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50, 테를지 국립공원 은하수 하늘 아래

몽골 여행 기록

by 도토리의 일상

'D-850'

무언가로부터 850일 남은 시점.

1,000일보다는 적게 남았지만 손에 안 잡히는 아득한 숫자인 것은 맞다.


언젠가부터 직장에 다니면서 이런 디데이들을 설정해두곤 한다.

가족여행 D-52, 열흘간의 추석연휴 D-12, 퇴사 D-2

뭔가 설레는 것들에 대한 디데이를 설정해 두고 기다리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때 읽었던 자기 계발서 중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도달하기 쉬운 작은 목표들을 설정해 두고,

'스테이지 클리어'하다 보면 결국 큰 목표를 이루게 된다는 문장이 있어서였을까?


나한테 디데이는 이런 존재다.

마음이 힘든 순간들을 견디게 해주는 안식처 같은.


또한 당장 그만둬버리는 충동을 이기게 해주는 '이성' 역할을 한다.

대신 주의할 점은 그날만 기다리며 그 과정에 있는 날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


큰 목표가 D-850일 정도 남았을 무렵, 몽골 여행이 D-1로 다가왔다.

하마터면 몽골 여행 직전에 회사를 그만둘 뻔했기 때문에

특히 이 디데이는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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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를지 국립공원 내에 있는 게르에서의 첫날밤

몽골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이 묘사하는 '쏟아질 것 같은 별밤'을

기다리며 밤이 깊어가기를 기다렸다.


최신 아이폰이 빛을 발하는 순간.

노출을 최대로 맞추고 10초 타이머 설정을 하면, 30초간 사진을 찍어

밤하늘의 은하수도 충분히 사진에 나온다.


눈에는 희미하고 흐릿하게 보이던 은하수의 세세한 갈래 길들이

사진으로는 선명하게 나오기 시작하자 내적 환호성이 나왔다.


신나서 밤하늘 구석구석 찍어보고

사람도 같이 찍어보면서 고요한 밤하늘 아래 별들을 만끽했다.


평화롭게 별을 감상하는데,

저 멀리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별을 보러 왔구나...! 하고 반가웠던 순간,

움직이는 모양새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정적이 흐르며 다 같이 얼음.


검은 그림자는 서서히 다가오며

'스륵 스륵 스륵' 하는 소리를 냈다.

손전등을 비춰봐도 누구냐고 물어도 아무 대답 없이

움직일 뿐이었다.


사진을 찍어보면 나올까? 싶어 별을 찍듯 노출을 올리고 촬영해 보니,

'풀을 뜯어먹으며 앞으로 이동하는 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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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륵 스륵'하던 소리는 소가 땅에 있는 풀들을 코로 훑으며 뜯는 소리였다.

몽골 초원 위 가축들이 다 주인이 있다지만 야생에 방목한 소이기 때문에

우리 근처를 지나갈 때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잔뜩 쫄아있었지만, 소는 아무런 반응 없이

우리가 널려있는 바위인 것 마냥 아무렇지 않게 풀을 뜯으며 지나갔다.


그제야 안심한 우리는 돗자리에 누워

별을 마저 감상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밤하늘에 스륵스륵 소리를 들으며 별을 보는 낭만이란.


몽골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별을 감상했지만

그날의 오감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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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보거나 몽골의 끝없는 초원을 보면서

인간은 그저 우주 먼지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깨닫게 된다.

그런 한 먼지가 설레는 사소한 일들을 기다리며 디데이를 세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사실 이런 생각들도 여행을 다녀와서 하는 것이지

초원 위에 서있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머리가 비워져 있었다.



'D-843'

몽골 다녀온 지도 며칠 안된 것 같은데

어느새 디데이가 줄어있다.

그 말은 이제 843일만 지나면 기다리던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디데이라는 것은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지나고 나면 후련하다. 뭔가 숙제처럼 느껴지는 점도 있어서일 것이다.


몽골에 다녀온 지금, 어쨌든 여행을 무사히 잘 마치고

예쁘고 좋은 사진도 건지고, 행복했다는 사실에 매우 후련한 상태다.


실제로 디데이가 되어보니 막상 상황이 좋지 못하더라도

843일을 잘 버티며 살아왔다는 뜻이 된다.

그 말에 또 위안을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 843일 뒤에도 오랜 기다림만큼 매우 후련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때까지 다른 자잘한 디데이들을 세면서

하루하루 소중하게 보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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