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병쟁이가 된 것 같아요

by 연보라

다시 찾은 병실은 익숙한 듯 어색했다.

병동 안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왜 나는 이렇게 멀쩡할까.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보고 망상을 하고 자해를 하는 다른 환자들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부러움을 느꼈다. 그런 증상들이 있어야 정말 ‘아픈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래야 비로소 치료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와 반대로 나는, 그저 아픈 척하며 이곳에 있는 거짓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표면적으로는 우울 삽화로 인해 힘들어서 입원을 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나는 그냥 현실 도피형 입원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학교 수업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자살 충동도 무기력한 표정도 입원을 위해 내가 일부로 만들어낸 쇼 같았다.

나는 이미 다 나았는데, 오히려 내가 병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더 아프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부정적인 생각에 밀어 넣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말을 들은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힘들어해도 괜찮아요. 울어도 괜찮고, 웃어도 괜찮아요. 도망쳐도 괜찮아요. 그 도망침은 이겨내기 위함 일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마음은 계속되었다.




우울은 나에게 늑대의 그림자다. 늑대처럼 두려운 존재지만 그림자는 날 직접적으로 해칠 수는 없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늑대가 무섭다. 그래서 결국 그 두려움에 스스로를 공격하고 만다.

어쩌면 잘못된 방어기제의 작용일지도 모른다.

나를 지키려던 마음이 방향을 잃고, 결국 나 자신을 해치고 있는 것일지도.

그림자는 나를 물지 않지만, 나는 그림자에 물린 사람처럼 아파한다.



어느 날,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내게 말했다.
“보라 양은 의지가 약해서 병이 낫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지가 강해서 지금껏 병을 억누르고 숨겨온 거예요.”

그 당시, 그 말이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의 새로운 시각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의지가 부족하다고, 나약해서 병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자책해 왔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반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의 억눌림과 침묵, 괜찮은 척 버티던 시간들이 사실은 강한 의지의 또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고.
선생님의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프고 싶은 이유:

- 우울을 드러내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게 없을까 봐. 내 정체성이 사라질 까 봐.

- 우울로 인해 맺게 된 인연이 끊어질까 봐.

- 나의 작품에 대한 영감이 사라질까 봐.



내가 아픔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이유:

-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오늘 음악 감상 시간에는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조울증은 같이 가면서 돌보아주고 알아가야 하는 친구라고 말씀해 주셨다. 완치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어주는 것보다 차라리 그 표현이 마음에 든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내가 이번 아픔을 통해 또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나를 물어봐주고 같이 알아봐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이곳에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병동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마음의 병을 앉고 들어온다. 나도 그렇다.

나는 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나는 지금의 내가 특별하다고 느낀다.

근데 왜 바깥세상이 아닌 나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내가 더 특별하다고 느낄까? 병이 있는 사람은 병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더 특별함을 느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먼저는 두 공간이 특별함을 책정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는 대체로 학업 성적, 근로 소득, 이루어 낸 업적 등 성취를 기준 삼아 사람들을 평가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병의 경중이 더 중요하고 중할수록 더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나에게는 노력하여 성취를 이루는 것보다 병세를 악화시키는 게 훨씬 쉬웠다.

다음으로는 이곳의 분위기이다. 프로그램 시간, 우리는 각자의 취향, 느낌, 생각, 표현 방식을 존중하고 서로를 격려해 준다. 그러면서 각자의 개성이 도드라지고 나는 그런 느낌이 좋다.

생각해 보니 나의 목적은 특별한 나만의 개성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것이 꼭 우울이 아니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안다. 계속 부정적인 생각을 만들어내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일부로 부정적인 감정을 짜내고 극대화하여 나를 힘들게 만든다. 오늘도 그랬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굴어 안달일까?' 갑자기 서러웠다. 나도 가능하다면 낫고 싶다. 가능하다면 행복해지고 싶다. 가능만 하다면 남들처럼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하며 살고 싶다.

눈물이 났다. 정말이지 너무 서러웠다. 양가감정이 미웠다. 왜 나에게는 양가감정이라는 것이 생겨 나를 이리도 괴롭힐까.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잘 살고 싶은데...', '나도 행복해지고 싶은데...'를 되뇌며 계속 울었다.

나는 왜 자꾸 무엇인가가 되려고 할까? 그냥 '나'이면 되는데.




오늘 면담 시간에는 내가 조울증인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에 대해 분석해 보았다. 먼저 나는 우울증 진단 기준을 맞추기 위해 일부로 약물 과다복용을 했다. 이건 내가 정말 우울증이어서가 아니라 우울증이고 싶어서 한 행동으로 어떻게 보면 연기였다.

두 번째로, 나는 선생님께 나의 증상을 과장해서 설명했다. 사실 그렇게 까지 힘들지 않은데 선생님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또 내가 힘들어 보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세 번째로는 내 인생에 서사를 더하기 위해서 조울증을 이용했다. 나만의 특별한 스토리를 가지지 않은 삶은 무가치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미래에 내가 할 실수들에 대한 핑계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환자라는 호칭을 얻고자 했다. 병에 걸린 것이라고 하면 내가 저지르는 잘못과 나태함에 대해 합리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힘들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워 조울증이라는 병을 빌려 설명하고자 했다.

이런 생각이 들면 나는 내가 모두를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고, 단지 내가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이러한 사기극을 벌이다니 게으르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치의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렸을 적 나의 한 일화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레모나가 먹고 싶었던 어린 나는 왜인지 직접적으로 레모나를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 엄마께 신게 먹고 싶다고 돌려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신 게 먹고 싶다'라고 돌려 말한 것은 마음속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말하는 방식의 차이인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처럼 설령 내가 힘들다는 표현을 아프고 싶다고 하고 있어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대처 방식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물론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지만 나는 우울증을 선물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우울증 치료를 통해 내가 많은 것을 성취하고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습들이 꼭 우울을 통해 드러나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우울증에 걸린 2년간 3곡, 회복기엔 200여 곡을 쓴 한 피아니스트를 예로 드셨다.

이에 나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전히 특별해지고자 하는 욕심은 있지만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나를. 대학교를 입학하여 본 많은 뛰어난 학생들을 따라 나도 열심히 노력했을 것이다. 다양한 활동들에도 참여하고, 자기 계발도 했을 것이다. 더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나를 주장하는 능력을 키웠을 것이다. 다른 주제로 책도 쓰고, 전시회도 열었을지 모른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재능이었을 테니.

사실 살아보지 않은 삶은 알 수 없지만 우울증에 전혀 걸리지 않은 나를 상상해보니 우울이 조금 미워졌다. 나의 많은 것을 앗아간 우울지 비로소 밉게 보이기 시작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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