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al the Show (8)

by 티니Tini

연으로부터 도망쳐 왔던 여름날, 원은 세제가 다 떨어져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한 달 정도면 일 리터가 되는 세제를 거의 다 쓰게 된다는 감각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세제면 세제, 휴지면 휴지, 지난 3년 간 살림살이의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히 부피를 채워 주었던 연의 빈자리는 이렇게도 표가 나는구나 싶어 한숨이 푹 나는 원이었다.

원은 물건을 쟁이는 성격은 못 되었다. 우선 물건들을 다이고 질 만한 힘이 없었다. 그리고 끙끙거리며 물건을 드는 일은 더욱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배달시키기엔 각종 스티로폼이 지구를 갉아먹는 일에 일조하는 것 같아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원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잠깐의 시간과 미약한 체력을 썼다. 



벌써 세제를 두어 번 정도 사러 나갔다. 연을 두고 제주도를 떠나 온 지도 두어달 때쯤 되었을까. 원은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세탁기처럼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면 아주 잠깐의 가을이 오고, 다시 긴 겨울이 오겠지. 
바쁘게 살다, 점을 찍듯 어딘가로부터 떠나왔던 그 계절이 되면 연이 더 보고 싶을 것 같았다.


연이 숨바꼭질을 참 잘하던 아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원은 그가 술래도 잘할까 궁금했다. 연과 만나는 3년 동안 연은 늘 술래였고 늘 원을 찾아냈다. 

연은 늘 조용히 보폭을 좁혀 슬쩍하고 원을 찾아냈다.

만나는 동안 언성을 높여 서로를 몰아붙였던 날들이 없었다. 연은 화가 나면 말을 잃었고 원은 그런 연이 한마디라도 더 저에게 해주기를 가끔은 짜증이라도 내길 바랐다.


띠리링- 원은 빨래를 꺼내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부러 한 번 더 세탁 버튼을 눌러버렸다. 한 시간 뒤에 다시 띠리링- 울리겠지. 아무 생각 없이 세탁기 앞에 앉아 시간을 축냈다.



연이 아직도 저를 찾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면서,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원이었다. 한 달 차에는 몇 통의 부재를 남기더니, 이제는 폰도 잠잠해졌다. 아마, 연은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단단하고 단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연을 만나게 되었다.

연은 꼭 그랬다. 짜증을 내면 말없이 응응- 하면서 받아주고, 투정을 부려도 말없이 안아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정한 다정 앞에서 큰 소리 한번 못 내고 사랑을 온전히 받았다.



꼭 빨래하면 비가 온다니까. 해가 쨍한 오후에 빨래를 돌려도 저녁이면 축축 해지는 제주도의 여름이었다. 열어젖혔던 창문을 뒤로하고 거실에 행거를 펼쳤다. 양말과 속옷 가지들을 널면서 연과의 첫 술래잡기를 떠올렸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시끄러운 소음 속에 야-하면 야하고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던 새벽이 계속되던 어린 날의 장면으로,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원아 내가 졌어. 드디어 찾았네.”

원의 연인은 원을 집어삼킨 듯 크고 넓은 장 우산 밑에 쭈그리고 들어와 줬다. 연이 원을 어떻게 찾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젖은 양어깨를 보고 꽤나 고생을 했겠다 싶어 마음이 미어지는 원이었다.

“연아 나는 어릴 때, 거실 바닥에 우산을 펼쳐 두고 내 집이라고 했다? 거기서 따로 살겠다고 했어.”

“근데 연아, 집에는 온몸이 다 들어가잖아. 이제 다리가 튀어나와, 좁아. 많이 좁아.”

편의점에서 파라솔을 뜯어오겠다는 실없는 농담을 한 원의 연인이 슬쩍 손을 맞잡아왔다. 축축한 손을 몇 시간이고 잡고 있었다. 좁은 틈에서 자꾸 공간을 내어주게 되는 게 이상했다. 나오라고 해야 되는데, 연에게 들어오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빨래를 다 널고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연을 생각했다. 그가 있는 서울에도 비가 올까. 그의 손을 잡고 연신 울면서 미안하다고 히끅거리던 그날처럼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제주도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