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과 함께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하며
2025년 5월,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임대차 계약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며 조용히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전세 계약은 ‘에스제이개발주식회사’와 체결되어 있었고, 나는 그 집에서 나름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보증금은 2억 1천만 원이었고, 그 중 1억 6천만 원은 ‘미래은행’ 전세대출을 받아 마련한 돈이었다.
전세보증금반환보험도 가입해 놓았기에, 어지간한 일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빛공인중개사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세입자님, 혹시 조기 퇴거 가능하실까요? 집이 매매될 예정이라서요.”
중개사의 말은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웠다.
새로운 매수인이 직접 거주할 예정이라는데, 계약만 잘 진행된다면 손해는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며칠 뒤, 집주인의 대표라는 사람이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새로 집을 사는 분이 실거주 조건으로 계약하려고 해요. 대신 퇴거 비용이나 보증금 반환 문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명확히 처리할 겁니다.”
그리고 또 며칠 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제가 그 집 매수인입니다. 명의는 어머니 앞으로 할 거고요, 실거주는 제가 할 예정이에요.”
그는 내게 어머니의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 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왔다.
전세보증금반환보험에 필요한 정보였기에, 나는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보증금 반환 시기, 퇴거 조건, 특약 내용까지 확인이 되었고, 나는 서서히 이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25년 1월 18일, 나는 이사 하루 전날 짐을 정리했다.
새로운 세입자가 신혼부부라며 청소를 하루 먼저 하고 싶다고 부탁해왔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몇 번의 연락 끝에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요, 그날 최대한 짐 빼볼게요.”
청소기 돌리고, 냉장고 정리하고, 쓰던 소파는 중고 앱에 나눔으로 올렸다.
1년 반을 살았던 집은 그렇게 텅 비어갔다.
그리고 약속대로 1월 20일 낮 12시, 보증금을 입금해준다는 그 사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졌다.
그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나는 하늘빛공인중개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방금 전까지 통화했는데요… 보낸다더니, 아직인가요?”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집주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명의자도 아니었고, 계약서에 이름도 없었다.
실제 집의 소유자는 ‘이정자’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그 사람한테 당했어요. 이름도 몰라요. 그냥 부동산 일 한다고 해서 믿었어요. 저도 돈 없어요…”
그리고 몇 달 뒤, 그녀는 사기 방조로 기소되어 2025년 12월 12일,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내 돈을 찾기 위해 보험사와 소송 절차를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저는 2025년 1월 11일에 이 집에 전입했고, 1월 19일에 점유를 받았어요.”
그녀는 주장했다.
“이 집에서 당신보다 먼저 점유했기 때문에, 제 권리가 우선입니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1월 18일까지 내가 그 집을 치우고 정리했던 시간들,
그녀가 내게 청소를 부탁하며 보냈던 문자들,
내가 알려줬던 비밀번호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나의 권리를 지우는 증거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끝까지 버텼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고, 명의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 남자는 끝내 사라졌다.
모든 정황은 내가 피해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법은 말했다.
“임차권등기명령이 있더라도, 임차인이 주택의 점유를 상실한 경우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은 소멸될 수 있습니다.”
나는 2025년 1월 20일까지 그 집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날, 청소를 하고 싶다는 요청에 문을 열어주었고,
그 결정은 결과적으로 점유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로 인해, 나보다 나중에 들어온 새로운 임차인이
법적으로는 우선순위 임차인이 되었다.
경매가 진행되고 배당표가 작성되었을 때,
나는 그 사람보다 뒤에 있는 권리자로 기록되었다.
결국 나는,
괜히 점유를 내어준 탓에
내 전세보증금 2억 1천만 원의 배당순위를 뒤로 밀리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모든 순간들이 자꾸 떠오른다.
청소를 허락해준 그날, 따뜻한 말을 건넸던 중개인,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계좌번호를 보냈던 그 오후의 햇살까지.
그날의 나는 그냥,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문제 없이 넘겨주고, 약속대로 돈을 받고, 다음 이사를 준비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일은 끝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섰다는 이유로,
나는 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났다.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점유’라는 말이 이렇게 무거운 단어일 줄, 그땐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