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마음, 정신의 근력을 키우는 에세이 '몸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2023년 9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이었습니다.
엄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인 날이었죠.
저녁 6시가 약속 시간이었는데 6시 10분이 지나도록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엄마와 같이 살고 있는 막내가 식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엄마는?”
“엄마랑 같이 안 왔어?
난 오후에 병원진료 있어서 조기 퇴근을 하고
병원에서 곧장 식당으로 간다고 말하고
나왔는데?”
서둘러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어디야?”
“집이다.”
어금니가 한껏 눌려 있는 듯한 음성이 까칠하게 들렸습니다.
“6시가 저녁 약속 시간인데
아직도(6시 10분) 집에 있으면 어떻게 해?
“됐다.”
“그러지 말고 엄마, 지금이라도 택시 타고 와.”
“됐다. 너희들끼리 먹어라.”
“무슨 소리야? 엄마 생신인데 주인공 없이
우리끼리 먹는 게 무슨 의미야.
그러지 말고 어서 와요. 우리가 모시러 갔다가 여기 오면
1시간은 걸릴 거 같아서 그래.”
“됐다…. 띠리릭.”
간절한 호소가(?) 휴대폰 종료음과 함께
통나무 잘리듯 잘려 나갔습니다.
차후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막내가 출근하면서 신발장 앞에서
“저는 병원에 갔다가 바로 약속장소로 갈게요.” 한 말을
한쪽 귀가 잘 안 들리는 엄마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막내를 기다리다가 약속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연락이 없자,
당황스러움은 이내 네 자녀에 대한 괘씸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엄마는 막내 든 세 딸년들이든 (엄마의 표현입니다만.)
모임시간 전에 전화를 걸어,
“엄마, 오늘 어떻게 오세요?” 물어봐 줄 거라 기대했다고 하셨죠.
결국 엄마는 모임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약해 놓은 회집에서 인당 5만 8천 원짜리
회 정식 12인분을 주인공 없이 먹었습니다.
어금니를 물고 복화술을 하며 회를 잘근잘근 씹어 먹었죠.
형제들은 회 정식 코스요리가 나올 때마다
회 위에 불만을 고명처럼 얹어 먹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우리가 잘못한 거야?
막내랑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 거잖아.
엄마가 못 알아들은 거잖아. 그냥 오면 안 되는 거였어?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돌아가신 아빠보다 엄마가 더해.
예의, 질서, 형식. 정말 질려버린다.”
우리는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친정 집으로 향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막내가 제일 흥분했던 큰언니에게 당부하듯 말했죠.
“무조건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해. 변하시겠어?
안 변해. 그냥 미안하다고 해.”
‘그냥 미안하다고 해’라는 막내의 당부의 말을 듣는 순간,
제 목구멍에서 열이 나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수년간 질서와 예의를 강조하던 아버지와 엄마의 대화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면서 어금니를 더 꽉 물게 되더군요.
“그놈의 예의. 질린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독백조의 말…
떠오르는 지난날들을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일순간에
얼굴 근육들이 일그러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친정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9시 7분.
딸들의 영혼 없는 사과와 어색한 사위들의 미소가 버무려져
무거운 공기가 집안 가득 채워졌습니다.
간신히 시간을 때우고 엄마네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한주가 지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딸들의 전화는 걸어도 받지 않자, 신랑이 대신 전화를 해 주었죠.
“어머니, 차 한잔하시죠.”
넓은 잔디밭이 있는 대형 카페에 도착했습니다.
제 마음과는 달리 온화한 가을 햇살이 푸르른 잔디를
윤슬처럼 빛나게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마주 앉아 어색하게 근황을 주고받다가
조심스레 그날의 일을 물었습니다.
“엄마, 난 그날 너무 속상했어.
지금 다시 그날 일을 거론하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지혜롭게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서 엄마의 의중을 묻고 싶은 거야.”
“그래. 말 잘했다. 나는 너희들이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된 엄마를 더 신경 써 주길 바랐어.
그런데 그날 자식이 넷이나 있는데
누구 하나 연락해 주는 자식 없고…
뒷방 늙은이 취급하나 싶어서 서운하고 괘씸하더라.”
조금은 엄마의 마음이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 여전히 의구심은 남아 있었죠.
4형제는 모두 엄마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엄마의 일상을 묻거나 대화를 많이 나누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엄마를 더 챙겨야지 하면서도 익숙한 방식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한 달에 두어 번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는 것으로
가족애(?)를 발휘하곤 했죠.
엄마는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내가 아는 000 권사 아들은 카페도 데리고 가고
사근사근 웃으면서 다른 권사님들을 챙기는데 보기 좋더라.
우리 아이들은 사근 사근 하지가 않아.”
그 순간, 갑자기 뜨거운 감자를 먹다가 미쳐 잘게 씹기도 전에
큰 감자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들어간 듯
식도 전체를 뜨덥게 달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근사근? 사근사근이라고?
…
그렇게 키워 지질 않았는데…
어떻게 사근사근해… 그렇게 키워 지질 않았는데…”
갑자기 감정과 생각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유년시절
이불속에 떨고 있는 어린 근하를 소환했습니다.
부모님은 부부싸움이 잦으셨죠.
밤새도록 부모님의 고성에 시달릴 때면 온몸이 경직된 채,
이불속에 고개를 파묻고 어서 이 긴 밤의 공포가
끝나길 기도하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셨지만 집에서도
선생님처럼 우리를 가르치셨죠.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경험한 아버지를 토대로 말씀드렸을 뿐.)
시간약속, 존댓말, 인사, 예의범절 등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알려주셨지만 어떠한 융통성도
허락되지 않는 아버지만의 잣대가 있으셨죠.
