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초대장

당신의 배짱은 어디에서 나온 건가요?

by 윤작가

"꽃 속에 동그란 무늬를 가지고 있는 꽃. 단단한 것을 무르게 하는 그 씨앗과 바위에서 피어나기도 하는 모습은 지지 않는 강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송신도 할머니를 떠오르게 합니다. 함께하는 사람들과 손잡으며 10년의 재판을 견디셨던, 비록 재판에는 졌어도 나의 마음만은 지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송신도 할머니, 오히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캠페인, 시위, 증언에 참여하시며 인권운동가로서의 모습을 꽃피우셨고, 1997년에는 일본 내에서 인권상을 수상하셨습니다."

- 마리몬드 안내 소책자 중에서


명품을 알고 살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기에 남들이 다 아는 명품에 대해선 무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사회적 기업에는 관심이 가는 편이라서 공익성과 미적 요소가 가미되면 그 브랜드는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아이돌들이 착용하는 팔찌, 휴대전화 케이스, 티셔츠 등과 상관없이 이 기업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할머니들에게 기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이미 영구 고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 같으면 적지 않은 돈이라고 흘려보냈을 텐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판매 수익을 기부한다는 말에 주저 없이 휴대전화 케이스를 바꿨다. 저번주부터 시작된 저스티스위크*에 최대 70%까지 할인한다길래, 충동구매 욕구도 한몫 한 셈이다. 마리몬드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신 할머니들께 각자의 특성에 어울리는 고유의 꽃을 부여해 드리는 휴먼브랜딩 프로젝트 '꽃할머니'를 실시하고 있다.


'숨길 수 없는 넘치는 마음', 용담 안점순 할머니


'자애로운 마음으로 앞장서는 한 송이의 고고함', 목련 김복동 할머니


'여리지만, 눈부시게', 복숭아꽃 박차순 할머니


'지지 않는 당당함', 패랭이꽃 고(故) 송신도 할머니


"너무 아파요...... 으으으...... 절 죽이세요......" 응급의학과 의사이자 저자인 남궁인 씨가 그의 책 <지독한 하루>에서 말하는 삶의 현장은 치열하다 못해 죽여 달라고,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아가느니 차라리 지금 당장 죽여달라고 힘겹게 호소하는 전신중증화상 환자의 절규 그 자체이다. 살아있는 게 지옥 같고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시간 속에서 살아 나왔음이 다행이라고 감히 말할 수조차 없는 그녀들. 생지옥에서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본 정부에게 진정 어린 사과를 받기 위해, 자신들의 잘못으로 그곳에 간 게 아니었고 역사의 피해자들이었음을 당당하게 밝히기까지 숨죽이고 숨어서 정체성은커녕 모진 비바람을 그대로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기괴한 장면이었다. 숯처럼 익어버린 형제를 하나 두고, 사람들은 검댕을 묻혀가며 돌아가면서 그를 짓눌렀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아닌 것에 인간들이 위해를 가하는 장면 같았다. 이 과정에서 그가 삶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운명처럼 시간을 되돌려 폭발 직전으로까지 갈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욱 울분을 토해가며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기적처럼 생을 다시 찾는다 해도 그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불타서 익어버린 육체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았다. 그러니 우린 고작 그에게 그런 일을 권하고 있었던 걸까."

- 남궁인, <지독한 하루> 중에서


보이지 않는 마음과 영혼까지 극한 상처를 입고 살아남은 그들에게 남은 것은 죽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일. 한 송이 꽃으로 피기도 전에 짓밟혀버린 꽃송이들이 어딘가에는 다시 뿌리를 내리고 모진 바람을 견디며 끝까지 나아가는 일.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을 할머니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해나가고 있다. 길가에 흔히 피어있는 꽃의 소중함을 예전에는 몰랐다. 그냥 한 번씩 웃고 지나갔을 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또 어김없이 피었구나.'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누구보다 참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오신 그분들이 우리보다 더 큰 용기와 배짱을 가지고 기나긴 시간, 재판을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당당히 외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김숨 작가의 소설로 탄생된 일본군 '위안부' 김원옥 증언집,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를 사랑해서 할 수 있었어.

너도 너를 사랑해.

네가 있어야 내가 있지. 내가 있어야 네가 있고.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황금률이야."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흔히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 누구보다 뼛속 깊은 상처와 시련을 겪고 살아내신, 살아오신 할머니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황금률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화상을 입어야만, 그 시절 일본 군인들에게 짓이기고 밟혀야만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하지 않아도 그녀들의 증언집을 통해,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함께 아파하고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다. 비극 속에 갇히지 않고 그 슬픔을 뛰어넘어 삶에 대한 의지와 살아갈 에너지,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비극이 주는 힘이다. 며칠 동안 추운 날씨를 뒤로 하고 어느새 환히 퍼진 햇살처럼 주문한 휴대전화 케이스와 함께 날아온 그녀들의 초대장이 내게도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을 준다. 기쁨을 준다.


"욕 잘하는 사람, 남 흉 잘 보는 사람은 피하며 살았어.

누가 돈을 꾸어가 안 갚아도 달라는 소리를 못 했어. 얼마나 어려우면 못 갚을까 싶어서.

갚을 마음이었으면 벌써 갚았겠지 했어.

갚을 때까지 기다렸어."

- 김숨,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중에서


* Justeace Week(저스티:스 위크)는 정의를 뜻하는 justice(저스티스)와 평화를 의미하는 peace(피스)의 합성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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