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by 연보라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의 일정이나 사건을 나열하는 대신, 그때그때 느낀 감정을 적어 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엔 쉬울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메모장을 켜자 떠오른 건 ‘기쁨‘, ’ 슬픔‘, ‘분노’ 같은 몇 가지 단순한 단어들뿐.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에 꼭 들어맞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지만, 이름 붙일 수 없었다. 마치 온몸이 뿌옇게 뒤덮인 안갯속을 헤매는 듯했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그건 바로 ‘우울‘이었다: 하지만 그 단어를 일기에 적는 건,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어버리는 일 같았다.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삶을 사는 ‘강한 사람’인 내가 우울할 리 없다며 그 단어를 다시 마음속으로 집어넣었다.


종종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힘들었지만 끝내 우울하다는 사실만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고, 유난스럽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이유도 없이 무너지는 마음은 결국 내가 나약한 사람이라는 증거 같았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를 탓했다. 친구 관계의 균열도, 가족 간의 마찰도, 공부에 대한 무기력도, 지각도, 대충 낸 과제도 — 모두 내 성격과 의지 부족 탓으로 정리했다.

그러다 접하게 된 우울증 관련 콘텐츠는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만약, 이게 모두 내 탓이 아니라면? 사실 모든 건 내가 병에 걸린 탓이라면?

우울증 진단이라면 나의 이 이상한 상태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은 점점 확고해졌다. 나는 우울증이어야만 했다. 차라리 이 모든 상황이 나의 의지 문제가 아닌 병 때문이라면, 조금 더 힘을 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이라면 치료할 수 있는 것이기에,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주요 우울장애 진단 기준을 살폈다.

‘이건 맞고, 이건 좀 애매하고…’

9가지 증상 중 마지막 증상을 표현하는 항목에서 눈이 멈췄다. 마지막 증상은 바로 자살 기도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단 기준에 들어맞고 싶었다. 그 기준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 게 너무도 두려웠다. 내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엉망이 된 이유가 단지 나라는 사람 그 자체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충동적으로 약을 삼켰다.

그리고 결국, 나는 원하던 병명을 얻어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게 된다.




1부, 밤의 밑바닥에서 헤엄치다. 끝.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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