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요.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오늘 당신의 기분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이라는 질문에 이리 오래 고민해야 된다니.
배고픔, 졸림, 피곤함, 배부름, 피곤함, 피곤함, 복잡함앞장을 넘기고 넘겨도 비슷한 단어들만 반복될 뿐이다.
배고픔과 배부름이 기분을 나타내는 말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채, 일기장의 첫 장으로 돌아가본다.
‘기쁨’
365 매일 적기, 하루 한 번씩 질문하기, 5년 후 나에게 등 물음표를 가득 채운 질문형 일기장들이 한차례 유행을 타고 한참이 지났을 어느 날, 서은이가 이 일기장을 선물로 줬다.
[생일 축하해, 너 이거 담아뒀길래 선물한다.]
SNS 프로필에서 깜빡하고 지우지 못해, 장바구니 한편에 거의 묻히다시피 한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이걸 누가 볼 수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서은이 덕에 에어팟, 케이크, 시루떡 등 생각나는 대로 하트를 눌러 담았던, 무의식의 취향으로 가득했던 다른 물건들을 숨길 수 있었다. 언제 담아둔 지 모를 이 유물을 제외하곤.
‘학창 시절 좋아했던 가수는?’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까지 빼놓지 않고 매년 그 가수의 콘서트를 갔던 터라 눈 감고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있는 반면,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추억이 있다면?’
몇 번을 다시 고민해 봐야 되는 질문도 있었다.
기쁨. 자신 있게 적었던 그날의 기분은 생일선물을 받아서가 아니라 서은이에게 연락이 왔었기 때문이다.
짝꿍도 두 번이나 하고 학원도 같이 다니고 야자를 같이 쨌던 서은이었는데 어느 순간 연락이 뚝하고 끊겼다.
‘설렘’
생일을 시작으로 몇 번 안부인사를 나누던 서은이를 만나기 하루 전이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질문에 빼곡한 답을 써내라고 한 페이지의 하단에 위치한 오늘의 기분에 설렘을 적어 넣었다.
학교가 끝나면 근처 편의점에서 매운볶음라면에 스트링 치즈 한 장 그리고 삼각김밥을 비벼 든든히 속을 채웠다.
참치김치인지 혹은 전주비빔인지, 이번에 신곡이 나온 아이돌의 콘서트는 어떨지, 역사 선생님의 향수 냄새는 왜 이렇게 지독한지, 이러다 버스를 놓치는 건 아닐지 등등.
편의점은 늘 그렇게, 끝나지 않는 학생들의 무질서한 대화들로 시끌시끌하기 바빴다.
그리고 테이블 한쪽 끝에는 라면소스는 다 넣어야 제맛이라며 은근히 자존심을 부리는 나와, 그 옆에서 그렇게만 먹으면 속이 맵다고 복숭아맛의 찐득한 요구르트가 섞인 음료를 권하는 서은이가 있었다.
그때 그 속이 맵다고.. 맵다고 표현했던 말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기억은 안나는데 뭐 대충 다음날 속이 쓰리 다는 거겠지 하고 대답하는 그녀는 어느새 3년 차직장인, 한대리가 되어있었다.
10년 만에 만난 서은이와의 점심은 무척이나 어색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편안하면서도 실수라도 할까 걱정되는 어딘가 모르게 안 친한 회사동료와 밥을 먹는 듯한 느낌을 동반했다.
주말 약속을 잡으려다가 알고 보니 서로 회사가 근처라 평일 점심에 만나기로 했다.
클라이언트 미팅이라고 1시간 일찍 볼 수 있다는 그녀의 말에 점심시간 전 한 시간 연차를 썼다.
10년 공백을 메우기에 두 시간의 만남은 무척이나 짧아 보였다.
그렇지만 그냥, 그렇게라도 시간을 내서 만나는 게 어디인지, 클라이언트가 된 내가 그녀 시간에 맞추기로 했다.
수업 종이치고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50분 동안 어떻게라도 더 같이 놀고 싶어 복도를 마구 뛰어다니던 날들이 점점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
하루하루 스터디 플래너에 공부시간을 적어가며 안 풀리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던 10대와, 시간이 어떻게 흘러는 가지도 모른 채 30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20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엄마,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아.’
‘원이는 지금 20킬로로 달리는 거야, 나 봐. 나는 80대라 80킬로로 달리고 있다니까. 시간이 정말 빨라.’
예배 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랑 같은 구역에 속한 권사님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80키로면, 그럼 너무 어지럽겠다고 생각했다.
20킬로로 달리는 이 시간도 이렇게 빠른데, 나의 30대, 40대 그리고 80대는 얼마나 빠를지 그리고 그날은 또 오긴 할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늘어두었다.
가장 무난하게 서로의 회사 중간쯤 되는 브런치 카페에서 베이글과 크림파스타를 먹었다. 그녀의 회사는 내가 매일같이 출근하는 강남역의 12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한 무역회사였다.
건물 앞에 하루하루 형태가 달라지는 입체 미디어 조형물이 신기했는데 그녀는 회사 이념, 조직 문화 이런 건 별 거 없고 그냥 대표가 완전 기분파라 조형물도 그렇다고 답을 해주었다.
'대표가 완전 기분파거든.'
'그 약간 조울증 같은 거야?'
'아니? 그냥 기분이 맨날 좋대. '
한대리님의 회사 이야기와 몇 년 전 갑상선 수술했다는 이야기와, 이 카페에서 소개팅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더니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원아 담임이 반장 오라던데?.'
'철학과 가면 돈 못 벌까?'
'난 진짜 계속 얘 팬 할 거야.'
'원아, 나 재수하려고.'
서은이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그렇지만 어쩌다가 만난 고등학교 동창쯤으로 남은 내가 물어보기엔 무거운 질문들이 될 것 같았다.
어떠한 질문들은 원치 않은 방향으로 휘어져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내기 충분하다는 걸 아는 나이니까,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비겁해지고 있으니까.
[원아 오늘 정말 재밌었어, 먼저 계산해 줘서 고맙다. 얼마 보내주면 돼? 알려주라. 나중에 또 보자.]
[아 서은아, 오늘 너희 회사 앞 조형물은 뭐야?]
[뜬금없기는. 퇴근할 때 사진 찍어서 보내줄게.]
서은이와 한번 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또 클라이언트 미팅을 한다고 나를 만나줄지 모르겠다.
9시가 되도록 그녀는 퇴근하지 못한 걸까, 가만히 사라지지 않은 1을 쳐다보게 된다. 조금 어지러운 것 같은 기분에 일찍 잠을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