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3억, 사라진 믿음
2025년 봄, 화성개발 사무실.
커피를 내리던 박수근 대표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몇 해 전 함께 일했던 직원 박상민과 그의 아내 오희진을 떠올렸다.
그들의 이름은 이제 사무실보다는 법정에서 더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었다. 마음 한켠이 묘하게 일렁였다.
박수근 대표와 박상민의 인연은 서부주택 재정비사업에서 시작되었다.
실무 능력이 괜찮아 보여 채용했던 박상민은 이내 회사의 금융 파트를 맡게 됐고, 외부에서는 그를 대표로 오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의 개인 신용 문제로 아내 오희진을 회사 이사로 등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급여와 차량 지원도 따라갔다.
그런데 박상민이 명함 하나로 화성개발의 대표처럼 행동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2016년 여름, 박상민은 지인 이선희를 통해 이상준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았다.
서울 은평구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은 둘 사이에 “운영자금이 급하다”는 말이 오갔다.
박상민이 회사이름으로 돈을 빌려달라는 거였다.
이상준은 망설였지만, 박상민의 아내였던 이선희가 연대보증을 서며 분위기는 기울었다.
그렇게 1억 원이 약속되었다.
며칠 뒤, 약속대로 이상준으로부터 화성개발의 미래은행 계좌로 2천만 원이, 이어 8천만 원이 입금됐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계좌에 있었다!
그 계좌는 회사에서 사용하던 주 계좌가 아닌, 과거에 쓰다 만 계좌였다.
사용처도 문제였다. 인출된 자금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겉으론 강정동 사업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사적 유용이었다.
돈 빌려준 이상준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됐고, 결국 법원에 화성개발이 돈을 다시 돌려줄 것을 청구하는 소장을 접수했다.
허나 박수근 대표이사는 그때 목포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그곳에서 대여금 청구 소장을 받아들었다.
종이를 넘기며 그는 처음으로, 회사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왜 박수근 대표는 그때 수감중이었을까?
2017년, 화성개발은 에스아이비와 손잡고 송산 주상복합 신축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용역비는 3억 원.
계약도 체결됐고,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2018년 3월, 박수근이 임금채권 문제로 구속되자 회사의 실권은 자연스럽게 박상민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소장을 받아든 박상민은 에스아이비의 최진범 대표를 찾아가 “변호사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상민은 회사명의로 돈빌리는 데는 도가 텄는지, 최 대표는 박상민의 말을 믿고 오희진의 계좌로 1억 8천6백만 원을 송금했다. 화성개발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박수근 대표가 출소 후 세금계산서 목록을 조회하다 이 거래를 발견했을 때, 그는 자리에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2022년 5월 1일, 서초동의 한 변호사 사무실. 박수근 대표와 박상민 두 사람은 직접 마주했다.
박상민은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모든 사실을 자백했다.
그는 직접 각서를 써서 3억 원을 채권자에게 갚겠다고 적었다. 화성개발에 금전적 채무를 지우지 않겠다고,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반면 오희진은 지금도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회사는 결국 이 둘에 대해 형사고소를 진행했고,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채권가압류도 신청했다.
박상민에게는 민법 제750조에 따른 불법행위 손해배상 책임이, 오희진에게는 공동불법행위에 따른 연대책임이 따른다. 만약 이들이 자산을 빼돌리거나 써버린다면 회사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게 된다.
요즘 박수근 대표는 회의 때마다 직원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사람을 잘 들이는 것도 실력이야.”
누구도 쉽게 웃지 않는다.
사라진 3억은 돈이 아니라 신뢰였고, 무너진 건 회계 장부가 아니라 회사 전체의 균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