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보레 트래버스는 한국GM이 위축된 브랜드 위상을 끌어올리기 위해 내놓은 야심작으로 볼 수 있다. 특히 2018년에 출시한 SUV 모델 ‘쉐보레 에퀴녹스’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기존 주력 모델 노후화로 내수 하락세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브랜드에 활력을 불어넣을 ‘구원투수’로 등판한 것이다. 정통 픽업트럭 모델인 ‘쉐보레 콜로라도’ 역시 힘을 보태기 위해 국내에 상륙했다.
‘기묘한’ 판매 및 마케팅 전략에서도 한국GM이 트래버스와 콜로라도에 거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먼저 한국GM은 신차 출시에 앞서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가입했다. 트래버스와 콜로라도가 전량 미국에서 생산돼 국내 도입되는 차종인 만큼 철저하게 ‘수입차’로 관리해 마케팅을 전개하겠다는 의도다.
이를 통해 다른 대형 SUV와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새다. 트래버스 국내 판매 가격은 4000만 원 중반부터 시작한다. 국산 모델인 ‘현대자동차 팰리세이드’보다 높게 책정됐지만 수입 모델인 ‘포드 익스플로러(5000만 원 중후반)’와 비교하면 해볼 만하다.
트래버스는 국내 사업에 대한 한국GM의 의지를 보여주는 모델이기도 하다. 제작년 한국GM이 경영정상화를 선포하면서 발표한 신차 15종 출시계획에 따라 6번째로 국내에 선보인 차종이다. 자체적으로 신차를 개발하고 생산할 여력이 없는 여건 속에서 수입 방식으로 들여온 트래버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약속 이행을 위한 한국GM의 노력이 눈물겹다. 트래버스는 2018년 북미시장에서 14만6534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현대차 싼타페(11만7000여대)와 기아차 쏘렌토(10만7000여대)보다 많은 판매량으로 쉐보레 브랜드 SUV 중에서 두 번째로 인기가 높다.
제너럴모터스(GM) 본사 입장에서 보면 현지 인기모델을 굳이 시장규모가 크지 않은 한국에 내어줄 필요가 없어 보인다. 트래버스는 작년에만 20%에 육박하는 성장세를 기록한 모델로 생산물량을 모두 현지에서 소화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GM은 지속적으로 GM을 설득하면서 트래버스의 국내 출시를 타진해왔다. 작년 여름 트래버스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후 출시까지 1년 이상 걸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 공장 생산계획을 조율하고 국내 모델 사양을 결정하는 등 수입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1년여 기다림 끝에 공식 수입된 ‘한국판’ 트래버스를 시승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한국GM이 준비한 시승회는 4인이 차 한 대를 나눠 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2명이 한 대를 체험하는 기존 시승과 다른 부분이다. 한국GM 측은 넓은 뒷좌석까지 폭 넓게 차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시승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했지만 빠듯한 현지 생산일정과 인기로 인해 국내 시승차 확보가 녹록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트래버스가 국내 시장에서 꽤 ‘귀한 몸’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외관의 경우 첫 눈에 봐도 거대한 몸집이 인상적이다. 크기에서 느낄 수 있는 존재감이 주변을 압도한다. 사실 지난 2009년 선보인 1세대 트래버스는 미국 시장에서 ‘풀사이즈(초대형) SUV’로 분류돼 판매됐다. 8인승 탑승 구조로 만들어졌고 경쟁사 모델보다 차체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트래버스가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와 동급으로 분류됐던 것이다.
국내 출시된 현행 트래버스는 2세대 7인승 모델로 2017년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차체 길이는 이전 세대 모델과 동일한 수준이지만 미국 시장 기준이 변경되면서 2세대 모델부터는 ‘미드사이즈 SUV(Mid-Size SUV)’로 분류돼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다른 업체들이 SUV 덩치 키우기에 나선 영향도 일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트래버스를 비롯해 현대차 팰리세이드와 기아차 모하비(현지명 보레고), 텔루라이드, 포드 익스플로러 등 국내에서 대형 SUV로 불리는 모델들은 실제로 미국에서 미드사이즈 SUV로 분류된다.
차체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5200mm, 2000mm, 높이는 1785mm다. 경쟁모델로 꼽히는 포드 익스플로러(5040x1995x1775)보다 덩치가 크다. 휠베이스 역시 3073mm로 익스플로러(2860mm)보다 길다.
육중한 체구지만 외관 디자인은 도시적인 느낌이 강하다. 브랜드 특유의 듀얼포트 라디에이터 그릴을 중심으로 중형 세단 말리부 등에 적용된 쉐보레 ‘패밀리룩’이 곳곳에 녹아들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디자인이지만 체구에 걸맞게 조금 더 과격한 스타일을 기대했다. 콜로라도와 패밀리룩을 이뤘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RS 트림’이나 ‘레드라인 스페셜 에디션 트림’을 선택하면 다소 심심한 디자인이 보완된다. RS 트림은 블랙 엠블럼과 20인치 다크 알로이 휠, 블랙 크롬 그릴 및 안개등 베젤 등이 적용된다. 레드라인 에디션은 전용 20인치 휠과 레드 컬러 포인트, 다크 테일램프 등이 더해진다.
실내 디자인은 기존 쉐보레 보유자들에게 익숙한 구성이다. 특히 공조기 버튼과 기어노브 디자인이 말리부와 비슷하다. 화려한 치장보다는 실용성에 중점을 둔 모습이다. 익숙함을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지만 단조로운 구성은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덩치에 걸맞게 실내공간은 여유롭다. 좌석이 2+2+3으로 배치된 7인 탑승구조로 이뤄졌으며 2열 좌석은 독립식 ‘캡틴시트’가 적용됐다. 3열 시트 레그룸은 850mm로 동급에서 가장 넓은 수준이라고 한국GM 측은 강조했다.
주행 초반 고배기량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 특유의 묵직한 감각이 인상적이다. 2톤(공차중량 2090kg)이 넘는 차체를 가볍게 밀고 나간다. 스티어링 조향 감각은 부드럽다. 한 손 조작도 무리가 없다. 여성 운전자들이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는 요소다. 저속에서는 정숙하지만 발끝에 조금만 힘을 주면 경쾌한 엔진음이 울리면서 즉각 달려 나갈 채비를 갖춘다. 엔진음은 기계적인 튜닝이나 기교가 더해지지 않았다. 자연흡기 고유의 ‘날 것의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요즘 흔한 터보 엔진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성이다. 멀티링크 서스펜션은 평소에 부드러운 승차감을 제공하지만 요철이나 험로에서는 꽤 단단하게 하체를 잡아준다.
한국GM 관계자는 “트래버스에 대한 소비자 반응이 예상보다 뜨겁다”라며 “월 400~500대 정도 판매되면 성공적인 실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