 내가 운영하던 작은 옷가게 하나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물류니, 투자니 그런 건 정말 몰랐다.

무엇보다 나는 단 한 번도 형사고소를 당한 적이 없었다. 경찰 조사도, 기소도 없었다. 아무도 나를 조사하지 않았다. 대질신문에서도 피해자는 나에 대해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수사기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말했다.
"통장 주인이니까,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

통장 하나 빌려준 게 죄라면, 앞으로 누가 부부 사이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6. 항소심, 다른 결론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항소심 판결.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판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했다. 남편은 10여 년간 화물물류업을 하며 피고의 계좌를 이용해왔지만, 그것만으로 사기를 공모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피고가 남편이 사기를 벌일 줄 알고도 계좌를 내줬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피해자 역시 남편의 말을 믿은 건, 계좌 명의인이 피고였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의 말 자체에 속은 것이라는 점도 명확히 했다. 결국 재판부는 판결문으로 내게 말했다.
"남편이 피고 계좌를 사용해 사기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것이 피고의 책임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나는 한동안 멍했다.
마치, 한겨울 유리창에 따스한 햇빛이 처음 스며드는 순간처럼.



7. 계좌를 놓다

돌고 돌아온 결론이었다.
통장을 내어준 건 사실이지만, 그게 죄는 아니라는 말.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나는 그날 밤, 혼자 오래된 통장을 꺼내어 보았다. 아직 남아 있는 계좌번호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제는… 진짜로, 끝났구나."

그렇게 나는, 그 계좌를 마음에서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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