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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Jan 03. 2022

[우주는 일곱 살] ep.97_가을 나들이



꽤 오래전 이야기다. 내가 삼십대 초반이었으니까 말이다. 

외국에서 직장을 다니다 막 귀국했을 때였고 작가로 데뷔한 지도 얼마 안 된 때였다. 그야말로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새파란 청춘이었다. 


그 무렵 TV나 잡지, 신문에서는 '골드 미스'라는 용어를 참 많이 썼다. 지금 와 생각하면 뭐 그리 낯뜨거운 용어를 남발했나 싶기도 하지만 삼십대 여성이 노처녀라 비하되던 시절이 끝장난 즈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골드 미스'를 언급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던 한 셀럽을 나는 기억한다. 지적인 마스크와 훌쩍 큰 키, 나와 동갑내기라는 그는 출판사 대표였다.     


죽어도 결혼 따윈 않겠다던 나는 시간이 훌쩍 지나 마흔두 살이라는 나이에 혼전임신을 하는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리고 출판사 대표가 되었다. 정말 사람 인생 어디로 튈지 모른다니까. 내가 이렇게 살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골드 미스' 출판사 대표와 친구가 되었다. 


놀라운 건 그뿐이 아니어서 그 친구도 나와 같은 시기, 대형사고를 쳤고 우리는 이제 동갑내기 딸을 키우는 엄마들이 되었다. 그가 독일에 살고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아기들 사진을 나누며 안부를 전하곤 했다.     


아침부터 서둘러 일을 끝내놓고 대청소를 시작한 건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하러 한국에 온 친구와 그 딸을 우리 집에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일곱 살이 된 두 아이는 저희끼리 잘도 놀아서 우리는 밀린 수다판을 벌이기만 해도 되었다. 맥주와 와인을 잔뜩 사놓고 가까운 식당에 해물탕거리를 준비해달라 부탁했다. 아이들은 만나자마자 좋아서 방방 뛰었고 사실 우리는 더 방방 뛰었다. 하루를 꼬박 놀고도 모자라 우리는 다음날 아이들과 함께 놀이동산으로 향했다.     


"너무 놀랍지 않아? 쟤들 봐. 지금 저희들끼리 줄 서잖아. 우리가 같이 안 있어줘도 되잖아. 저거 봐! 겁도 안 내!"     


아이들은 정말 저희들끼리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둘이 올라타고, 벨트도 잘 매고 잘 풀었다. 무서울 법도 한 놀이기구도 '꺄아아아' 소리 지르며 잘도 탔다. 친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기까지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감동이야! 너어무 용감해, 진짜 용감해! 우리 언제 쟤들 저렇게 다 키웠지? 응?"     


급기야 나는 혀를 쯔쯔 찼다.     


"나만 딸바보 똥멍청이인 줄 알았는데 여기 또 하나 있었네."     


어린이용 바이킹을 타는 아이들을 지켜보던 친구는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내 옆자리로 와 앉았다. 날은 따스했고 나무들마다 옅은 단풍이 내려앉아 있었다.     


"신기해."     


미소가 담뿍 묻은 얼굴로 그가 말을 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뭐가? 애들 저렇게 큰 거?"

"아니. 내가 이렇게 사는 거."     


그렇구나. 나도 내가 신기한데. 너도 그런 생각을 했구나.     


"이렇게 살 줄 몰랐거든. 어떻게 살 줄 알았냐면… 음,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이렇게 살게 될 줄은 몰랐어. 낯선 나라에서 일도 안 하면서 허둥지둥 아이를 키우고…. 조금은 외롭게? 외로운가? 어쨌거나 그런 기분으로 살게 될 줄 몰랐어."

"응, 나도 내가 이렇게 살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로."     


커피가 아니라 맥주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우리는 커피를 자꾸자꾸 들이켜며 막 웃었다.     


"그래도 어떻게 후회가 안 되는지 모르겠어! 하나도 후회가 없어! 젠장, 쟤가 뭐라고! 쟤 하나 때문에 이렇게 시시하게 살아도 괜찮은 것 같다고!"     


아이들은 엄마들의 하소연을 듣지 못하니 마냥 신이 나서 우리를 향해 손만 흔들었다.     


"저거 봐! 저렇게 용감하잖아! 바이킹을 타면서 울지도 않아! 우리 애들 너무 잘 키운 거 아니니?"     


다른 친구네 아이들은 군대도 갔고 올해 수능도 본다는데 고작 우리는 일곱 살 아이들을 두고 그렇게 기특해하고 있었다. 보드라운 솜사탕 같은 구름이 동동 뜬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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