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10살이 될 때까지 매년 생일에 수수팥떡을 손수 집에서 만들었다. 작은 아이의 10살 생일을 끝으로 수수팥떡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5년 후 올해 공교롭게도 큰아이의 양력 생일과 작은 아이의 음력 생일이 겹쳐진 기념으로 오랜만에 수수팥떡을 하게 되었다.
새벽안개처럼 뿌옇게 변한 베란다 창문과 집안 가득한 팥 삶는 냄새는 몇 년 전까지 내가 주최한 11월에 열렸던 행사를 알려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11월생인 두 아이의 생일에 새벽부터 일어나 수수팥떡을 만드는 것은 나에겐 의미 있는 행사였다. 큰아이 10년, 작은 아이 10년, 그렇게 10여 년을 11월에만 두 번씩 수수팥떡을 하곤 했다. 하는 동안은 ‘이거 언제 끝나나...’라며 힘든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작은 아이가 11살이 되면서 10여 년을 해 오던 떡을 안 하고 있으니 11월이 되면 허전하고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큰 아이가 세 살 생일이 되기 며칠 전 시어머니께서 “아이가 10살이 될 때까지 생일마다 수수팥떡을 해주면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란단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 네...” 대답을 얼버무렸다. 자신 있게 한다고 대답을 하지 못한 나는 친정엄마께 전화를 걸었다. “엄마, 시어머니께서 아이 생일 때마다 수수팥떡 해주면 좋다고 내가 직접 했으면 하시는데 어떡해요?”라고 물었다. 친정엄마께서도 “네가 힘들겠지만 직접 해주면 아이들에게 더 좋겠지.”라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한 번도 아니고 10살이 될 때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음식 하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시어머니께서도 남편을, 친정엄마께서도 나를 위해 10살 생일 때까지 손수 수수팥떡을 만들어 주셨다고 한다. 죄송하게도 나와 남편은 수수팥떡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과 먹었던 기억도 없지만, 두 어머님의 정성으로 이렇게 무사히 자랐으리라 생각하며 나도 아이를 위해 두 분의 어머님처럼 ‘11월 수수팥떡’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집에서 처음으로 하는 떡은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수수를 불리고 빻아 뜨거운 물로 익반죽을 했다. 뜨거운 반죽을 하는 데도 시어머니는 손녀를 생각하시는 마음에서인지 뜨거움을 느끼시지 않는 듯했다. 정성을 들여 시어머니와 새알 옹심이를 빚었다. 시어머님이 빚은 옹심이는 자그맣고 동그랗게 예쁘게 빚어진데 반해 내가 빚은 것은 크기도 모양도 들쑥날쑥 해 예쁘게 빚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가 빚은 옹심이는 팥의 도움을 받아 티가 나진 않았다. 뜨거운 물에서 둥둥 떠오른 옹심이를 건져내시며 이것이 옹심이가 익은 것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알려주셨다. 팥을 두어 시간 푹 삶아 설탕과 소금으로 간을 하여 새알 옹심이에 팥을 입히면 백일과 돌잔치 때 먹었던 수수팥떡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아이의 생일에 시어머님의 솜씨와 정성으로 만들어진 맛있는 수수팥떡은 가족들과 함께 의미 있는 생일을 만들어 주었다.
다음 해 아이의 생일 전 날 혼자 수수팥떡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려 했지만 1년 전 시어머니와 함께 만들었던 수수팥떡에 대한 기억은 백지장처럼 하얗기만 했다. 시어머니에게 전화로 다시 여쭤보고 수수팥떡 레시피도 검색하며 차근차근 준비해 갔다. 아이의 생일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시어머니와 했던 기억을 사진 캡처하듯이 떠 올려보고 검색했던 사진들을 봐 가며 하나씩 만들어 갔다. 서툴러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처음 만든 떡 치고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1년에 한두 번 하는 것이라 익숙하지 않았고 쉽사리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떡을 할 때마다 매번 새로웠고 처음 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한 해는 새알 옹심이가 잘 안 익어 딱딱한 떡을 먹어야 했고, 어떤 해는 팥이 덜 익고, 또 다른 해는 간이 안 맞아 싱거워 무슨 맛인지 모를 떡을 먹어야 했다. 매년 다른 맛의 수수팥떡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과 나눠먹을수록 좋다고 하여 첫해는 시댁·친정 부모님과 함께, 다음 해는 가까운 이웃들에게, 그다음 해는 아이의 유치원 선생님, 친구들 등 매년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그들은 아직도 모를 것이다. 매년 다르게 만들어지는 내가 만든 수수팥떡 복불복 행사에 본의 아니게 참여하게 된 것을.