귀가 시간을 칼같이 지켜야 했고 엄마에게 편하게(?) 반말을 하면
아버지는 우리 대신 엄마를 혼내셨습니다.
버릇없이 키운다고.
아버지의 틀은 견고했습니다.
그 틀을 벗어나면 격노하셨으니까요.
아버지를 대할 때면 제 몸은 늘 경직되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사근 사근’이라는 단어는
제 삶을 통틀어 너무나도 생경한 단어라 순간
몸이 격렬하게 반응하더군요.
목이 메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죠.
엄마는 저의 눈물을 발견하지 못하신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셨습니다.
“요즘은 미디어가 발달했잖아. 유튜브 보면서 배우면 되지.”
좌절감마저 안겨준 엄마의 멘트…
‘그렇지… 배우면 되겠지… 배우면!
그래서 내가 배우는 거잖아. 그래서 마음 공부하는 거잖아.
상처 주는 말, 대물림되지 않게 현명하고 지혜롭게 말하려고.
그런데 엄마의 말이 너무 마음 아프게 들린다.
공감해 주는 말, 인정해 주는 말 듣고 자라지도 않았는데
사근 사근 하길 바래…?
엄마는 왜 고치려 하지 않았어?
유튜브가 없던 시절이었어도 똑같은 싸움을
50년간 반복하지는 않을 수 있었잖아!’
마음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더군요.
불쑥 제 안에서 히틀러가 튀어나와 악랄하고
비극적인 표현들로 엄마의 심장을 후벼 파고 싶은 충동이 일렁일 만큼.
눈동자에 차오른 눈물이 깊은 한숨과 함께
주르륵 뺨으로 흘러내렸습니다.
‘내가 많이 슬프구나. ‘사근사근한 태도를 유튜브로 배워라.’는 말에
고통스럽기도 하고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구나. 슬퍼하고 있구나.
목구멍이 뜨겁고 가슴이 조여오는구나.’
감정과 감각, 생각을 알아차렸습니다.
두서너 번 심호흡을 깊게 하고 나니
악랄한 말들로 엄마를 괴롭히고 싶었던 내면의 히틀러는
조금 작아진 듯했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내면의 간디가 출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깊게 숨을 쉬었습니다.
숨 고르기를 하고 나니 정신이 좀 들더군요.
엄마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질문을 이어 나갔습니다.
“엄마에게 ‘사근사근’은 어떤 모습이야?”
“전화를 자주 해 줬으면 좋겠어.”
“아하! 그거였구나! 엄마에게 ‘사근사근’이라는 것이…”
그때 즈음 커피와 빵을 들고
먼발치에 서 있는 신랑을 보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랑이 그러더군요.
“자기 눈빛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
최대한 모녀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기다렸어.
언제 끼어드는 게 나을까… 고민하면서 말이야.”
그의 배려에 잠시 ‘고마움’이라는 녀석이 손님처럼 찾아왔습니다.
나 대신 전화를 걸어 장모님의 심기를 풀어주려고
식사와 차 한잔 할 시간을 마련해 준 모습까지 음미하자
잠시나마 경직된 마음이 중화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자식에게 바라는
‘사근사근’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여전히 엄마가 자식 탓으로만 돌리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도 있었죠.
예의를 갖추는 것에 대해 유년시절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았던 터라 ‘예의’라는 단어 자체가 트리거(방아쇠)가 된 듯했습니다
. 제 속에서 울고 있는 내면아이와 대화를 충분히 나누며
출렁거리는 마음이 잠잠해지기까지 석 달의 시간이 걸렀습니다.
그 사건 이후 엄마와의 만남을 멀리했으니까요.
‘예의’, ‘질서’, ‘형식’이라는 단어에 뿔나 있는
제 마음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알아차렸죠.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갈등이었구나.
용해되기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한 이슈였어.
경직되어 있던 내면아이를 애도해 줄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어린 근하에게 따스한 돌봄과 안전이 필요했구나.
상황이 수용되고 소통되길 바랐구나.
그랬구나. 조금 더 기다려 줄게.’
출렁이던 마음이 잠잠해지자,
조용히 사건에 대해 복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엄마의 생신사건)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 자문해 보았죠.
미망인이 된 엄마에게 ‘연결’, ‘소통’, ‘존중’ 이 중요한 듯했습니다.
엄마의 욕구를 충족시켜 드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 전화를 드리는 것이 어려운 건 아니지.
다음에는 경조사가 있을 때 미리 하루 전에 전화를 해서
어떻게 오실지 물어봐야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다짐만으로도
마음이 몇 개월 전보다 훨씬 차분해짐을 느꼈습니다.
11월의 어느 늦은 저녁.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을 두절(?)하며 지냈던 석 달에 대한 제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엄마… 내가 연락이 뜸했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도 마음이 좀 불편했어.
난 아버지와 엄마의 싸움, 고성, 훈계가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웠거든.
그때 난 착한 둘째 딸이 되어야만 했어.
나로 인한 불편함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감정을 숨기며 살았거든.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까지 불편한 마음을 숨기며 살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지금 용기 내어 내 마음을 표현하는 거야.
나 그날 카페에서 엄마랑 이야기하면서 서운했어.
유년시절 경직된 날들이 많아서 갑자기 사근사근하기가 힘들어.
하지만 엄마가 원하는 대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더 신경 쓸게.”
엄마는 “그랬구나. 우리 딸이 많이 힘들었구나. 미안하다.”라는 말과
함께 저의 마음을 수용해 주셨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엄마가 ‘미안하다’ 표현했다 해서
갑자기 모녀의 관계가 갑자기 호전되지 않는다고
반감을 드러내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수많은 겹겹의 개인적 서사들이 있을 테니까요.
각자의 상황에 따라 감정을 소화할 시간,
슬픔을 애도할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