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몸, 마음, 정신의 근력을 키우는 에세이 ' 몸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돈이면 다 해결돼요”

“직장인이라면 가족보다 일이 먼저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은 믿으면 안 돼요. 특히 회사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이기적인 거예요.

매 순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참을 줄도 알아야죠.”


이러한 생각들은 어디서 온 걸까요?

무엇이 우리의 생각을 길들였을까요?

기억의 저장소에는 살면서 반복적으로

경험했던 이야기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강렬한 감정과 연결된 기억들은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깊숙이 자리 잡죠. 특히 양육자나 가까운 인물과의 갈등 상황에서

형성된 해석은 강력한 ‘생각 패턴’으로 굳어지게 되고요.

『몸은 기억한다』 책에서 베셀 반 데어 코르크 박사는 말합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출된 감정은 아드레날린과 함께 장기 기억으로 저장됩니다.

그리고 강렬한 감정은 신념이라는 필터를 만들어, 지금 여기의 현실도 왜곡해서 받아들이게 합니다.”

저에게는 유년시절의 몇몇 사건들이 그랬습니다.


#1. 더부살이 _ 버림받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며 살던 아이

다섯 살 무렵, 집안 형편이 어려워 큰집에 맡겨졌던 적이 있습니다.
“며칠만 있으면 데리러 올 게.”라는 엄마의 말이 전부였죠.
그 며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매일 밤 울며 집에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큰 집에서 양치를 하다 따뜻한 물을 쓴다는 이유로 혼이 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아, 집에서 편안하게 행했던 것들이 친척집에서는 허용이 안 될 수도 있구나.’
그냥 조심하면 되는 것을 그 깨달음은 무서운 속도로 저를 눈치 보는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감정은 삼키고, ‘최대한 불편을 주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 안전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죠.


#2. 엄마의 가출 _표현해 봤자 소용없어! 버림받을 게 분명해.

초등학교 2학년 어느 새벽, 마루에서 부스럭거리던 엄마는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술에 취해 괴물이 되던 아버지를 더는 견딜 수 없다며 집을 떠나겠다고 하셨죠.

“엄마, 제발 가지 마세요. 제가 잘할게요. 네? 엄마! 엄마!”
정류장까지 울먹이며 매달렸지만 엄마는 서둘러 발걸음만 옮겼습니다.

어떤 버스를 타던 상관없다는 듯 엄마는 첫 번째로 도착한 버스를 타고 홀연히 사라졌죠.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은 그날 이후 제 안에 굳게 자리 잡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성인이 되었어도 감정이나 욕구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제게 무척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해봤자 버림받을 게 분명해.’,라는 신념이 자리 잡게 되었으니까요.


#3. 아버지의 훈화말씀_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위험해. (정서적 박탈감의 신념)

스물여덟 살, 결혼하기 전까지 집에서도 훈화말씀을 들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 덕분(?)이었죠. 시험기간에도 예외 없이.

새벽까지 훈화말씀을 듣는 날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저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말씀드렸죠.

“아버지, 가족회의도 좋지만 제발 시험기간에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하신다고 해도 미리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가족회의라 표현하셨지만 일방적인 연설에 가까웠죠.)

간절한 바람을 표현하자 아버지는 한 달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달간 용돈을 안 주셨어요.

형제들은 저의 소신(?) 발언 때문에 용돈을 못 받았게 되었다며 질책했습니다.

이 경험은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위험해.

누군가에겐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라는 신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보셨다면 기억하실 텐데요.

‘기억의 저장소’에 수많은 경험이 기억으로 저장되고

그중에 강렬한 감정들은 여러 갈래의 실타래가 묶여 여 주인공,

라일리의 신념이 되었던 장면이 인상 깊었죠.

핵심 신념을 너무나 잘 표현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유년시절의 몇몇 경험을 통해 버림받음의 신념과 정서적 박탈감의 신념,

불신의 신념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친밀한 관계를 원하면서도 ‘결국엔 혼자 남겨지게 될 거야.’,

‘사람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야. 분명 배신할 거야.’라는

신념 덕분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관계가 깊어지면 냉정하게 먼저 끊어 버린 날도 많았습니다.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해결해.’

‘사람을 믿지 마. 스스로 강해져야 해.’

이러한 생각들은 저의 서사와 함께 무럭무럭 자라 핵심신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와 같은 신념이 있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필요한 것을 표현했을 때 상대가 불편해하기만 하던 가요?

누군가에게 부탁했을 때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도움을 줬던 경험도 있지 않나요?

누군가를 믿고 따랐을 때는 어떤 가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 않았나요?


왜곡된 핵심 신념은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가로막죠.

과거의 경험은 현재를 뒤덮어 생각의 외골수를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이 바라본 세상이 정답인양 살아가게 하니까요.

‘부탁하지 마. 거절당할 수도 있어.’
‘사람을 믿지 마. 언젠가는 배신할지도 몰라.’
‘네 감정을 말해봤자 누군가에겐 짐이 될 뿐이야.’

이런 생각들은 어쩌면 제 삶에서는 당연했습니다.
저를 지키기 위해 뇌가 선택한 생존 전략이었으니까요.

더불어 신념들은 종종 ‘생각의 늪’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과거의 기억과 그로 인한 해석이 현실을 뒤덮곤 하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이래서 안 되는 거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자신을 규정짓는 문장들에 빠져들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물리적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지만

‘인지(생각)적 늪’은 ‘탈출’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툭 떠오르거든요.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는 과거의 경험이 떠오르고

경험 속에서 피어난 핵심 신념이 현재를 살아가는 주인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과거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얼른 도망가거나 공격하라고 부축이거든요.

뇌 속 편도체에 소방용 경보장치를 달아 놓은 양 말입니다.


따라서 왜곡된 신념으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자각’이라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변화는 자각에서 시작됩니다. 알아차리고 수용하면

왜곡된 신념의 크기와 힘은 작아집니다.

핵심 신념과 사이좋게 동고동락하는 방법은 생각을

알아차리고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강해져야만 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나는 지금,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구나.”


생각을 알아차리며 나의 이름을 불러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생각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생각은 진실이 아니라,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신념은 그날의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을 단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제는 물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신념을 믿고 있는가?”
“그 생각은 여전히 나를 지켜주는가? 아니면 나를 가로막고 있는가?”


신념을 알아차리면 자기 이해와 더불어 상대를 이해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한 데에는, 그 만의 서사가 있겠지.”
경직된 판단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게 되죠.

생각의 늪을 헤엄쳐 나오는 힘은,

그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할 때 생깁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다그치지 않고

따뜻하게 관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집니다.


왜곡된 신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나는 왜 이런 사림이 되었을까?’라는 책을 쓴 독일의 심리학자,

네시베 카흐라만의 설명이 신념에 대해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더군요.

“우리의 정신체계는 신념을 악의적으로 사용해 우리를 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것뿐이다.”

‘그때도 그랬는데 오늘도 이러는 걸 보면 나는 00해.’라고 말하며

경험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면 뇌는 ‘주인을 보호한다’고 생각합니다.

‘내면소통’의 저자 김주환 교수도 위의 견해에 동의하듯 말합니다.

‘우리의 뇌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상황을 인식하고

패턴을 빠르게 읽어 일반화하는 이유는 주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는 신념에 갇혀 해석하기보다 이렇게 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신념을 믿고 있는가?’

‘그 마음은, 무엇을 지키려 했던 걸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도움이 되는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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