‘11월 수수팥떡’ 행사에 어떤 이는 “엄마가 이렇게 매년 정성을 쏟으니 아이들이 잘 클 거야.”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이들은 “굳이 힘들게 왜 떡을 집에서 해? 떡집에서 맞추지.”라고 하기도 하고, “예전에나 수수팥떡 해 먹었지 요즘 누가 그걸 믿고 힘들게 해 먹어?”라며 힘들여 떡을 만드는 나를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과 유난스럽다는 반응들도 있었다. ‘10살 생일까지 수수팥떡을 먹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이제부턴 떡집에 맞출까?’, ‘꼭 내가 손수 해주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하며 가끔은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팥을 정성스럽게 삶고, 새알 옹심이 하나를 빚으며 ‘아이가 건강하게 해 주세요.’, 또 하나를 빚으며 ‘아이가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고 주문을 외우듯 옹심이 하나하나를 만들 때마다 아이를 위한 소망과 바람,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들이 내가 직접 수수팥떡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더 이상 흔들이지 않게 붙들어 주었다.
그러나 만드는 과정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평상시에 떡을 좋아하는 아이도 수수팥떡은 잘 안 먹는 것이었다. “이 떡 먹어야 건강하고 예뻐진데.”하며 의미 부여도 해보고, “엄마가 아침부터 힘들게 만들었는데 안 먹으면 삐칠 거야.”협박도 해가며 겨우 한 개씩을 먹일 수 있었다. 생일마다 억지로 1개씩을 먹어야 하는 의무감 때문인지 아이들은 내가 수수팥떡 만드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큰아이 10살 생일이 되던 날 “이번이 네 생일에 엄마가 해주는 마지막 수수팥떡이야.”라고 말했다. 아이는 “앗싸, 그럼 내년부턴 생일에 수수팥떡 안 먹어도 되네.”라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도 한편으론 큰일을 하나 덜어 좋기도 했지만, 아이의 반응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 또한 엄마께서 정성 들여 만드신 수수팥떡을 기억 못 하는데 10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에게 많은 기대를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해 아이의 생일에 이런 섭섭한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다음 해 11월이 되어 아이의 생일날 한가로이 있던 나에게 큰아이가 다가오더니 “엄마, 오늘은 수수팥떡 안 해요?”라도 물었다. “네가 이제 11살 되었으니까 올해부터는 안 할 거야. 억지로 떡 안 먹어도 되니까 좋지 않아?”라도 되묻자 아이는 “매년 내 생일 하던 수수팥떡 막상 올해는 엄마가 안 해준다고 하니까 조금 섭섭한 거 같기도 해서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섭섭함이 나에게는 기쁨과 뿌듯함을 느끼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아이도 떡의 맛을 떠나 엄마의 마음과 정성을 이제 알게 된 것일까. 아이는 11월의 다른 날 동생 생일에만 엄마가 떡을 만드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듯했다.
가끔씩 행사 때나 매체를 통해 수수팥떡을 볼 때면 ‘다시 한번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도 든다. 매년 맛이 다른 복불복 수수팥떡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다시 먹고 싶기도 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여 년간의 ‘11월 수수팥떡’ 행사는 끝이 났지만, 아이들을 향한 나의 마음과 정성 그리고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와 남편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시는 나의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