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일기
보호병동 입원 첫날이다. 아직은 모든 게 혼란스럽고 낯설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쥐고 한 곳에 모였다. 아픔과 상처가 모여있는 곳에, 나 또한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이곳에 와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나의 특별함을 찾고 싶었다. 어쩌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우울증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며 이 병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길.
이곳에서 만난 다른 환자들은 빨리 퇴원을 하고 싶어 한다. 핸드폰 반입이 금지된 이곳이 너무 심심하고 답답하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퇴원하기가 무섭다.
우선 사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 학교 생활을 잘 해낼 자신이 없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두렵다. 정신과 입원까지 한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다.
다음으로 나는 사실 현재 우울증이라는 방어막이 다행스럽고 좋다. 항상 완벽한 사람이어야 하는 나는, 그렇지 못할 때마다 병을 탓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지 못해 지각을 해도, 과제를 성의 없게 제출해도, 주위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해도 그저 우울을 구실 삼으면 된다. 나의 이런 행동들은 사실 나의 특성이 아니라 병 때문에 생긴 특성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하다. 우울증이 나의 보호막인 샘이다.
마지막으로 퇴원을 하게 되면 입원 전 내 모습으로 돌아갈 까봐 두렵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나의 과거는 모두 너무 힘든 기억들 뿐이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현재 내가 원하는 나의 이상적인 모습은 하고 싶은 일들이 생김과 동시에 그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아직까지는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어떠한 일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면담치료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진짜 원하는 것과 많이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어린 나는 엄마 아빠의 칭찬이 고팠다. 하지만 나는 동생처럼 예쁘지도 않았고 감정 표현도 잘 못했고 애교도 재롱도 못 부려서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때는 공부를 잘할 때뿐이었다. 그게 나의 생존 전략이었고 그래서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공부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하고 싶었던 일이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일로 전환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줄곧 스스로가 호불호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디를 가나 그저 그렇고 딱히 자기의 의견을 내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치료를 받으면서 내가 표현을 안 할 뿐, 생각보다 내 주관이 명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토록 나에 대해 무지했다. 나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리스트업 해 보았다. 나라는 존재가 조금은 더 뚜렷해진 느낌이었다.
막 끝난 빨래 냄새, 샴푸 냄새
달달한 디저트
연어, 육회, 마라샹궈
연보라색
눈웃음
여행, 새로운 곳 모험하기
알찬 하루를 보내고 자기 전 침대에 눕는 순간
칭찬
수다 떨기
관심받는 것
해리포터
추리물
삶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
실용적이고 특이한 물건
설렘의 감정
귀여운 것들
발라드
권력
창작, 만들기
아이패드
보들보들한 촉감
막 쌓인 새하얀 눈 밟기
퍼즐 게임
그림 그리기
한적한 장소
풀밭에 눕기
충동적인 소비
사진 찍기
핑크빛 노을
꽃
배구 경기 보기
컬링 경기 보기
아기 고양이 발바닥
밤 놀이터
학교 중앙광장
다이소 구경
면담시간, 내가 대인관계를 힘들어하고 사람들에게 말 붙이기 어려워했던 이유에 대해 탐구해 보았다. 이는 내가 잘하는 게 없어 사람들이 날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무엇을 잘했을 때만 칭찬을 받았던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린 나는 무엇인가 성취해 냈을 때만 칭찬을 받았고, 나는 무엇인가 성취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내가 가진 사고는 어렸을 때의 경험 때문이며 진실이 아닐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또한 나는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강조하셨다. 또한 설령 믿기지 않더라도 드는 생각보다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게 정신건강에 더 좋을 수 있다고도 덧붙이셨다.
오늘은 엄마와 같이 가족 상담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내가 오래 안고 있던 딸로서의 부담감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엄마가 나 때문에 결혼해서 너무 고생했다는, 그래서 나만 바라보는 엄마를 위해 내가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부담감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고생한 이유는 오로지 아빠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고, 나는 그냥 내가 행복한 일을 하면서 옆에만 있어주면 된다고 했다. 엄마의 입술로 그 말을 들으니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오늘의 면담 주제는 '나의 호불호'였다. 나는 내가 호불호가 매우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많은 것들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양가감정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게 아니라, 두 가지 감정 모두 다 소중하고 돌보아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인간관계가 엮여 있으면 나의 호불호를 숨기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맞춰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나의 주관과 감정은 무시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사실 주관이 뚜렷하고 호불호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그르치고 싶지 않은 마음, 무리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이를 방해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내가 호불호가 있다고 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듣고 보니 그랬다.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은 잘 활용하면 무리를 이끌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지 결격사유는 아니었다. 앞으로는 내가 호불호를 가져도 인간관계를 잘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주말이다. 주말에는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께서 안 계셔서 말동무도 없고 프로그램도 없기에 굉장히 심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평일인 어제 내 담당 사회복지사 선생님께 컬러링북, 백문백답, 색종이 등을 받아 혼자여도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다. 먼저 백문백답을 꺼냈다. 이름, 키, 혈액형과 같은 기본 정보부터 나의 장담점,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이상형 등을 묻는 질문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답하기 힘든 질문도 많았을 텐데 지금은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나’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것 같아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