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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이철희, 김재규에 대해 보고 들은 이야기

by 송종문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며칠 뒤인 6월 10일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다. HID에서 복무하던 아버지는 갑작스레 중앙정보부로 발령이 났다. 첩보와 관련된 임무를 해왔고 중앙정보부 창설 멤버였던 이철희가 HID 부대장이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중앙정보부로 가서는 첩보 관련 업무를 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중앙정보부에서 했던 일은 거의 말씀을 하지 않았는데 일과 관해 유일하게 들었던 것은 화폐개혁 이야기였다.

군사 정부는 '퇴장 자금을 끌어내어 경제 개발 재원으로 활용하겠다'며 1962년 6월 10일 제3차 긴급 통화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날부터 '환'화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고 화폐 단위를 10분의 1로 절하된 '원'화로 바꾸며 6월 17일까지 모든 자연인, 법인 등이 보유한 환화 표시의 은행권, 어음, 수표는 금융 기관에 맡기라는 내용이었다. 수치에 밝았던 아버지는 전국 각지에서 신고, 예치된 현금의 액수를 분석하는 업무를 맡았다.

"관련 직원들끼리 내기를 했지. 어느 동네에서 제일 많은 현금이 나올지... 대개 서울 중심가 00동, 00동을 많이 꼽았는데, 의외로 대구 00동에서 제일 많은 현금이 쏟아져 나오더라고. 다들 깜짝 놀랐지"

지금이야 서울 강남에 대한민국 부자들이 몰려있지만 60년대 초만 해도 대구에 큰 부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일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직접 보았거나 가깝게 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가끔 했다.

예를 들어 이철희 장영자 사건의 장본인이었던 이철희 중앙정보부 차장의 이야기.
이철희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 출신으로 5.16 쿠데타 당시에는 준장으로 육군 방첩부대장(보안사/기무사의 전신)이었고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자 해외공작국장, 해외 담당차장보 등을 역임하였다. 1973년부터 1978년까지는 중앙정보부 이인자인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이철희의 부관(혹은 비서?)으로 일했는데 얼마나 성격이 꼼꼼하고 철두철미한지 모시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집무실 책상을 청소해야 하는데, 책상 위에 있는 책 한 권, 연필 한 자루만 옮겨도 귀신같이 알고 누가 내 책상 건드렸냐고 따지는 거야. 그래서 청소하기 전에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의 자리를 분필로 표시한 다음 살짝 들어내고 청소 뒤에 분필자국을 지웠지."
"그렇게 철두철미한 사람이 어쩌다가 장영자 같은 여자에게 넘어가 그런 희대의 사기극(사상최대의 어음사기극인 장영자/이철희 사건)에 휘말렸는지 당체 모르겠다니까"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일으켰던 김재규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다만 김재규에 대한 이야기는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할 때 직접 겪은 이야기는 아니고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면 막강한 권력자였지. 김재규와 가까운 사람이 78년에 준공된 회현지하상가에 조그만 가게를 열었는데, 김재규가 그 사람을 보러 가서는 상가 관리사무소장에게 제 아는 분이 00 호에서 장사를 하시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는 거야. 사람이 아주 겸손했다더군"

이런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그 사람의 전모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피상적인 언론 보도나, 정치적 의도로 꾸며진 묘사들보다는 훨씬 솔직한 실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관련 역사] 장영자 이철희 사건은 1982년에 발생한 경제 범죄 사건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금융사기 사건으로,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장영자는 주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건설업체들을 찾아가 남편의 경력(안기부 차장, 유정회 의원)을 들먹이며 현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특수자금이니 절대 비밀로 하라."며 현금을 빌려주고는 담보가 필요하다며 빌려준 돈의 몇 배에 이르는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예를 들어 공영토건에서는 빌려준 현금의 9배에 이르는 1,279억 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아냈다. 이들 부부는 이렇게 받은 어음을 할인해서 생긴 돈을 다른 회사에 빌려주며 같은 짓을 되풀이하였다. 이렇게 받은 어음의 총액은 7,111억 원으로 당시 한국 GDP의 1.4%, 정부 예산의 10%를 차지할 정도의 거액이었다.

이 사건으로 철강업계 2위 일신제강, 도급 순위 8위였던 공영토건 등이 부도가 났다. 그리고 이철희, 장영자 부부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형과 미화 40만 달러, 엔화 800만 엔 몰수형, 추징금 1억 6,254만 6,740원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무총리와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외무부, 문화공보부, 법무부 등 10여 명의 장관을 비롯해, 검찰총장, 국가안전기획부장, 민주정의당 사무총장, 정무수석비서관, 사정수석비서관 등 5공 실세들이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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