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믹스를 마신다.
점심시간이 2시간 남은 11시가 되면 어김없이 고비가 찾아온다. 배에서 신호를 보내고 입이 궁금해진다. 나도 모르게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다. 운이 좋은 날은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빈 서랍이다. 아침에 아메리카노를 마셨으니 커피를 또 마시면 안 된다고 나를 다잡아 보지만 이내 커피믹스로 손이 간다. 허기진 나의 위장과 입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바로 그것, 난 이미 커피믹스 easy cut 부분을 뜯고 컵에 검고 하얀 마법의 가루를 붓고 있다.
배가 고파 커피믹스를 마실 때면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아이유)이 생각난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커피믹스 3,4개를 커다란 컵에 한꺼번에 타마시던 그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이지안을 보며 커피믹스 한 박스를 사주고 저녁 한 끼 배불리 먹고 싶을 만큼 마음이 쓰이던 그녀였다. 그렇게 하루에 몇 잔씩 커피믹스를 마시지만 그녀는 살이 안 쪘다. 왜?... 끼니를 대신했으니까.
그런데 난 하루가 다르게 배가 나온다. 복부비만을 이야기할 때면 커피믹스를 마셔서 그렇다며 죄 없는 커피믹스 탓을 한다. 끼니 꼬박꼬박 챙겨 먹고 간식에 커피믹스까지 마신 결과물을.
한 동안 지하철역을 도배한 배민의 문구가 생각난다. '치킨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
커피믹스는 살 안 찐다, 내 뱃살만 찔 뿐.
커피믹스는 한국이 최초로 만든 발명품이다. 2017년 특허청이 진행한 설문조사 ‘우리나라를 빛낸 10대 발명품’에도 들었다. 커피믹스는 5위를 차지했다. 1위는 훈민정음, 2·3위는 거북선과 금속활자였던 쟁쟁한 후보군 사이에서.
커피와 프림, 설탕이 한 데 섞인 커피믹스는 손쉽게 타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맛까지 보장한다. 식후, 당이 떨어질 때, 기분이 우울할 때 커피믹스는 그 진가를 발휘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반한 이유일 것이다.
캡슐커피머신을 집에 들여놓은 이후로 커피믹스를 덜 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집 한켠을 커피믹스에 내어준다. 부모님이나 손님 접대용으로. 그리고 캡슐커피로 채워지지 않는 어느 날 커피믹스가 나의 입안과 위 그리고 뱃속까지 충만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복부비만을 걱정하면서도 멀리할 수 없는 커피믹스, 그 특별한 무언가가 행복한 시간을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