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이런 일도...
고생 많은 우리 집
내가 살고 있는 건물은 몇십 년은 된 것 같다. 딱 봐도 허름하다. 우리 집을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조금 미안하지만. 허세를 버리고 진실을 말하자니 그렇다. 정확히 몇십 년이 되었는지까지는 모른다. 그러나 외벽에 실금이 가있고, 주인집의 경제관념으로 도시가스가 설치되어 있지 않는 걸로 봐선 오래되었다고 봐야지(올해 주인집은 도시가스 설치, 나머지 층은 아직…)
기름보일러도 털털털하며 겨우 버티는 마당에 "오 마이갓!" 오늘은 부엌 바닥이 한강이다. 어제부터 발바닥에 물기가 느껴지는데 그러려니 했다. 나란 인간이 아주 치밀한 편은 아니라서.
그런데 주르륵!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곰팡이꽃(?)이 화려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건만. 그래도 뭐 어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조금은 태연하고 조금은 무식하게 살아왔는데 도저히 버틸 형편이 아니었다.
샛노란 우산 속 글귀
어제는 학원으로 가는 길,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그런데 집을 나서자마자 가랑비가 후드득. 아차 싶은 마음에 돌아갈까 했지만 버스 시간이 빠듯해서 그냥 모르는 척 걸었다. 대신 손에 들고 있던 교재를 우산 삼아 어찌해서 학원 도착.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다 돌아간 시간. 학원에 남아있는 우산 중에 노란색이 눈에 들어와 신세 좀 졌다. 그런데 비는 내리지 않고 정류장에서 우산을 접었더니 우산을 동여매는 끈 가운데에 낯익은 글귀가 적혀있다.
"CARPE DIEM" 직접적인 의미로는 현재를 잡으라는 뜻이다. 우산을 잡아매는 끈에 현재를 잡으라는 글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순간, 너무 좋아!
요즘 기후 위기 때문인지 기나긴 장마에 태풍. 가을장마까지 이어져 작년까지 괜찮았던 우리 집 천장이 도저히 견디질 못하고 멋들어진(?) 그림을 그리더니 이제는 검은곰팡이꽃에 이어 바닥까지 흥건해질 정도로 심한 누수... 하... 이것이 인생이다. 살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다. 주인집에게는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든다. 대놓고 욕은 안 했지만, 평소 누수에 대처해서 방수에 신경을 더 쓰고 기술자를 불러 돈이 들더라도 손을 봤더라면 어땠을까? 지나간 후회와 원망이 차올랐다.
"우리도 수해민이 되었네."
그러나 우리 집은 인재라고 하지만, 자연재해로, 또 누군가의 안일함과 게으름으로 제방이 무너져 목숨을 잃은 사람들까지. 그동안 뉴스에서 봐왔던 사람들이 스쳐가며 그들에게 미안했다. 이렇게 신상에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이 일어나니 말이다.
사건이 터졌을 때 중요한 것은 증거 자료. 그래서 사진을 찍어뒀다. 이것도 훗날 하나의 추억 내지는 나만의 역사로 남을 테니...
우아한 그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해야 할지 멘붕에 빠진 나와 달리 어머니는 느긋하다. 무엇이 그녀를 동요하지 않게 만들었을까? 한국 전쟁이 끝나고 힘든 시기 태어난 어머니는 이미 고난이라는 놈과 자주 낯을 익혀서 대수롭지 않은 걸까? 딸 앞에서 신세한탄하면 지켜보는 자식이 더 낙심할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시는 걸까? 타고난 성품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러 가지 의문을 뒤로하고 현재를 잡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럽고 예뻐 뒷모습을 찍었다.
"어머니, 찍어요. 이런 거 다 남겨둬야 해요. 제가 글쓰기 할 때 다 활용해야 되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자신의 일에 집중. 의도치 않게 우리 집 주방을 공개하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하트 뿅뿅 어머니표' 집밥이 탄생하는 곳이다.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 치는 나와 달리 차분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그녀를 보니 카르페 디엠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식 앞에서 찡그리지 않고 다 잘 될 거라고,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처하는 사람. 나란 사람은 도저히 그 내공을 언제쯤 쌓을 수 있을지. 구태여 쌓고 싶지도 않지만, 위기 대응 능력은 정말 한 수 위!
실패, 다시 시작하는 것
"고기 원이 준이 잘게 잘라주세요."
어머니 문자다. 외출해서도 오직 손녀 손자 입에 들어가는 고기가 먹기 불편하지 않도록. 내일 치아 교정을 해야 하는 손녀가 고기반찬 먹고 힘내서 치료 잘 받으라고 특별 부탁하는 전령이다. 하.. 진짜 대단하다!
성우 서혜정은 실패를 이렇게 정의한다.
"실패란 다시 시작하는 것. 그러니 실패를 많이 해야죠.... 나도 실패하기 전까지는 내가 주인공이고 나만 돋보여야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내가 쌓은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이 빛났으면 좋겠어요.... 내가 없어지니 삶이 참 편안해요."
그녀의 말처럼 실패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의 실패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배려가 생길까? 우리 집이 물 한 번 새지 않고 사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면 내가 이재민의 입장에 대해 얼마큼 다가갈 수 있을까? 그래도 우리는 입을 옷이라도 있고 다른 곳은 그나마 무탈한데... 그들은 옷가지도 못 챙기고 다리 뻗고 제대로 쉴 곳도 없을 거라고 어머니는 힘주어 이야기했다.
얼마 전 지인과 서울 여행을 짧게 다녀왔다. 전지현이 산다는 아파트를 바라보며 '그게 뭐,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라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구멍이 뻥 뚫린 천장 아래, 휴양지에서 쓸 법만 모자를 쓰고 조카들 입에 들어갈 고기를 볶는 어머니가 있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클로버>>라는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 '강속구를 던지는 좌완 투수는 지옥에 가서라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딱 그런 투수지. 사실 좌완이라는 것보다 저 선수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근성이야. 경기가 막바지로 몰릴수록 강해지거든."
고난이 다가오면 정신이 없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삶이 우울하네 어쩌네 떠들 정신도 없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해치우는데 온몸의 힘이 들어가 근육은 긴장되어 아프고 머리는 어떻게 해결할까 바쁘게 돌아간다. 그래도 하나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경기가 막바지로 몰릴수록 자신도 모르는 힘이 생기고 문제를 극복하면서 또 한 걸음 내딛게 된다. 과거에 묶여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옴짝달싹 못 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붙잡는 '카르페 디엠'으로 눈앞의 실패와 싸우며 극복해 가는 근성이 탄생한다. 이것이 삶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잔혹한 삶이어도 생명 있는 피조물은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하니까.
샛노란 우산 속 'CARPEDIEM'이라는 글귀를 발견한 순간 생각했다. 역시 한 번씩은 우산을 빠뜨릴 필요도 있는 거야. 그래야 이렇게 예쁜 우산도 만나고 생각지 못한 행운처럼 현재를 붙잡고 살라는 귀한 메시지도 얻기도 하니까. 이래서 인생은 재미있는 거지! 그러나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네.
실패를 하더라도
실패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면
그것은 더 이상 실패가 아니었고,
길을 잘못 들었다 싶어도
나중에 보면 그 길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것들을 배움으로써
내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
- 김혜남(정신분석 전문의)