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을 생각해 보면서
사실 나는 지구가 존속하지 않아도,
인류가 하루아침의 꿈처럼 사라져도 정말 괜찮다.
실제로 아무렇지 않고 아무런 작위를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지구에게는 나은 일이라 _
과연 인정하고 수긍하며 조용히 동의한다.
나도 내가 학생일 때는
이런 말을 하는 선생님이 이상해 보였는데.
살다가 하나 늦게야 알게 된 것 하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살면서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가끔 나를 보고 꼭 그분이 떠오른다는 몇몇의 말을 들으면 격렬하게 저항했다.
"60년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그분의 손톱이라도 겨우 닮겠네요" 라며 화내는 게 고작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나도 이 세상은 처음이라
세상에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 선생님에게 속으로 질문하는 버릇이 생겼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_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곤 한다.
물론 모든 것을 질문하지는 않지만
그분도 모든 답을 하지는 않아서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살다 보니 세상에 하나 겨우 알게 된 건
겨울엔 이 행성에 생명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고요하다가도 봄이면 그 사실이 거짓말이 되어
이를 놀랄 새도 없이 이미 모든 게 다 되어있다는 점.
세상은 부지런히 별로였다가도
생각보다 아름답다는 것
태평양 어딘가 이름 모를 섬 바베이도스에 인신매매로 팔려가 갇혀 살아가는 누군가와
내일 지구가 당장 사라진다 해도 읽던 책을 꺼내 마저 읽을 사람도 지구 어딘가에는 같이 숨 쉬고 존재한다는 것.
누군가에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과
한평생 모은 돈을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 공존한다는 것.
시장 앞에서 수세미를 만들어 내다 파는 할머니와
벤츠 마이바흐에서 누가 열어준 문을 통해 내리는 사람,
둘 사이에 접점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세상에 나고 죽는 것 이상의 차이는 없다는 것
그러니 '와! 이 세상 살기 진짜 힘들었습니다' 보다
'지구가 생각보다 아름답구나'
라고 묘비명에 적어달라 부탁해야겠다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