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끼밥상
구수한 음식 냄새가 계단을 타고 솔솔 흐르다 내 코에 닿았다
그러고 보니 그릇 부딪히는 소리며 두런두런 말소리도 나직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다 왔다!' 굳이 몇 층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여기는 12층일 것이다.
1208호 빼꼼히 열려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앞치마에 주방모자를 쓴 건강리더들이 "어서 오세요~~" 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늘은 상계9동 어르신휴센터 한끼밥상이 열리는 날이다.
공식적으로는 방학이지만 건강리더들은 평소처럼 한끼밥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셰프 건강리더는 냄비 속 죽을 저으면서 동시에 고구마튀김을 튀겨내는 중이었고 또 다른 건강리더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셰프 건강리더의 다음 동작을 눈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오늘은 그냥 거들러 왔다'는 또 한 분의 건강리더는 상차림에 들어갈 반찬을 담아내면서 어제 남편과 있었던 일화로 모두에게 웃음을 선물하고 있었다.
분위기만 봐도 오늘 한끼밥상은 완판이겠다 싶었다.
부지런히 준비하던 와중에 직접 쑨 올방개묵을 큰 쟁반에 담아 들고 온 이웃이 있었다.
(하얀 묵에 흑임자깨가 박혀있어 마치 묵 안에 올챙이알을 풀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올방개묵이라고 한다)
한끼밥상 때 종종 음식을 만들어 오거나 봉사를 하러 오는 그 젊은 이웃은, '오 마이 갓' 70살이 넘었다고 했다.
한끼밥상 먹을 자격 있는 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웃 김옥희 님은 원자력병원에 입원한 암환자에게 모자를 떠서 전달하는 봉사를 8년째 하고 있는 대단한 분이셨다.
올해는 특히 어르신휴센터 88세 최계영어르신, 89세 김정희 어르신 두 분의 도움으로 50개의 모자를 전달할 수 있었다며 뜨고 있는 모자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한끼밥상에는 정말 많은 인생이 스며들어있구나.
나직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인사하며 들어오셨다.
어르신들은 오늘 밥값이라며 건강리더에게 4천 원씩을 건네고 출석부에 이름을 쓰셨다.
사업비가 늘 부족하다 보니 재료가 들어가는 소모임은 어르신들이 조금씩 재료비를 내어 참여하고 있는데 한끼밥상은 4천 원에서 5천 원의 실비를 받고 있다.
몇 년 전, 사업비가 없어서 한끼밥상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어르신들은 이런 좋은 것을 중단하면 안 된다며 밥값을 낼 테니 한끼밥상을 유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2천 원이었던 식비는 4년이 흐르면서 4천 원, 5천 원이 되었다.
비록 공간이 협소하여 20명 이상 예약받기 어려운 한계는 있지만, 한끼밥상을 기다리고 찾아주는 어르신들이 계시기에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한끼밥상의 메뉴는 호박죽, 고구마튀김, 올방개묵, 가자미식해, 김치였다
'아이고 맛있다.' '나 조금 더 줘봐요' '나는 튀김 하나 더'
조금 더 달라고 여기저기서 건강리더를 불렀다.
건강리더들은 말씀 없이 드시는 어르신들에게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릇을 살피면서 비어있는 반찬은 채워드렸고 평소보다 덜 드시는 어르신이 계시면 "오늘은 양이 적으시네요" 한분 한분 알뜰히 챙겼다.
"오늘은 묵을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
"천천히 많이 드셔요. 죽은 금방 배가 꺼져요~"
"ㅎㅎㅎㅎ"
오늘은 김병순 어르신도 오셨다. 1년 전부터 시작된 인지증(치매)으로 기력이 많이 쇠해지셔서 이웃 어르신이 모시러 가지 않으면 그렇게 좋아했던 한끼밥상도 잊어버리고 나오지 못하셨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늦게 도착한 어르신에게 "어서 와, 오늘 죽이 정말 맛있어"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셨다. 오랜만에 활기찬 모습을 뵈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마침 바르게걷기 진행하는 건강리더님이 부인과 함께 한끼밥상에 오셨다.
방학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며칠인데 어르신들은 마치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선생님을 반기셨다.
함께 온 부인도 어르신들과 익숙하게 어울리며 안부를 묻고 식사를 하는 모습이 마치 가족 같아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최계영 어르신과 김정희 어르신은 김옥희 님에게 만들어온 모자를 건네고 밑단만 뜨개질되어있는 일거리를 받으셨다.
"겨울 동안 심심하지 않아 좋지 뭐" "애들 키울 때 생각나고 재밌어"
"이거라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 하셨다.
활동적이고 늘 씩씩하던 김홍미 어르신이 기운 없이 사무실 방으로 들어가 앉아 계셨다.
식사 중인 어르신들이 걱정을 했다.
김홍미 어르신은 요새 목디스크와 허리 통증으로 많이 힘들다고 하며 죽을 좀 싸달라고 하셨다.
부인과 함께 식사 중이었던 건강리더 선생님은 김홍미 어르신이 걱정스러운지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어르신이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아픈지 묻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더니 포장된 죽이 나오자 어르신을 부축하며 휴센터를 나섰다.
원래 한끼밥상은 포장이 안된다. 하지만 어르신이 아파서 당장 여기서 식사를 하기 어렵기도 하고 남편의 식사를 챙겨야 하기도 해서 이번은 예외로 하였다.
늘 보이던 권송란 어르신이 안 보여 물었더니 당뇨가 있어서 오늘 한끼밥상은 못 오신다고 미리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권송란 어르신은 오랜 남편 간병으로 그동안 많이 힘들었었다. 그러다 어르신휴센터를 만나서 친구가 생기고 웃을 일도 생겼다며 정말 하루도 안 거르고 어르신휴센터에 출근도장을 찍는 분이셨다.
'아, 그래서 김병순어르신을 최계영어르신이 모시고 오셨구나'
자신이 한끼밥상을 오지 못하니 다른 분께 동행을 미리 부탁해 두신 그 마음씀이 감사했다.
어쩜 이렇게 모든 게 자상한지.
한끼밥상의 하루는 이렇게 많은 사연을 남기며 마무리되어가는 중이었다.
아래의 글은 차애숙 건강리더님이 어르신휴센터 밴드에 올린 글입니다.
2025년 12월 12일 금
메뉴는 달콤 영양만점 단호박 죽.
우리의 한끼밥상은 늘 풍성하다
호박을 가져오시는 어르신, 올방개묵을 쑤어 큰 쟁반에 담아 오는 이웃
이북 함경도에서 먹는 가자미 식해를 담가오신 건강리더
단호박을 깍둑 썰어 큰 솥에 넣고 끓이다 믹서로 곱게 갈아 모두 손질해 오신 영양사 건강리더
동치미도 알맞게 익혀서 통에 담아 오고 속박지 무도 썰어서 가져오는 한끼밥상 나눔에 아까운 게 없는 우리 건강리더들.
믹서로 곱게 간 단호박을 찹쌀가루를 넣고 한참을 저으며 끓이다 삶아온 팥을 넣고 같이 끓인다.
고구마는 깨끗이 씻고 먹기 좋게 썰어 튀김을 한다.
그릇에 호박죽을 담고 접시에는 튀김과 속박지무를 담는다
올방게 묵은 김가루와 참기름을 넣고 살살 뒤집어서 튀김 옆에 올려놓고 동치미와 한상 내간다.
방학인데 이렇게 맛난 음식을 해준다며 어르신들이 너무 좋아하셨다.
어르신~다음 메뉴는 뼈다귀 감자탕이에요~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