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해 실마리를 잡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
"그는 사력을 다해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아, 30여 년 전 은표 어머니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는 이제야 앙갚음을 완수한 것이다."
- <아저씨의 훈장>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입으로만 용서를 베푼 한 인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 무얼 위해 사는지, 내일이란 게 있는지 도통 수수께끼로만 가득해서 원망과 분노를 일으켰던 남자. 바로 우리 아버지다. 지금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계실지, 편히 주무실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애를 먹일 거면 어머니와 결혼은 왜 했으며 자식은 뭐하러 낳아서 이 고생을 시키는지. 아버지에게 풀어놓지 못한 한탄을 애꿎은 어머니에게 토해낸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아버지에게도 원하던 것이 있었음을 이 소설을 읽고 깨달았다.
바로 훈장! 훈장이었다.
위선
"너우네 아저씨의 자랑을 들어 주고 칭송할 사람도 그만큼 줄었다. 자신의 내력이 더 이상 자신을 빛내 줄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너우네 아저씨는 눈에 띄게 풀이 죽어 갔다."
- <아저씨의 훈장>
아버지는 4남 3녀, 형제 많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였다. 아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막 광복을 하고 한국 전쟁이 임박했을 무렵 태어났으니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라났으니 무슨 귀염과 예쁨을 받았을 것인가. 위에 있는 형들은 공부를 잘 해서 명문대를 가고 도시 여자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집안과 별 교류도 없이 자기들 삶을 지켜내느라 바쁘게 살아갔다. 아버지는 방과 후 산으로 올라가 소에게 먹일 풀을 베어 지게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다. 할아버지 병수발에 대소변까지 손수 받아내는 착한 손자이기도 했다. 아마 집안에 잘 해야. 온 몸으로 봉사하고 충성해야 조금의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마 그것이 자신의 훈장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도 아니고, 대놓고 앞에서 못된 짓 하는 아들도 아닌. 온갖 집안일이며 궂은 일은 도맡아 해서 소처럼 우직하게 살아가는 삶. 누군가 자신을 인정하고 칭찬해주길 목말라 하며 애정에 굶주려 있었을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 <아저씨의 훈장>에 나오는 너우네 아저씨는 친아들 대신 조카를 데리고 피난을 나온다. 겉으로는 조카를 잘 키우며 동향인들에게 인정받는 게 낙으로 보였던 아저씨. 서술자는 그의 행위를 위선이라 치부한다. 언젠가는 껍질이 벗겨 온 천하에 드러나야 마땅한. 남들에게만 잘 하고 정작 자신의 가족에게는 생계를 위한 돈도, 다정한 말도 하지 않았던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나의 심정이 서술자와 다르지 않았다.
외롭고 초라한 자물쇠 장수
"봉지쌀과 자반고등어 때문인지 자물쇠가 훈장으로 보이는 엉뚱한 착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외롭고 초라한 자물쇠 장수에 지나지 않았다."
- <아저씨의 훈장>
인문계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이 교양도 없고 말주변도 없다. 그저 밤낮 화투와 카드 놀이에 정신이 팔려 어렵게 들어간 회사 생활도 위태로웠다. "대체 왜 저럴까?"부터 "왜 하필 이 사람이 우리 아버지일까?"로 이어지던 질문들. 답도 없는 질문들을 붙잡고 나의 청춘은 온통 멍 투성이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진정한 헤아림이나 용서는 가당치도 않았다. 아무리 불쌍하게 보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냥 한 켠에 그 생각을 몰아넣고 상관없이 살았다. 그런데 모의고사 지문으로 나온 이 작품을 대하고 아차 싶은 거다.
"그래서 그랬었구나!"
자신의 부모에게는 싫은 소리 한번 제대로 못하고 아내와 자식들만 고생시킨 그의 모습이 자신만의 훈장을 무기 삼아 살아온 너우네 아저씨와 오버랩되었다.
이제야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완전히는 아니다. 그 시대, 그 세대의 모습을 통해 넌지시 짐작할 뿐. 그렇게라도 그를 이해하고 싶은 내면 깊숙한 의문점이 아직 남았던 걸까? 그러나 마음은 한결 가볍다. 그때 상황을 떠올리면 고통스럽고, 이제 그는 없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이다.
"내가 그를 직시할 수 있기까지 자그마치 서른두 해가 걸렸던 것이다."
- <아저씨의 훈장>
본인도 속으로는 아팠으리라. 후회도 가득했을 것이다. 더 잘 해주지 못했음을. 자신의 훈장만 지니고 가족들의 고통은 외면한 삶을. 애정 결핍과 지독한 인정 욕구를 해소하려 끊임없이 주전부리를 입에 넣어야 했음도. 술과 담배 대신 음식을 달고 살아야 겨우 허기가 가시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았던 그였음을. 한 마리 정제되지 못한 짐승에 불과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양육되지 않아 거칠게 산 세월. 이제는 진짜 마음에서 그를 놓아줄 시점이다. 마음 속 응어리가 아닌 진정 자유롭게 떠나갈 수 있도록.
"Good-bye, d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